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 비극’은 슬픈 극이 아닌 뮤지컬의 원형
고대 희랍의 3대 비극 작가란,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일컫는다. 기원전 5세기에 창작된 이들의 작품은, 25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인류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꼽히며 끊임없이 재해석, 재창작되고 있다. 불과 한 세기 동안 창작된 작품들이 현재까지도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칭송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품의 행간마다 녹아든 고대 희랍인의 깊고 다채로운 생각들과 그 문학적 성취를, 『비극의 비밀』은 읽어간다.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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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12월愛인문학’의 첫 번째 시간으로 ‘비극의 비밀’이 마련됐다.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노래, 희랍 비극 읽기’라는 주제로 『비극의 비밀』 의 강대진 저자(정암학당 연구원, 홍익대 겸임교수)가 독자들과 함께 했다. 강 교수는 우선, 희랍 비극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오해가 있다며, 이를 풀고 비극을 접할 것을 권했다.
1. 비극은 슬픈 극이 아니다 : 해피엔딩이 꽤 있다 2. 비극은 희랍 문화권 전체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 아테나이에서 만든 것만 전해진다 3. 비극 작품은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창작한 것도 아니고, 여러 번 상연하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다 : 기본적으로 1회용 국가 행사다. 미리 지정된 세 명만 출품한다. 여러 번 상연하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다 4. 비극은 체제나 특정 권력에 대한 비판은 거의 담고 있지 않다 : 민주정에서 최고 권력자는 민중이다 5. 비극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인간의 유한성 속의 존엄함을 보여 준다 6. 비극의 대사들은 자연스럽지(즉, 일상적이지) 않다 : 운문이고, 매우 고상한 어휘들로 되어 있다 | ||
“도시국가 아테나이의 국가행사에서 단 한 번 상연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그러니 ‘희랍 비극’이라기보다 ‘아테나이 비극’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몇 명의 작가가 경쟁하는 꼴을 갖췄다. 디오뉘소스 축제에서 세 명의 작가가 각기 네 작품을 출품하여 1, 2, 3등을 정했던 것이다.”(p.20) “희랍어로 ‘비극 tragoidia’이라는 말 속에 ‘슬프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원래 tragoidia는 ‘염소노래’라는 뜻이다. 아마 당시 희랍인들에게 비극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비극 경연 대회에서 상연되는 극’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사실 해피 엔딩인 비극 작품도 많이 있다.”(p.110) | ||
희랍 비극의 특징
이어 강 교수는 희랍 비극의 몇 가지 특징들을 들었다. 희랍 비극은 지금의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을 띠고 있었다. 노래 장면과 대화 장면이 번갈아 나온다는 것. 그렇다면 왜 춤추는 장면을 집어넣었을까. 강 교수에 의하면, 서사시와 연결시키기 위함이었다.
“일리아드의 서사시를 보면, 인간들의 장면 뒤 신들의 장면이 나온다. <본 얼티메이텀>을 떠올려보자. 영화는 계속 빠르게 전개되다가 느린 템포로 숨을 돌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앞의 장면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데 인간 사이의 일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하는 희랍 비극의 관행을 빌려온 것 같다. 희랍에선 한 시기에 한 가지 장르만 번성했다. 서사시, 서정시, 비극과 희극이 차례로 번성한다. 희극과 비극은 앞선 두 개의 특징을 품는다. 노래 부분은 서정시를 반영한 것으로 신들의 부분과 비슷하며, 대화 장면은 서사시적인 특징이다.”
“희랍 문학사에는 좀 특이한 현상이 있으니, 한 시대에는 한 가지 장르만 번성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원전 8~7세기에는 먼저 서사시가, 이어서 7~6세기에는 서정시, 5세기에는 비극과 희극이 번성하게 된다. 한데 이렇게 중요한 두 장르가 번성하고 난 뒤에 나타난 비극은 앞서 발전한 두 개의 장르를 자신 안에 포괄하게 되었다.”(p.106) | ||
비극의 무대 배경은 거의 언제나 왕국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것. 이런 관습을 깨뜨린 것은 에우리피데스였다. 그는 평범한 사람을 무대 위로 올렸다. 농가도 무대 배경으로 등장했다. 에우리피데스는 당시로선 놀라운 작품을 선보였다.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작품 중심부에 나오는 경향이 있다. 1400행이 일반적인 길이였는데, 700행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나왔던 것. 재밌는 것은 희랍 서사시나 비극을 볼 때 관객들은 내용을 미리 알고 갔다. 스포일러가 따로 있지 않았던 것. 다 알고 있는 신화를 다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알고 있는 내용에 어떻게 긴장을 조성할 것인지가 관심사였다. 놀람보다 긴장을 추구했던 것.
“비극 마지막에는 애곡하는 장면이 길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처럼 끝날 수 없었다. 관객과 배우의 감정이 충분히 배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첫 등장인물은 몇 줄 안에 자기를 소개하고, 다른 사람이 등장하면 그게 누구인지 소개한다. 에우리피데스가 역이용하는 관행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관객을 안달 나게끔 만들었다. 기술적인 것도 주의하면서 비극도 읽을 필요가 있다.”
희랍 비극을 읽는 이유
희랍 비극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 교수에 의하면, 비극은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희랍 사람들은 신화를 소재로 이용했다. 신화를 읽는 것은 희랍의 문학작품을 읽는 셈인데, 비극은 기원전 5세기에 융성한 작품으로 되풀이 되는 이야기의 원형이 있다. 그래서 이야기 짜기(만들기)와 이야기 분석에 도움이 된다는 것. 다른 고전을 읽는 데도 도움이 된다. 유럽 문화의 맨 앞이라 비극을 읽으면 다른 작품을 읽기에 굉장히 좋다는 것이 강 교수의 설명이다.
“희랍 비극은 인류가 처음 스스로 생각해본, 모색의 결과를 보여준다. 민주정의 산물이다. 민주정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공적인 행사에서 발표한 작품이 비극이다. 왕과 귀족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데, 희랍 사람들의 활동 범위가 굉장히 넓어서인지, 생각에 깊이가 있었다. 그래서 철학적, 분석적 사고의 씨앗들이 들어 있다. 비극의 전성기가 지나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넘어가는데, 그 토대가 비극이다.”
앞선 내용이 효용이라면, 그것을 떠나서라도 비극 자체로 즐겁다. 강 교수는 비극이 우리안에 있는 이야기 충동을 충족시킨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기원』이라는 책에 의하면, 우리에겐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충동이 있다는 것. 나치수용소에서도 자기 먹을 것을 떼어서 이야기꾼에게 전해주며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던 사례도 덧붙였다. 강 교수는 희랍 비극의 3대 작가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그들이다.
“이른바 ‘희랍의 3대 비극 작가’라 불리는 시인들이 있다. 앞서 소개한 아이스퀼로스가 그 하나고, 나머지 둘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다. 지금 우리에게 온전한 작품이 전해지는 비극 작가는 이 셋뿐이다.… 이 ‘빅 쓰리’ 이후 작가들의 작품도 전해지지 않는데, 에우리피데스 이후에는 비극 대회도 약해지고, 작품도 그다지 좋지 않아 이 세 시인의 작품이 자주 재상영 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강 교수에 의하면, 온전하게 전해지는 희랍 비극 작품은 33편이다. 아이스퀼로스가 7편, 소포클레스가 7편, 에우리피데스가 19편이다. 소포클레스 작품은 하나하나 장중하고 명작들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극의 전형성을 갖추고 있다. 소포클레스가 이상적이었다면 에우리피데스는 사실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 그는 비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 에 대한 이야기를 이었다.
“‘고대에 가장 유명했던 비극 「오이디푸스 왕」 이다. 이 작품이 이토록 유명해진 것은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이다. 그가 「시학」 에서 이 작품을 비극의 대표로 놓았던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극작품 내용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신화‘의 골자일 뿐이다.… 사람들이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대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와, 그가 발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 때문이다.”(pp.166~167) | ||
“사람들은 보통 비극(悲劇)이 ‘슬픈 극’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에게 닥친 불행의 크기와 거기서 비롯된 고통의 깊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희랍 비극이 강조하는 것은 불행과 고통보다는 그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이다.”(p.110) | ||
Q&A
비극을 보면 합창단이 나오는데, 노래를 하지 않았을까? 작가가 멜로디까지 작곡을 했나?
영문학을 배우면 ‘음악 엔솔로지’도 있는데, 역사상 최초의 음악 중에 에우리피데스가 작곡한 곡도 있다고 나온다. 여러 해석을 가해서 그렇게 재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희랍어에는 불어의 세 가지 악센트가 있다. 음악적인 악센트, 뮤지컬 악센트 등이 있다. 합창은 서정시에 해당하는데, 자유로운 운율을 쓰고 있다. 희랍어 원래의 억양에 맞춰서 읊기만 해도 노래처럼 된다. 시인이 작곡도 했다고 봐도 좋다.
“희랍 비극은 대화 장면과 합창이 번갈아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대화(또는 독백)-합창-대화-합창…’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오늘날의 뮤지컬이 이와 유사한 형식이니, 희랍 비극이야말로 뮤지컬의 ‘원조’인 셈이다.”(p.24) | ||
희랍 사람들에 의하면, 신들이 이 세계를 만든 게 아니다. 서양에서는 신학이 자연학에 들어가 있다. 신도 자연적인 존재인 거지. 서사시의 시인들은 마법을 싫어해서 신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꾸몄다. 신은 자연 질서의 일부이고, 마법은 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봤다. 신들의 지식도 완전하지 않다. 결과에 대해서만 알지, 결과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운명은 전체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학자들이 『오이디푸스』 는 운명극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결정해서 행동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결과가 신들이 예언한 것과 일치했을 뿐이다. 여러 뛰어난 학자들이 이 작품은 운명극이 아니라고 역설해왔다.”(p.1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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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서양 고전 연구자가 들려주는 희랍 비극 지상 강의이자, 문학동네가 선보이는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네번째 책이다. 희랍 비극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와 형식적 장치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기본적인 독서의 배경지식은 물론, 각각의 작품이 지닌 의의와 이에 대한 평가, 그리고 작품을 속속들이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세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같은 주제 또는 같은 모티프가 변주되는 희랍 비극 작품의 특성을 고려, 유사 작품들을 비교하며 읽는 방법과 그 재미까지 엿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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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