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왕의 여자
18세기 사교계의 핵심이었던 살롱 문화를 이끈 대표적 인물로는 퐁파두르 부인을 꼽을 수 있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그녀는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술사학자들은 로코코 예술의 절정은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이 없었다면 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혹자는 이 시대의 예술을 로코코 양식이라 또는 루이 15세 양식보다는 마담 드 풍파두르 양식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20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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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사교계의 핵심이었던 살롱 문화를 이끈 대표적 인물로는 퐁파두르 부인(Marquise de Pompadour, 1721~64)을 꼽을 수 있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그녀는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술사학자들은 로코코 예술의 절정은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이 없었다면 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혹자는 이 시대의 예술을 로코코 양식이라 또는 루이 15세 양식보다는 마담 드 퐁파두르 양식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퐁파두르 부인은 평민 출신으로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20년을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으로 지내며 온갖 영화를 누렸고 급기야 후작 작위까지 받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한 애첩을 뛰어넘어 왕의 비서실장이자, 애인이자, 친구이자, 어머니 역할을 했다. 사실 그녀는 왕의 위해 준비된 여자였다. 오늘날 엄나들이 자식의 인생을 기획하듯이, 퐁파두르 부인은 어머니와 외삼촌뻘 되는 남자의 합작품이었다. 퐁파두르 부인의 어머니는 돈 많은 늙은 남자와 재혼하는 등 매춘부에 가깝다는 평판을 들었던 여자였다. 평소 점성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점술가에게서 장차 딸이 왕의 여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딸을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쌓고 교양과 예절을 갖추도록 교육했다. 왕의 여자가 되려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했으니, 우선 왕가와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적당한 남자와 딸의 정략결혼을 성사시키고 왕의 영지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런 다음엔 눈에 잘 띄는 분홍색이나 파란색 승마복을 차려입고, 사륜마차를 타고 왕의 사냥터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이런 노력 끝에 퐁파두르 부인은 결국 왕의 눈에 드는 데 성공한다. 스트레스와 권태 속에서 지내며 사냥과 섹스에 에너지를 쏟고 신선한 자극을 찾아 헤매는 왕에게 그런 전략이 효과적으로 통한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어떻게 그토록 오래 왕의 여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왕과의 관계를 사랑에서 우정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성적인 애정 관계를 동반자적 우정으로 전환하는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특히 이야기를 극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말재주는 왕을 유쾌하고 신나게 해주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그 어떤 주제로도 왕과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대화가 시들해지면 피아노를 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게다가 격식을 따지지 않고, 고상한 척하지 않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왕을 어려워한 나머지 더 우아하고 고상한 척하는 게 보통이었을 텐데, 그런 틀을 과감하게 깬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외동딸이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죽었을 때도 화려한 의상과 웃음으로 치장하고 왕의 곁을 지켰다.
[부셰, 「퐁파두르 부인」, 캔버스에 유채, 164x212㎝, 1756, 뮌헨 알테 피나코텍]
퐁파두르 부인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는 최고의 스폰서였다. 예술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늘 책을 가까이하고 서재꾸미기를 좋아했다. 그림, 원예, 보석 디자인에도 뛰어났으며,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했다. 심지어 대하증으로 고생하다 비데까지 고안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연극과 공연을 좋아해 극장이나 소극장을 건립하는 것은 물론 개인극장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연출한 연극을 상연하기도 했다. 성과 광장 같은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 프티 트리아농이 건설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결혼지참금이 없는 여자들을 도와주거나 신부의 옷을 마련해주기도 하는 등 자선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퐁파두르 부인이 한 가장 멋진 일은 문학과 철학의 후원자였다는 것이다. 특히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루이 15세가 위험인물로 분류했던 볼테르와 루소를 후원했으며,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 출판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계몽주의에 가장 걸맞은 책이 바로 백과사전이므로 왕가에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백과사전은 왕가는 물론 보수적인 정치가나 신학자들도 금기시했다. 백과사전은 지식권력을 일반화하는 창구였으니, 왕가나 귀족 등 기득권자들은 이를 금서로 지정해야 할 판이었다. 계몽주의의 산물로 태어난 백과사전은 이성, 합리성과 같은 인간의 능력을 이끌어내고, 결국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렇듯 계몽사상을 지원하며 인간이 미몽으로부터 깨어나길 원했던 퐁파두르 부인이 점성술사를 자주 찾아갔다는 점은 이율배반적이다. 자신의 운명을 점성술사의 한마디에서 출발했으니, 점성술과 점성술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이 점성술사에 의지한 가장 큰 까닭은 아마 위태로운 궁정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것을 불안해했다. 그래서 더욱더 외양에 집착하고 독특한 개성을 찾는 데 힘썼다. 로코코의 대표적 화가 프랑수아 부셰를 후원했던 그녀는 그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모델이 되기도 했다. 부셰의 작품을 보면 화려하고 우아한 그녀만의 패션 스타일을 볼 수 있다.
루이 15세의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퐁파두르 부인은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왕은 그녀에게 아예 정권을 맡기고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1756년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어내고, 7년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영국에 패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은 타격을 입는다. 그녀는 7년 동안 왕과 대신들에게 적절한 외교적 전술을 제안했지만, 결국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로 반대파에게 낙인 찍힌다. 퐁파두르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를 결혼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신흥 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외교를 맺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를 정략적으로 결혼시킨 것이다.
[프랑수아-위베르 드루에, 「퐁파두르 부인」, 캔버스에 유채, 217x157㎝, 1763~64, 런던 내셔널 갤러리]
퐁파두르 부인은 마흔셋의 나이에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 왕의 애첩들의 질투와 음모가 난무하는 궁정생활, 반대세력의 끊임없는 악평, 연일 이어지는 파티와 연회에서 받는 강도 높은 스트레스, 왕에게서 옮은 매독 혹은 폐렴 등 이런저런 원인을 추측할 수 있지만 그녀의 사인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되었을까? 샤를 기욤 르 노르망(Charles-Guillaume Le Normant, 1717~99)은 프랑스에서 가장 부정한 아내를 둔 한심한 남편으로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는 그녀의 배반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댄서랑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조용히 살았다. 당대 화가들이 남긴 그의 초상화를 보면, 변변하지 못한 남자로 치부되며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늙고 처연하며 쇠잔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창의적인 여자를 아내로 둔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평민 출신으로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20년을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으로 지내며 온갖 영화를 누렸고 급기야 후작 작위까지 받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한 애첩을 뛰어넘어 왕의 비서실장이자, 애인이자, 친구이자, 어머니 역할을 했다. 사실 그녀는 왕의 위해 준비된 여자였다. 오늘날 엄나들이 자식의 인생을 기획하듯이, 퐁파두르 부인은 어머니와 외삼촌뻘 되는 남자의 합작품이었다. 퐁파두르 부인의 어머니는 돈 많은 늙은 남자와 재혼하는 등 매춘부에 가깝다는 평판을 들었던 여자였다. 평소 점성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점술가에게서 장차 딸이 왕의 여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딸을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쌓고 교양과 예절을 갖추도록 교육했다. 왕의 여자가 되려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했으니, 우선 왕가와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적당한 남자와 딸의 정략결혼을 성사시키고 왕의 영지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런 다음엔 눈에 잘 띄는 분홍색이나 파란색 승마복을 차려입고, 사륜마차를 타고 왕의 사냥터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이런 노력 끝에 퐁파두르 부인은 결국 왕의 눈에 드는 데 성공한다. 스트레스와 권태 속에서 지내며 사냥과 섹스에 에너지를 쏟고 신선한 자극을 찾아 헤매는 왕에게 그런 전략이 효과적으로 통한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어떻게 그토록 오래 왕의 여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왕과의 관계를 사랑에서 우정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성적인 애정 관계를 동반자적 우정으로 전환하는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특히 이야기를 극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말재주는 왕을 유쾌하고 신나게 해주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그 어떤 주제로도 왕과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대화가 시들해지면 피아노를 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게다가 격식을 따지지 않고, 고상한 척하지 않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왕을 어려워한 나머지 더 우아하고 고상한 척하는 게 보통이었을 텐데, 그런 틀을 과감하게 깬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외동딸이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죽었을 때도 화려한 의상과 웃음으로 치장하고 왕의 곁을 지켰다.
[부셰, 「퐁파두르 부인」, 캔버스에 유채, 164x212㎝, 1756, 뮌헨 알테 피나코텍]
퐁파두르 부인은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는 최고의 스폰서였다. 예술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늘 책을 가까이하고 서재꾸미기를 좋아했다. 그림, 원예, 보석 디자인에도 뛰어났으며,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했다. 심지어 대하증으로 고생하다 비데까지 고안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연극과 공연을 좋아해 극장이나 소극장을 건립하는 것은 물론 개인극장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연출한 연극을 상연하기도 했다. 성과 광장 같은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 프티 트리아농이 건설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결혼지참금이 없는 여자들을 도와주거나 신부의 옷을 마련해주기도 하는 등 자선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퐁파두르 부인이 한 가장 멋진 일은 문학과 철학의 후원자였다는 것이다. 특히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루이 15세가 위험인물로 분류했던 볼테르와 루소를 후원했으며,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 출판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계몽주의에 가장 걸맞은 책이 바로 백과사전이므로 왕가에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백과사전은 왕가는 물론 보수적인 정치가나 신학자들도 금기시했다. 백과사전은 지식권력을 일반화하는 창구였으니, 왕가나 귀족 등 기득권자들은 이를 금서로 지정해야 할 판이었다. 계몽주의의 산물로 태어난 백과사전은 이성, 합리성과 같은 인간의 능력을 이끌어내고, 결국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렇듯 계몽사상을 지원하며 인간이 미몽으로부터 깨어나길 원했던 퐁파두르 부인이 점성술사를 자주 찾아갔다는 점은 이율배반적이다. 자신의 운명을 점성술사의 한마디에서 출발했으니, 점성술과 점성술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이 점성술사에 의지한 가장 큰 까닭은 아마 위태로운 궁정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것을 불안해했다. 그래서 더욱더 외양에 집착하고 독특한 개성을 찾는 데 힘썼다. 로코코의 대표적 화가 프랑수아 부셰를 후원했던 그녀는 그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모델이 되기도 했다. 부셰의 작품을 보면 화려하고 우아한 그녀만의 패션 스타일을 볼 수 있다.
루이 15세의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퐁파두르 부인은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왕은 그녀에게 아예 정권을 맡기고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1756년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어내고, 7년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영국에 패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은 타격을 입는다. 그녀는 7년 동안 왕과 대신들에게 적절한 외교적 전술을 제안했지만, 결국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로 반대파에게 낙인 찍힌다. 퐁파두르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를 결혼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신흥 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외교를 맺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를 정략적으로 결혼시킨 것이다.
[프랑수아-위베르 드루에, 「퐁파두르 부인」, 캔버스에 유채, 217x157㎝, 1763~64, 런던 내셔널 갤러리]
퐁파두르 부인은 마흔셋의 나이에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 왕의 애첩들의 질투와 음모가 난무하는 궁정생활, 반대세력의 끊임없는 악평, 연일 이어지는 파티와 연회에서 받는 강도 높은 스트레스, 왕에게서 옮은 매독 혹은 폐렴 등 이런저런 원인을 추측할 수 있지만 그녀의 사인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되었을까? 샤를 기욤 르 노르망(Charles-Guillaume Le Normant, 1717~99)은 프랑스에서 가장 부정한 아내를 둔 한심한 남편으로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는 그녀의 배반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댄서랑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조용히 살았다. 당대 화가들이 남긴 그의 초상화를 보면, 변변하지 못한 남자로 치부되며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늙고 처연하며 쇠잔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창의적인 여자를 아내로 둔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 아트 살롱 유경희 저 | 아트북스
책 속의 글들은 몇 년 전부터 저자가 대중강좌를 해오던 결혼, 패션, 카페, 여행, 요리 등의 테마들이다. 미술 이야기 뿐만 아니라 영화, 문학, 드라마, 인간관계, 온갖 사회문제 등 종횡무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한 화가, 한 그림의 에피소드만 얘기해도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른다. 소소하지만 그 배경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는 알 수 없는 코드들을 하나하나 해석하며 첫걸음을 떼는 이 책은 2004년에 나온 『테마가 있는 미술여행』의 개정증보판으로, 책 내용 중 결혼, 아동, 요리, 살롱, 카페, 여행의 여섯 개 테마는 개정증보판에 새로이 추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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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유경희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정신분석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 대학교에서 예술행정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수년간 미술잡지 기자와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를 운영하며 예술과 인문학을 통한 상상력과 창의력, 힐링과 멘토링에 관한 글쓰기, 상담, 특강 등을 기획ㆍ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예술가의 탄생』 등이 있다.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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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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