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바의 향을 닮은 열대 칵테일-브라질 ‘까이삐리냐’
특별히 숨어있는 뒷맛을 분석해보려 시도할 필요도 없이, 신선한 라임을 충분히 넣는 성실함이 맛에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단순함. 열대의 칵테일이 대부분 그러하듯, 까이삐리냐 역시 한낮의 열기에 지친 심신과 미각을 단숨에 균형상태로 되돌리는 힘을 가졌다. 그런데 인심이 좋다 해야 할지, 이건 잔이 커도 너~무 크다. 한 모금, 두 모금. 한 잔, 두 잔…….
글ㆍ사진 탁재형
201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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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이삐리냐(Caipirinha: 페루의 피스코 사워, 쿠바의 쿠바 리브레와 함께 남미를 대표하는 칵테일 중 하나)를 다시 만난 것은 브라질 최고의 관광도시, 포스 두 이구아수(Foz do iguacu)에서였다.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여행자가 찾는 이곳은 2.7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지는 275개의 폭포가 지상 최대의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다. 도착한 첫날 브라질 쪽 전망대를 촬영한 것을 시작으로, 아침 일찍부터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어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으로 향했다. 영화 ‘미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십자가에 묶인 채 떨어지는 곳으로도 유명한 이 장소는 정말 지옥으로 가는 문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시현상에,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어느새 난간을 넘어 그 안으로 몸을 던질지 모를 형국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촬영을 마쳤을 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후엔 폭포에 근접할 수 있는 소형보트에 올라 ‘삼총사 폭포’로 향했다. 악마의 목구멍에 비하면 실개천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아래로 배를 대자 떨어지는 물줄기의 압력에 뇌진탕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카메라를 방수케이스에 넣었지만 촬영이 끝나고 열어보니 그 안은 이미 물바다. 다행히 회로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있었으면 촬영이고 뭐고 다 마감해야 할 뻔한 순간이었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중압감이 사라지자,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졌다. 밤공기가 후끈한 포스 두 이구아수에서도 가장 뜨겁다고 소문난 곳, 삼바 리듬과 아름다운 브라질 여자들의 육감적인 몸짓이 교차하는…… 아니, 할 것으로 예상되는 나이트클럽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폭포 아래에서 카메라가 절단나지 않은 것으로 그날 치 나의 운은 다했던 모양이다.

“그러게 모르면 사람들한테 물어봐야 할 것 아니냐고!”

20헤아이스(1만 3천 원)짜리 나이트클럽 입장권을 두 장이나 덜컥 사놓고,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입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애꿎은 허 PD에게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이런 걸 두고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하던가?) 저녁 8시에 표를 살 때는 아무 말 없다가 문 안쪽으로 들어가려니 무섭게 생긴 흑인 아저씨가 우리를 막아선 것이다. 두 시간은 더 있어야 영업을 시작한다나. 아저씨의 인상을 보아하니 입장권을 환불해달라고 했다간 나의 육신을 환불해야 하는 사태가 일어날 듯싶고, 그렇다고 쿨하게 입장권을 포기하자니 나의 쪼잔함이 용납하지 않는다. 나이트클럽의 위치가 시내에서 많이 떨어져있어 주변은 황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데, 어쨌거나 두 시간을 버틸 장소를 찾다 보니 맞은편에 포장마차처럼 생긴 간이주점이 눈에 들어온다. 길지 않은 음료 목록에서 가장 윗줄에 쓰여진 것은 다름 아닌 마성의 음료, 까이삐리냐였다.


“이걸로 주세요.”

인상 좋게 생긴 흑인 청년의 손이 바빠진다. 익숙한 솜씨로 라임을 썰어 셰이커에 넣고, 설탕을 넉넉히 뿌린 다음 머들러(Muddler: 칵테일을 만들 때 재료를 찧는 작은 절굿공이)로 찧기까지, 손놀림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보면 같은 동작을 하루에 수백 번씩 반복해서 얻어진 장인의 풍모가 엿보인다. 라임과 설탕이 사각사각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한 몸이 되자 얼음을 넣고, 마지막으로 선반에서 까샤사 병을 꺼내 셰이커에 붓는 것으로 준비는 끝인 모양이다. 셰이커는 발사 준비를 마친 우주선처럼 입구가 봉해진 후, 공중으로 치솟아 리드미컬하게 뒤섞여 우리 앞에 착륙한다. 틴컵과 유리잔이 분리되자 흘러나오는 액체에선 삼바걸의 땀냄새와도 같은 독특한 군내와 상큼한 과일향이 동시에 풍겨 나온다. 그리고 잘 으깨진 얼음은 이구아수 폭포의 미니어처인 양, 유리잔 속으로 낙하하며 예쁜 소음을 만들어낸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 까이삐리냐의 맛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특별히 숨어있는 뒷맛을 분석해보려 시도할 필요도 없이, 신선한 라임을 충분히 넣는 성실함이 맛에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단순함. 열대의 칵테일이 대부분 그러하듯, 까이삐리냐 역시 한낮의 열기에 지친 심신과 미각을 단숨에 균형상태로 되돌리는 힘을 가졌다. 그런데 인심이 좋다 해야 할지, 이건 잔이 커도 너~무 크다. 한 모금, 두 모금. 한 잔, 두 잔…….

“야, 이 자식아! 너까지 잠들어버리면 어떻게 해!”

둘 다 까이삐리냐에 취해 그만 테이블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상큼한 맛에 반해 연거푸 석 잔이나 마셔댄 탓이다.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드는 허 PD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나서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런,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나이트클럽 앞에는 200미터는 족히 될 만한 긴 줄이 늘어선 지 오래다. 은행에 가도 공항에 가도 일단 줄이 늘어서기 시작하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브라질 상황을 감안할 때, 새벽 두 시 이전에 저 나이트클럽에 발을 들여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맞다. 망할 놈의 까이삐리냐! 이렇게 나를 보내버리기냐!


“시 벵데 잉그레수! 뜨링따 헤아이스(표 있습니다! 30헤아이스예요)!”
암표 장사 한 명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벵데……잉그레수…….”
한국에서 온 ‘초보 암표상’ 두 명이 그 뒤를 따르며 어색한 발음으로 외쳐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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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로드 탁재형 저 | 시공사
이 책은 해외 취재와 여행 중 탁재형 PD가 맛본 수많은 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렬함을 선사했던 어떤 술의 맛과 향기, 그리고 술에 얽힌 때론 황당하고 때론 진중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술을 향한 그의 ‘진정성’까지 느껴질 정도다. 인기 팟캐스트인 ‘나는 딴따라다’와 ‘탁 피디의 여행수다’를 통해 솔직한 입담과 위트를 자랑했던 한 애주가가 풀어내는 술과 여행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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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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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0307

2013.04.02

ㅋㅋㅋ 아 남미 여행 간 친구가 너무 부러워집니다 ㅠㅠ 앞으로도 재밌는 기사 잘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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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2013.03.31

브라질은 참 다양한걸 누릴수 있는것 같아 꼭 한번 가고싶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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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kaist

2013.03.31

이런 생생한 글들 보면 정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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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정훈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더 이상 어디 틀어박혀 공부하는 게 신물이 나 외주제작사에 들어갔다가, 호랑이 같은 감독님을 만나 박박 기면서 방송을 배웠 다. 때려치울까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술힘으로 버텼다는 소문이 있다.
2002년 <KBS 월드넷>을 시작으로 <도전! 지구탐험대>, <SBS 모닝와이드>, <KBS 영상앨범 산>, <세계테마기행>, <EBS 다큐프라임 - 안데스> 등 해외 관련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했다. 현재는 해외콘텐츠 전문 프로덕션 ‘김진혁공작소’에서 다큐멘터리 PD로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행 많이 하니 좋겠다’며 부러워하지만, 사실 그의 정체는 시청률이라는 굶주린 양떼를 몰고 아이템의 초원을 찾아 떠도는 생계형 유목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