지난 토요일, 이스라엘의 가자 집단학살 2년 규탄 전국집중행동 집회에 다녀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귀갓길 지하철에는 운좋게 빈 자리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 몸을 녹이며 집회의 풍경을 되새겼다. 일시적 휴전 합의가 아닌 영구적인 휴전, 불법 점령 종식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와 퀴어팔레스타인연대 QK48의 ‘퀴어한 질문들’ 리플렛을 손에 쥔 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내 앞에 섰다. 집회 현장 근처에 다녀온 것인지, 내가 든 지류의 글자들이 눈에 띈 것인지 두 사람은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의 의미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은 “그게 의미있어?”였다. 집회한다고 달라져? 연대한다고 ‘그게’(집단학살) 끝나? 저 사람들이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뭐야? ‘저런 건’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예전 같았으면 분노와 경멸로 마음 한 귀퉁이가 무너졌을 이야기다. 귀에 에어팟을 꽂고 나만의 세계로 달아나면 없는 셈 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귀로, 눈으로 그들의 의심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 신경증적인 반응을 흡수했다. 무방비 상태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불쑥 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다는 욕심이 솟았다. 두 사람의 시야에 팔레스타인이 포착되어 있을 때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어쩌면 두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오래 고민해왔던 연대의 확장 가능성과 그 전략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찾게 될 지도 모른다. 어떻게 말을 걸까, 들고 있던 지류를 건네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두 사람은 표표히 지하철 밖으로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 겨울 이불을 꺼냈다. 우리집에는 유독 더위와 추위가 일찍 찾아온다. 다른 집보다 반의반 계절 앞서는 집의 시계에 맞추려다보니 나도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데 익숙해졌다. 별 탈 없이 한 계절을 나기 위해 엉덩이가 가벼운 생활인이 되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움직이지 못했을까. 왜 엉덩이 한 번 들썩이지 못한 채 그들을 보냈을까. 리플렛이라도 손에 쥐어줬다면 달랐을까. 나는 왜 내가 덜 덥고 덜 추운 것에 민감한 만큼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에 재빠르지 못할까. 지하철에서만이 아니다. 나는 자주 행동을 망설인다. 테라스에서 이불의 먼지를 털어내며 집회에서 본 가자지구 현지 영상이 떠올렸다. 이스라엘에 의해 집이 파괴된 팔레스타인 아동의 영상이었다. 나에게는 집이 있다. 계절이 늦든 빠르든 돌아올 곳이 있다. 이 사실이 새삼 실감됐다. 상상 속에서 나는 아까 그 지하철로, 예전의 그 모임으로, 더 이전의 한 강의실로 돌아갔다. 나는 내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 측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심판관 역을 자임한 사람들 사이에 앉은 ‘나’는 잘 모른다는 이유로 행동을 주저하고 있다. ‘나’는 ‘의미 있냐’는 그들의 질문에 막막함을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지켜보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 자리에 앉은 과거의 ‘나’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나’는 맞은편에 선 또 다른 나를 일말의 가책으로 얼룩진 공모자의 얼굴, 침묵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인 거짓말쟁이의 얼굴을 하고 바라본다. 나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나는 ‘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나’는 곧 나다… 그러나 여전히 ‘나’인 채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오에 겐자부로가 강조했던 것처럼,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은 뭘까? ‘새로운 사람’은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오에 겐자부로는 『새로운 사람에게』에서 자신이 겪은 삶의 체험들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그의 염원은 어린이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사람’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새로운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호소한다. 적의를 소멸시키고, 화해를 달성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새로운 사람’을 목표로 살아달라고. 우리들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아마 그는 『새로운 사람에게』에 실린 다른 글, 또 자신이 평생에 걸쳐 써온 글을 읽어 온 독자를 믿고 있는 것 같다. 정말 그의 믿음대로 그의 글을 충실히 따라온 독자라면 그가 말하는 ‘새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을까. 요컨대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지식인’을 정의한 글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계를 생각하는 사람. (...) 자기가 하는 일을 중심으로 자기의 삶에 책임을 지는 사람. (...) 스스로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나아가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1이라고 한 것, 또, 경험에 관한 글을 통해 “매일 살아가면서 전에 나는 어떻게 했던가 하고 곰곰 되새겨보는 것도 상상력이 하는 일”2이라고 쓴 문장에서 ‘새로운 사람’은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보는 ‘상상력’을 토대로 자라난다는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짐작일 뿐이다. 결국 ‘새로운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건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새로운 사람’에게 어떤 눈과 귀와 입을 부여할 것인가. ‘새로운 사람’은 공모자의 얼굴을 할 것인가 아니면 페미니스트, 퀴어, 청소년, 아픈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 미친 사람, 그리고 팔레스타인인의 얼굴을 할 것인가.
집회에서 배에 구호품을 싣고 가자로 향하다 이스라엘군에 붙잡혔던 평화 활동가 해초의 발언을 들었다. 화면 속 해초의 얼굴을 보며, 막연하게 상상했던 ‘새로운 사람’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긍지를 가진 얼굴이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능력의 하나로 ‘긍지’를 꼽았다3. 해초의 얼굴에는 타인도 스스로도 속이지 않겠다는, 용기를 갖고 정면으로 문제를 마주하겠다는 긍지가 돋보였다. 그는 한 인터뷰4에서 ‘팔레스타인인의 긍지’를 높이 평가하며, 그들의 긍지와 해방 운동이 세계의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영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밝혔다. 나는 해초의 얼굴에 깃든 팔레스타인인의 긍지를 이어받고 싶다. 내가 그리는 ‘새로운 사람’은 긍지를 갖고 용기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우선 나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내가 다시 ‘나’를 마주했을 때, 그 얼굴이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거리낌 없는 얼굴이면 좋겠다. 우리의 행동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1 「’지식인’이 되고픈 꿈」 106쪽, 『새로운 사람에게』 (2004, 까치)
2 「경험으로부터 얻는 것」 31쪽, 『새로운 사람에게』 (2004, 까치)
3 「거짓말을 하지 않는 능력」, 『새로운 사람에게』 (2004, 까치)
4 해초 “내가 죽음까지 각오하고 가자로 간 이유는¨” (한겨레 21,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1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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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람에게
출판사 | 까치(까치글방)

구구 (노혜지)
2017년부터 독서모임 공동체 ‘들불’을 운영해온 모임장. 들불이라는 이름은 2019년 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2020년부터 도서 큐레이션 레터 ‘들불레터’를 발행 중이며 동료와 함께 『작업자의 사전』(2024, 유유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