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책 읽고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잘 모르겠어요”
청소년문학과 성인 순수문학을 넘나들며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온 구병모 작가는 최근 장편소설 『파과』 를 출간했다.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의 이야기. 노년에 접어들면서 느닷없이 ‘타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주인공은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과 공허를 읽어내며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에 맞닥뜨린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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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는 잘사는 친구네 집 서가에 일렬로 주욱 꽂힌 아름다운 책들 가운데 뽑아서 자주 책을 빌려다 읽었고, 가끔 둘째 언니가 한 권에 천 원 내지는 천이백 원 하는 문고본 판형의 책들을 낱권으로 사오곤 했습니다. 그 중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어느 판본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겉장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앞뒤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꾸미고 지어내며 소설가가 꿈이라고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다녔던 아이란 당시 그 또래에 그리 흔치 않았던 모양이어서 그런지, 중2 때 담임선생님이 몇 번 불러다 『인간의 굴레』『유리알 유희』를 선물해주신 적이 있어요.”

구병모 작가에게는 책을 통해 영감을 받고 집필한 작품들이 있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을 읽고 얻은 영감으로 쓰게 된 단편소설 「파르마코스」. 2012년 <문학의 오늘> 가을호에 수록한 소설로 2014년 하반기쯤 단편집으로 묶을 계획이다. 물론 「파르마코스」는 희생양 모티프가 핵심이지만, 뼈대를 이루는 줄거리는 『개구리와 다이아몬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등의 민담에 기대고 있기도 하다. 또한 단편집 『파란 아이』에 수록한 「화갑소녀전」은 그 외피를 둘러싼 것이 『성냥팔이 소녀』이지만 그 안에 등장한 인물들은 한병철 『피로사회』에서 재인용된 보드리야르의 ‘적의 4단계’론을 대입한 것이다.

그는 평소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다. 관심사는 한두 가지만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죽기 전에 다 못 읽을 것이 틀림없지만 지금 책상 옆에 쌓여서 제 손이 타기를 기다리는 책들은 주로 질병, 종교, 후각과 미각 등의 감각, 카발라에 관계된 것들이다.

“책 읽고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잘 모르겠어요. 재미있는 것과 행복과는 다른 문제인데,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만난다 치면 대부분은 암담하거나 분노하거나 몽롱하거나, 깊이 고민하거나. 하여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고통스러운 게 보통이겠죠. 고통으로 인해 엔도르핀이 분비되니까 그걸 행복이라고 느낀다면 세상 모든 책이 그 대상이 되겠네요. 그래서 그와 같은 두 단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순수한 의미의 행복을 주는 책이라면 역시 국어사전. 날마다 보물찾기하는 느낌이니까요.”


내 서재는 ‘종이 귀신의 집’

구병모 작가는 책을 고를 때, 소설은 작가를 보고 고르지만, 처음 보는 작가다 싶으면 저의 평소 취향과 일치하는지를 알기 위해 국적과 장르를 본 다음 앞부분을 읽어본다. 인문서에 한해서는 일단 제목에 호기심을 느껴서 목차를 일별하면, 그 책이 내가 관심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대강 드러난다. 그 다음 저자 이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출판사를 본다. 이 기준은 언제나 랜덤이고, 실패한 모험의 결과가 지금 집에 꽤 많이 쌓여 있기도 하다.

“서재나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그냥 생활공간 안 여기저기에 대량의 책이 무질서하게 쌓이거나 꽂혀 있을 뿐입니다. 이사를 갈 때마다 이삿짐센터의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내 서재가 언젠가 생기면 좋겠죠. 그럼 지귀옥이라고 붙일까. 종이 귀신의 집. 털면 먼지들이 귀신처럼 부유할 것 같은 오래된 서가의 이미지가 일종의 로망이죠. 그리 되면 지금보다 기침은 더 하겠네요.”

청소년문학과 성인 순수문학을 넘나들며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온 구병모 작가는 최근 장편소설
『파과』를 출간했다.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의 이야기. 노년에 접어들면서 느닷없이 ‘타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주인공은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과 공허를 읽어내며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에 맞닥뜨린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소설로 다 하는 편이어서, 가능하면 거기에 뭔가를 보태지 않으려고 하는데 매번 하게 됩니다.
『파과』는 특히 제목이 주는 생경함으로 인해 주위의 권고 내지는 우려에 따라, 독자를 배려하는 측면에서 창작의 모티프와 제목에 대한 이중의 해석 방향까지 권말 후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노출했는데요. 그것이 이해에 도움 되었다는 분도 계시고, 사고의 여지를 막아서 좋게 보이지 않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가능하면 한 분이라도 더 많은 분들의 동의를 구하고 싶었던 조급함의 소치입니다.”



명사의 추천

브루노 슐츠 작품집

브루노 슐츠 저/정보라 역 | 을유문화사

『계피색 가게들』이라는, 지금은 절판된 책으로 먼저 만났는데요. 그가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만으로도 아찔하도록 환상적이고 아프도록 황홀합니다.



액체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저/이일수 역 | 강

모든 것이 녹아 사라진 다음 그 자리에 있는-흘러가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규정된 개념이나 정착된 의미가 하나도 없고 그 어떤 약속도 주고받을 수 없는 세계를 살아내는 인간을 뒤돌아보게 합니다.



독설의 팡세

에밀 시오랑 저/김정숙 역 | 문학동네

짧게 후려치는 듯한 시오랑의 냉소들을 마주하면, 세상에 남은 거라곤 환멸뿐이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정말 이렇게 살다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함께 들어요.



생의 이면

이승우 저 | 문이당

지금은 개정판으로 소장하고 있는데요, 대학 입학해서 학교 도서관에서 첫 번째로 대출한 소설로 기억합니다. 그 뒤로 뭔가에 홀리듯 『에리직톤의 초상』과 『가시나무 그늘』 등을 찾아 읽기 시작했어요. 첫 만남 첫 인상이란 소중하면서도 강렬한 거죠. 이 순간에도 너무 많은 좋은 책이 절판되고, 자본주의의 논리가 회전율을 올리는 식당처럼 서점과 출판사 그리고 독자를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이 책의 초판이 발간된 지 20년이 넘었다는 사실도 유의미합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상)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용경식 역 | 까치(까치글방)

워낙 수 차례 많은 분들께 호명되는 작품이어서 꼽지 말까 했는데, 저는 이 소설의 1부를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달콤한 로맨스 같은 해적판 제목으로 먼저 만났어요. ‘나를 반하게 하는 것은 별을 꿈꾸는 악동들의 눈빛이다’ 완전 본격 건전 성장소설 같잖아요. 그래서 착각하고 책을 덥석 사서 읽기 시작했네요. 첫 페이지부터 뭔가 전쟁 이후의 참상 같긴 한데 포화 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자라나는 쌍둥이의 얘기겠지, 라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읽는 내내 펼쳐지는 치열하고도 사악한 생존투쟁을 지켜보며, 내상을 입고 후유증이 남았지요. 그런데 제멋대로의 믿음에 한방 맞았다는 배신감보다는, 치열한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이 내상에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안 것 같아요.

마스터 키튼

카츠시카 호쿠세이 원저/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 대원

“원하기만 한다면 공부는 어디서든 할 수 있다네” 존경하는 교수의 말을 떠올리며 불의와 갑을 관계로 이루어진 대학교수직을 박차고 자기 논문을 지켜낸 주인공의 선택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빅 피쉬

이완 맥그리거, 알버트 피니, 빌리 크루덥, 제시카 랭, 스티브 부세미 / 팀 버튼 감독 | 소니픽쳐스

진실과 거짓, 사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것을 굳이 구획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가닿았을 때의 카타르시스.



죽은 시인의 사회

피터 위어 / 로빈 윌리암스 출연 | 브에나 비스타

한창 세상 모든 게 싫어질 나이에, 요즘 말로 딱 중2 때겠죠, 동네 동시상영관에서 이천오백 원 주고 봤어요. 그 나이 때 자신이 억압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애들이 있을까요. 오래 울었던 것 같아요.



디스트릭트 9

닐 블롬캠프 / 샬토 코플리, 바네사 헤이우드 출연 | 소니픽쳐스

한창 세상 모든 게 싫어질 나이에, 요즘 말로 딱 중2 때겠죠, 동네 동시상영관에서 이천오백 원 주고 봤어요. 그 나이 때 자신이 억압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애들이 있을까요. 오래 울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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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파과 #화갑소녀전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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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

2014.01.16

아직 파과를 읽지 못했는 데...여기서 작가를 만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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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by80

2014.01.15

뭔가 어둠침침한 느낌이 물씬~~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은 무엇때문일까요?
작품을 읽고 싶다는 호기심이 발동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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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위저드 베이커리』는 신인답지 않은 안정된 문장력과 매끄러운 전개, 흡인력 있는 줄거리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늘의작가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데뷔작 『위저드 베이커리』는 기존 청소년소설의 틀을 뒤흔드는, 현실로부터의 과감한 탈주를 선보이는 작품이었다. 청소년 소설=성장소설 이라는 도식을 흔들며, 빼어난 서사적 역량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미스터리와 호러, 판타지적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는 평을 받았다. 작품을 지배하는 섬뜩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유지시키면서도 이야기가 무겁게 얼어붙지 않도록 탄력을 불어넣는 작가의 촘촘한 문장 역시 청소년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의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집에서 뛰쳐나온 소년이 우연히 몸을 피한 빵집에서 겪게 되는 온갖 사건들은 판타지인 동시에 절망적인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며, 일반문학과 장르소설의 묘미를 적확한 비율로 반죽한 이 작품만의 특별한 미감은 색다른 이야기에 목말랐던 독자들에게 쾌감을 선사했다. 또한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마법사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비틀린 욕망은 무시무시하고,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숨기고 있는 비밀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헨젤과 그레텔』 같은 ‘잔혹동화’의 바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이들의 문법을 절묘하게 전복시킨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어 화제가 되었다. 구병모 작가는 한 인터넷 웹진에서 '곤충도감' 이라는 작품을 연재했다. 이름을 가리고 봐도 구병모 작가의 작품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작가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작품으로, 용서에 대한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2015년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로 오늘의작가상과 황순원신진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단 하나의 문장』 장편소설 『네 이웃의 식탁』, 『파과』,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