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보여주고 철학자가 답한다!
오늘날 철학과 미학의 패러다임은 크게 변했다. 이로써 그동안 ‘미학’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배웠던 것의 상당 부분이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업데이트’라는 것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요구에 맞추어 이 책에서는 최근에 등장한 미학의 주요 흐름을 소개하면서, 근대미학과 탈근대미학의 반복적 대비를 통해 이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201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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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와 시뮐라크르
베냐민은 ‘산만함’이 현대적 지각의 특성이라 했다. 여러 매체가 쏟아붓는 영상과 텍스트의 물결에 적응하는 방법은 ‘산만함’밖에 없는 모양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그야말로 원고지 10매짜리 ‘파편’을 날리며 산만하게 살다보니, 그사이 정신의 집중도 어려워지고 무엇보다 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원래 이 책을 위한 작업은 몇 년 전에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작업에 필요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에 책을 쓰는 일도 파편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이 주제로 여기저기서 몇 차례 강의를 하면서, 그때그때 시간을 내어 내용을 보강한 것이 이제야 완성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을 내는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최근 프랑스 사상가들이 철학의 지형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다소 그 의의가 과장된 느낌은 있지만, 이들의 이론이 죽어가던 철학적 담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오늘날 철학의 주요 동력은 프랑스에서 나오고 있다. 프랑스에서 나온 담론들은 미학의 영역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프랑스의 사상가들 자신이 미학과 예술론에 직접 기여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 덕분에 그동안 잊혔던 다른 미학자들의 의의가 재발견된 측면이다. 베냐민과 아도르노는 그렇게 다시 발견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사상가들이 내놓은 주요한 개념들은 사실 이들 독일 철학자들이 선취한 것이다.
소위 ‘탈근대’의 사상은 ‘근대’의 비판을 통해 오늘날 철학이 서 있는 위치를 분명하게 해주었다. 이들의 눈을 통해 우리는 ‘근대철학’이 의식하지 못한 전제와 한계에 눈뜨게 되었다. 물론 근대의 형이상학적 지반에 대한 결정적 비판은 이미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보게 해준 것은 프랑스의 사상가들이다. 미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베냐민, 하이데거, 아도르노는 근대미학을 극복하고 있었지만, 변화된 지평 속에서 이들의 작업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프랑스의 사상가들이다. 다만 오늘날 사람들이 이들에게 돌리는 찬사의 대부분은 사실 방향이 좀 잘못된 것이다.
“많이 거론된 책은 일단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기를 좋아한다.” 베냐민의 말이다. 1990년대 초 소위 ‘포스트모던’이 유행하던 시절, 거기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기억이 난다. 이유가 있었을 게다. 이들이 하는 얘기가 너무 예술적이어서 미학 전공자에게는 별로 새롭게 느껴지지 않은데다가, 검증의 차가움 없이 예술론으로나 적합할 논리들을 마구 인식론에 옮겨놓는 그 뜨거움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철학적 ‘포스트모던’이 예술적 아방가르드의 태내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볼프강 벨슈)를 들은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그때서야 그 당혹감의 정확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사이 유행은 지나가고, 이제야 그 뜨거운 텍스트들을 차갑게 읽는다. ‘탈근대’의 뜨거운 예술성은 수용을 위해 차가운 합리성으로 한 번 걸러져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덕이든, 오늘날 철학과 미학의 패러다임은 크게 변했다. 이로써 그동안 ‘미학’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배웠던 것의 상당 부분이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업데이트’라는 것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요구에 맞추어 이 책에서는 최근에 등장한 미학의 주요 흐름을 소개하면서, 근대미학과 탈근대미학의 반복적 대비를 통해 이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각주에 참고문헌이 빈약하게 등장하는 것은 개인적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새로운 미학에 대한 본격적 독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학계의 객관적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차문헌의 요약이 아닌 저자 자신의 일차독해의 결과다.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철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작품의 빈약성과 철학의 풍성함을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비평은 작품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 자체에 참여한다. 과거에는 어떤 대상이 작품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작품 바깥에 미리 존재했지만, 오늘날 예술은 자신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정의를 자기 안에 품고 나와야 한다. 뒤샹이 소변기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예술의 정의다. 오늘날 예술에 ‘주제’라는 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왜 예술인가’ 하는 것이리라. 이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 때문에 오늘날 예술은 비평에 결정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철학과 밀접한 공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작품의 형식은 직관적으로 파악되지만, 작품의 해석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철학적 반성능력이 필요하다. 이 괴리가 우리 사회에서 서구의 현대예술을 수용하는 조건을 이룬다. 말하자면 하나의 예술언어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해석 없이 그 가시적 형식만 수용되는 것이다. 이 철학의 빈곤은 미적 풍성함으로 보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사 철학적 훈련이 된 예술가라도 전혀 다른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탄생한 예술언어를 자신이 속한 지평 안에서 이해하기란 힘든 법이다. 가령 우리 사회에서 극사실주의가 수용되는 양상을 생각해보라. 이 나라에서 사물의 세계가 그 예술언어를 낳은 미국의 대량소비사회를 닮는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때문에 이런 배경 없이 외양만 수입된 극사실주의는 전혀 엉뚱한 미학적 강령을 따르게 된다.
물론 이 괴리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외려 그 사회적, 문화적 상황의 차이가 예술언어에 대한 새로운 창조적 해석의 토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이 지평의 융합에서 생기는 결과를 ‘어설픈 베끼기’가 아니라 ‘창조적 재해석’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어차피 철학적 해석이다. 현대예술에서 느끼는 작품의 빈곤과 철학의 과잉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오늘날의 예술이 해석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현대예술의 조건이다. 물론 예술철학이 창작이나 비평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철학적 개념도구들은 현대의 예술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장이다.
이 책의 목적이 단지 최신 미학의 소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다른 목표가 있다. 그 하나는 이제야 다시 주목을 받는 베냐민의 탈근대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펼쳐짐이 실은 베냐민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이 책 전체에 의도적으로 베냐민의 그림자를 드리우려 했다. 하이데거의 존재 사상, 아도르노의 미학, 데리다의 해체, 들뢰즈의 ‘되기devenir’, 푸코의 마그리트론, 리오타르의 숭고, 보드리야르의 시뮐라시옹의 개념은 이미 베냐민이 선취한 것이다. 베냐민과 다른 사상가들의 유사성은 곳곳에 암시해놓았다. 밤하늘의 별 밭에서 별자리가 떠오르듯이 여기에 소개된 사상가들의 사유 속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일종의 리버스rebus, 즉 수수께끼 그림으로 간주하라.
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노리는 이론적 목표는 따로 있다. 현대예술은 ‘숭고’와 ‘시뮐라크르’라는, 서로 대립하며 보족하는 두 개념으로만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에 소개된 텍스트들의 독해는, 개별 사상가들의 미학 속에서 ‘숭고’ 미학과 ‘시뮐라크르’ 사상의 계기를 찾아내 드러내는 하나의 일관된 전략에 따른다. 이는 물론 현대예술의 주요한 미적 범주가 ‘숭고’에 있다는 리오타르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것의 일면성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예술에는 ‘숭고’의 무거움과, 그것을 파괴하는 시뮐라크르의 가벼움이 또한 존재한다. 숭고와 시뮐라크르는 현대인의 세계감정이 가진 야누스의 얼굴이다.
현대예술에 반영된 숭고와 시뮐라크르의 세계감정은 현대철학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현전의 철학과 해체의 전략의 대립이 그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서의 구절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대립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예지계와 현상계의 대립과 동형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실재론과 관념론의 낡은 대립이, 이론적으로 심화된 형태로, 의식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옷만 갈아입고,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현전의 신비주의와 해체의 회의주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이론적 아포리아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아마도 숭고와 시뮐라크르의 사상이 공유하는 어떤 그릇된 전제를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이 언어철학적 논구는 이 책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책을 쓸 때마다 형식실험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책을 쓰고 나서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이 책은 베냐민에서 시작하여 보드리야르에서 끝난다. 공교롭게도 베냐민의 사상은 언어의 타락으로 도입되는 역사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또한 공교롭게도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차이의 생산이 극한점을 지나 모든 차이가 내파하는 역사의 종언posthistoire을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또한 공교롭게도 베냐민의 마지막 글인 「역사철학 테제」는 역사 ‘속에서의’ 해방이 아닌 역사‘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때문에 이 책은 제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원환을 그리게 된다.
******
『현대미학 강의』는 2003년 초판이 나온 이후 그동안 23쇄를 거듭했다. 딱딱한 이론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보내주신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초판이 나온 지 어언 10년이 지났기에 판형이 낡아 보인다는 지적에 따라 새로이 재판을 찍기로 했다. 사소한 오류를 몇 가지 수정한 것을 제외하면, 책의 내용에는 본질적 변화가 없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도판을 교체, 혹은 보강하고, 기존의 흑백 사진을 컬러로 바꾼 것이다. 이 시각효과가 딱딱한 책의 가독성을 높이는 데에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베냐민은 ‘산만함’이 현대적 지각의 특성이라 했다. 여러 매체가 쏟아붓는 영상과 텍스트의 물결에 적응하는 방법은 ‘산만함’밖에 없는 모양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그야말로 원고지 10매짜리 ‘파편’을 날리며 산만하게 살다보니, 그사이 정신의 집중도 어려워지고 무엇보다 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원래 이 책을 위한 작업은 몇 년 전에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작업에 필요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에 책을 쓰는 일도 파편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이 주제로 여기저기서 몇 차례 강의를 하면서, 그때그때 시간을 내어 내용을 보강한 것이 이제야 완성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을 내는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최근 프랑스 사상가들이 철학의 지형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다소 그 의의가 과장된 느낌은 있지만, 이들의 이론이 죽어가던 철학적 담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오늘날 철학의 주요 동력은 프랑스에서 나오고 있다. 프랑스에서 나온 담론들은 미학의 영역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프랑스의 사상가들 자신이 미학과 예술론에 직접 기여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 덕분에 그동안 잊혔던 다른 미학자들의 의의가 재발견된 측면이다. 베냐민과 아도르노는 그렇게 다시 발견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사상가들이 내놓은 주요한 개념들은 사실 이들 독일 철학자들이 선취한 것이다.
소위 ‘탈근대’의 사상은 ‘근대’의 비판을 통해 오늘날 철학이 서 있는 위치를 분명하게 해주었다. 이들의 눈을 통해 우리는 ‘근대철학’이 의식하지 못한 전제와 한계에 눈뜨게 되었다. 물론 근대의 형이상학적 지반에 대한 결정적 비판은 이미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보게 해준 것은 프랑스의 사상가들이다. 미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베냐민, 하이데거, 아도르노는 근대미학을 극복하고 있었지만, 변화된 지평 속에서 이들의 작업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프랑스의 사상가들이다. 다만 오늘날 사람들이 이들에게 돌리는 찬사의 대부분은 사실 방향이 좀 잘못된 것이다.
“많이 거론된 책은 일단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기를 좋아한다.” 베냐민의 말이다. 1990년대 초 소위 ‘포스트모던’이 유행하던 시절, 거기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기억이 난다. 이유가 있었을 게다. 이들이 하는 얘기가 너무 예술적이어서 미학 전공자에게는 별로 새롭게 느껴지지 않은데다가, 검증의 차가움 없이 예술론으로나 적합할 논리들을 마구 인식론에 옮겨놓는 그 뜨거움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철학적 ‘포스트모던’이 예술적 아방가르드의 태내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볼프강 벨슈)를 들은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그때서야 그 당혹감의 정확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사이 유행은 지나가고, 이제야 그 뜨거운 텍스트들을 차갑게 읽는다. ‘탈근대’의 뜨거운 예술성은 수용을 위해 차가운 합리성으로 한 번 걸러져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덕이든, 오늘날 철학과 미학의 패러다임은 크게 변했다. 이로써 그동안 ‘미학’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배웠던 것의 상당 부분이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업데이트’라는 것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요구에 맞추어 이 책에서는 최근에 등장한 미학의 주요 흐름을 소개하면서, 근대미학과 탈근대미학의 반복적 대비를 통해 이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각주에 참고문헌이 빈약하게 등장하는 것은 개인적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새로운 미학에 대한 본격적 독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학계의 객관적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차문헌의 요약이 아닌 저자 자신의 일차독해의 결과다.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철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작품의 빈약성과 철학의 풍성함을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비평은 작품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립 자체에 참여한다. 과거에는 어떤 대상이 작품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작품 바깥에 미리 존재했지만, 오늘날 예술은 자신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정의를 자기 안에 품고 나와야 한다. 뒤샹이 소변기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예술의 정의다. 오늘날 예술에 ‘주제’라는 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왜 예술인가’ 하는 것이리라. 이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 때문에 오늘날 예술은 비평에 결정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철학과 밀접한 공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작품의 형식은 직관적으로 파악되지만, 작품의 해석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철학적 반성능력이 필요하다. 이 괴리가 우리 사회에서 서구의 현대예술을 수용하는 조건을 이룬다. 말하자면 하나의 예술언어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해석 없이 그 가시적 형식만 수용되는 것이다. 이 철학의 빈곤은 미적 풍성함으로 보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사 철학적 훈련이 된 예술가라도 전혀 다른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탄생한 예술언어를 자신이 속한 지평 안에서 이해하기란 힘든 법이다. 가령 우리 사회에서 극사실주의가 수용되는 양상을 생각해보라. 이 나라에서 사물의 세계가 그 예술언어를 낳은 미국의 대량소비사회를 닮는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때문에 이런 배경 없이 외양만 수입된 극사실주의는 전혀 엉뚱한 미학적 강령을 따르게 된다.
물론 이 괴리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외려 그 사회적, 문화적 상황의 차이가 예술언어에 대한 새로운 창조적 해석의 토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이 지평의 융합에서 생기는 결과를 ‘어설픈 베끼기’가 아니라 ‘창조적 재해석’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어차피 철학적 해석이다. 현대예술에서 느끼는 작품의 빈곤과 철학의 과잉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오늘날의 예술이 해석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현대예술의 조건이다. 물론 예술철학이 창작이나 비평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철학적 개념도구들은 현대의 예술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장이다.
이 책의 목적이 단지 최신 미학의 소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다른 목표가 있다. 그 하나는 이제야 다시 주목을 받는 베냐민의 탈근대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펼쳐짐이 실은 베냐민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이 책 전체에 의도적으로 베냐민의 그림자를 드리우려 했다. 하이데거의 존재 사상, 아도르노의 미학, 데리다의 해체, 들뢰즈의 ‘되기devenir’, 푸코의 마그리트론, 리오타르의 숭고, 보드리야르의 시뮐라시옹의 개념은 이미 베냐민이 선취한 것이다. 베냐민과 다른 사상가들의 유사성은 곳곳에 암시해놓았다. 밤하늘의 별 밭에서 별자리가 떠오르듯이 여기에 소개된 사상가들의 사유 속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일종의 리버스rebus, 즉 수수께끼 그림으로 간주하라.
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노리는 이론적 목표는 따로 있다. 현대예술은 ‘숭고’와 ‘시뮐라크르’라는, 서로 대립하며 보족하는 두 개념으로만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에 소개된 텍스트들의 독해는, 개별 사상가들의 미학 속에서 ‘숭고’ 미학과 ‘시뮐라크르’ 사상의 계기를 찾아내 드러내는 하나의 일관된 전략에 따른다. 이는 물론 현대예술의 주요한 미적 범주가 ‘숭고’에 있다는 리오타르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것의 일면성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예술에는 ‘숭고’의 무거움과, 그것을 파괴하는 시뮐라크르의 가벼움이 또한 존재한다. 숭고와 시뮐라크르는 현대인의 세계감정이 가진 야누스의 얼굴이다.
현대예술에 반영된 숭고와 시뮐라크르의 세계감정은 현대철학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현전의 철학과 해체의 전략의 대립이 그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서의 구절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대립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예지계와 현상계의 대립과 동형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실재론과 관념론의 낡은 대립이, 이론적으로 심화된 형태로, 의식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옷만 갈아입고,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현전의 신비주의와 해체의 회의주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이론적 아포리아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아마도 숭고와 시뮐라크르의 사상이 공유하는 어떤 그릇된 전제를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이 언어철학적 논구는 이 책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책을 쓸 때마다 형식실험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책을 쓰고 나서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이 책은 베냐민에서 시작하여 보드리야르에서 끝난다. 공교롭게도 베냐민의 사상은 언어의 타락으로 도입되는 역사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또한 공교롭게도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차이의 생산이 극한점을 지나 모든 차이가 내파하는 역사의 종언posthistoire을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또한 공교롭게도 베냐민의 마지막 글인 「역사철학 테제」는 역사 ‘속에서의’ 해방이 아닌 역사‘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때문에 이 책은 제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원환을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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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학 강의』는 2003년 초판이 나온 이후 그동안 23쇄를 거듭했다. 딱딱한 이론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보내주신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초판이 나온 지 어언 10년이 지났기에 판형이 낡아 보인다는 지적에 따라 새로이 재판을 찍기로 했다. 사소한 오류를 몇 가지 수정한 것을 제외하면, 책의 내용에는 본질적 변화가 없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도판을 교체, 혹은 보강하고, 기존의 흑백 사진을 컬러로 바꾼 것이다. 이 시각효과가 딱딱한 책의 가독성을 높이는 데에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2013년 8월 진중권
- 현대미학 강의 진중권 저 | 아트북스
『현대미학 강의』는 베냐민의 언어 타락을 통한 역사의 시작으로 시작해 보드리야르의 역사의 종말로 끝난다. 하지만 과연 끝일까? 진중권은 실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 사막의 원시적 숭고함처럼 보드리야르의 ‘사라짐’ 또한 역설적으로 숭고의 미학에 합류한다고 보며, 종말이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사건으로 전화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 책에 소개된 이론들은 앞으로도 한동안 학적 담론과 미적 비평에서 주도적 패러다임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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즌이
2013.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