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희 칼럼] 곰팡이를 만났다
『분더카머』, 『그림자와 새벽』을 통해 독특한 문체와 작품 세계를 보여준 윤경희 작가가 곰팡이라는 비인간 존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글 : 윤경희
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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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본질은 만남이다. 예기하지 않았던 것과의 급작스러운 마주침이다. 그것은 나의 생활권과 신체를 뚫고 들어와 강력한 진동을 일으킨다. 지진파가 지층과 지표면의 사물에 그리하듯, 사건은 나와 내 삶을 뒤흔들고, 부수고, 무너트린다. 빛의 파장이 물질에 화학 변화를 일으키듯, 사건의 여파로 인해 나와 나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변한다. 그렇게 변한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라 할 수 없다. 그것과 함께 얽혀 변신한 무엇이 된다. 막거나 피할 수 없다. 이전과 다르게 사는 수밖에 없다. 무엇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기까지 쓰고 멈춘다.

 

곰팡이와 만난 어느 날 나는 다짐했다. 나는 언젠가 이 사건을 말로 들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 쓸 것이라고. 왜냐하면 어떤 글쓰기는 사건과 그것을 겪은 자 사이에 거리를 확보해 주니까. 글쓰기가 선사하는 초연하고 안전한 거리 감각 덕분에 사건을 겪은 자는 그것의 여파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기도 하니까. 당시에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곰팡이와의 만남에 대해 글을 써 보라는 북돋움을 받고 그러기로 약속한 지금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사건이 만남이자 얽힘인 이상, 사건이 나를 바꾼 이상, 일단 겪은 것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지기는 가능하지 않고, 일단 만난 것을 내 몸 안팎 곳곳에서 뜯어내 완벽하게 헤어지기도 가능하지 않다. 글쓰기는 해방은커녕 더 조밀한 연루와 변신을 장려한다. 사건은 피할 수 없을지라도 글쓰기는 피할 수 있으므로 나는 오래도록 곰팡이와의 만남에 대해 쓰기를 미루었다.

 

아니, 사실 이미 쓴 적이 있다. 나는 작년 봄 어떤 매체에서 비움이라는 주제로 청탁을 받아서 곰팡이가 점령한 내 거처에서 애착한 물건들을 한꺼번에 버려 비운 이야기를 썼다. 곰팡이 사건에 대해 언젠가 글을 쓰리라는 마음이 있었고, 비움은 사건 당시 내가 했던 행위 중 하나였으므로, 썼다. 글은 유감스럽지만 당연한 실패였다. 비움은 곰팡이 사건의 부수적 결과이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 마주쳐 내 안에 들어온 것은 결코 철저하게 비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곰팡이와의 만남에 대한 첫 글은 형식의 차원에서도 실패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에 맞부딪힌 자는 인식 능력에 내리쳐진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 질서정연한 서사에 도움을 청한다. 육하원칙에 따라 사건의 기원, 발단, 전개, 해결 과정, 결말을 정리해 일직선의 시간에 배열한다. 사건은 무미건조한 기록 문서로 수렴된다. 자기를 넘어서는 어려운 것을 다루기 쉽게 대상화하기 위해 학술 담론과 용어를 동원하고, 역겨움과 끔찍함의 정동을 호기심과 관찰 같은 연구자적 태도로 억누르고 위장한다. 기존 삶을 뒤흔들어 파괴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 경우, 그것과의 마주침을 인간과 인간적인 삶의 수호를 위한 싸움으로 드높이는 와중에 전쟁의 상상과 메타포에 휘둘린다. 동료 인간을 지원군으로 포섭하려고 독자의 공감에 호소하는 수사법을 남용한다. 글쓰기는 결국 혐오와 학살과 절멸의 폭력을 확산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전락한다. 지난 글은 이 모든 잘못을 저지를 위험을 인지하면서 동시에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의지에 이중적으로 사로잡힌 상태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청탁받은 분량만 겨우 채웠을 뿐이다. 다시 쓰는 이 글도 지난 글의 실패와 딜레마를 되풀이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사건은 급작스러운 마주침이고, 따라서 힘겨운 겪음이기도 하다. “겪다”라는 낱말은 오묘하게 생겼다. “겪”은 “ㄱ” 세 개와 “ㅕ” 하나로 구성되었다. 90°로 꺾인 짧은 획들 때문에 툭툭 튀어나온 모서리가 많고, 그렇게 각진 모서리들이 고난도의 레고 블록처럼 한 음절 안에 빽빽하게 조립되었다. “겪”은 조금 헤쳐 나가면 다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미궁처럼 생긴 글자다. “겪”을 발음하거나 쓸 때 나는 마치 비좁은 격벽 구조물에 갇히는 것 같다. 호흡이 멈추어 갑갑하다. 몸이 문자의 모서리마다 부딪히고 찔려서 멍들고 찌그러지는 것 같다. 

 

나는 곰팡이 사건을 겪었다. 그리고 이 만남과 겪음은 나와 나의 삶을 바꾸었다.

 

2020년 여름의 일이므로 5년이 흐른 이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 수 없다. “복기(復棋)”는 바둑 용어로, 바둑 대국을 끝낸 다음 첫 돌부터 마지막 돌까지 순서대로 기억해 다시 두는 것이다. 격자무늬 바둑판 위에서 흰 돌과 검은 돌이 그리는 각진 선들은 “겪”의 모서리와 막다른 골목과 흡사하다. 합을 겨루며 연잇거나 뭉치는 흰 돌과 검은 돌 무리의 형상은 벽지에서 강렬한 생명력으로 번져 나가는 둥그런 곰팡이 반점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복기해보려 한다. 이 기억과 기록의 노력이 앞서 말한 위험, 즉 사건을 인과론과 육하원칙에 따라 재단함으로써 세계 내 다른 존재들을 대상화하고 서사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지배의 욕망에 휘말리지 않기를, 나는 주의 깊게 바라며, 실패를 무릅쓰고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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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희

문학평론가. 비교문학 연구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산문집 『그림자와 새벽』과 『분더카머』를 쓰고, 앤 카슨의 『녹스』를 비롯하여 그림책과 그래픽노블 여러 권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