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엄주
2025 여성의 날 특집 – 딕테를 읽는 여자들
딕테 모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행 중입니다. 딕테를 읽으며 텍스트 너머로 연결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나아가 함께 읽는 여성들이 함께여서 도착할 수 있는 낯설고 먼 곳의 풍경도 담았습니다.
1.
학경이 가고서 집에 책이 왔어.
어머니께는 차마 보여드릴 수 없었어.
책을 펼치자마자, 저 깊은 동굴 속에서 학경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거든.
나는 기억한다. 언젠가 종로의 한 찻집에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지금인 것처럼 기억한다. 그의 목소리는 나를 그의 과거로 데려갔다. 그에게는 단 한 번도 과거가 아니었고, 과거일 리 없었던 활활 불타오르는 그 시간으로.
1982년 11월 초가을의 어느 날로.
그에겐 오래 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날 이후 그의 시간은 두 겹으로 흘렀고, 그는 언제나 그 기억을 지금으로 살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의 미국 집이 보인다. 작가인 여동생으로부터 온 우편물을 발견한 그가 보인다. 그는 서둘러 소포의 포장을 뜯는다.
책은 늦게 도착했다. 동생의 죽음 뒤에야.
그는 책을 펼쳤다. 첫 장에는 어둠 속 손톱으로 새긴 듯한 글씨 사진.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징용을 간 어느 조선인이 남긴 목소리였다. 탄광의 깊은 어둠 아래 그 목소리는 여동생의 것처럼 들려왔다. 학경은 그 이름 없는 목소리에, 누구에게도 답장 받지 못했을 목소리에 대신 응답하고자 한 것이다.
견딜 수 없어 그는 책을 덮었다.
2.
나는 이 기억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되었다. 너무 오래 기억한 나머지, 이 기억이 그만 나의 기억이 되어버렸으므로. 그리하여 어느 날엔가, 나는 나의 기억이 되어버린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전달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신을 잘 모르면서.
그러나 늦기 전에.
더 늦어져,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오랜 세월 절판된 차학경의 책이 고국에서 복간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찾아 모여 들고, 이야기 나누는 그 모습을 보려고 머나먼 미국에서 한국까지 건너온 2024년의 그가, 사람들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이 기억을 당신에게 전달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억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나는 당신에게 틀린 것을 말할까 두렵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틀릴 것을 말할까봐 걱정하는 여자아이였고, 말하기보다는 기억하기만 하는 여자아이였고, 그렇듯 말하지 못한 기억들로 온 몸이 터져버릴 듯한 고통 속에서, 어느 날 당신이 그러하듯 이 책을 만났던 것이었으므로.
그러므로, 당신만은 이 말의 고통을 알리라.
『딕테』의 재출간 기념 낭독회. 이곳에 차학경의 큰 오빠 차학성이 있었다. (2024.12.12)
2024년 12월 12일, 『딕테』의 복간 기념 낭독회에서 나는 ‘멜포메네 비극’을 각색해 낭독했다. ‘멜포메네 비극’은 차학경의 여자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오빠에 관한 편지이고, 그 편지가 40년의 세월을 넘어 오빠인 그에게 지금 가닿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편지에서 여자는 1979년 서울의 거리에 있다. 대통령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나던 거리. 그 거리에서 여자는 1960년의 서울을 본다. 4.19의 거리. 그녀의 오빠, 오빠와 같이 어린 청년들이 독재에 항거하려고 쏟아져 나왔던 그 거리.
어찌하여 여자는 과거를 지금처럼 보는가.
왜냐하면, 어떤 이에게 과거는 그저 과거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활활 불타오르는 기억을 살고 있는 자에게 그것은 언제나 지금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고, 많은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2024년 12월 서울의 당신이 차학경의 그 기억을 지금처럼 보기를 바랐다. 지금의 거리에서 당신이 79년과 60년을 겹쳐 보기를 바랐다.
그래서 낭독을 할 때, 나 혼자의 목소리만이 아닌 여러 메아리들이 객석 곳곳에서 울려 퍼지도록 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목소리의 책이고, 무엇보다 언어를 빼앗겼던 조선에 응답하려는 목소리의 책이므로. 독재에 항거했던 1960년대와 70년대 거리의 행진들에 응답하려는 목소리의 책이므로. 차학경이 책의 골목골목마다 숨겨 놓은, 이름 없는 기억과 이름 없는 목소리를 당신이 들어주길 바랐다.
그리하여 사방에서 목소리들이 오빠, 오빠, 하고 부를 때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무수한 말의 울림 속에서, 객석의 당신은 가끔 놀라는 듯했다. 길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는 듯했다. 골목의 모퉁이를 돌다가 솟아나오는 시위대의 노래와 부딪힐 때처럼. 그 노래와 스쳐 지나갈 때처럼. 차츰 멀어지다가 그것을 완전히 잊을 때처럼.
그러나 당신이 그 노래의 일부가 된 것처럼.
차학경이 쓴 그 편지는 그저 당신과 단절된 과거의 일이 아니며, 그리하여 당신이 그날 그 거리의 메아리임을 알아주기를 나는 바랐다.
그러니 당신은 알았을지 모른다.
당신이 바로 그 메아리임을.
그래. 언젠가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메아리였고, 사랑을 모르는 채로 사랑을 했으며, 과거를 모르는 채로 지금을 살았고, 오직 잊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결코 답장 받지 못할 외로운 편지처럼 양손을 호주머니에 꼽고 혼자 거리를 걸었다.
메아리여. 나는 답장 받지 못할 것을 앎에도 밤에 쓰는 편지처럼 배회하는 당신을 보았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으므로.
3.
나는 2024년 12월의 그가, 그 날 우리가 보낸 편지를 잘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방에서 오빠, 오빠 하고 부를 때, 그의 가슴 속에서 여전히 서른을 살고 있는 여동생과 또래일 당신들 얼굴을 보았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것을 안다.
기억을 새기고, 새기고, 또 새긴 끝에 그 기억을 지금으로 살게 된 사람이 있음을.
반세기가 다 되도록 간직한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전달하려는 마음의 덧없음을.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차학경은 죽음의 마지막에 붉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고 한다.
어두컴컴한 맨해튼의 빌딩 지하에서, 바닥에 떨어진 붉은 가죽 장갑을 발견한 것은 큰오빠인 그였다. 그는 그 장갑이 섬세하게 레퀴엠을 연주하는 손 같았다고 책[1]에 썼다. 그 손이, 미술가이기도 했던 여동생의 마지막 퍼포먼스였으리라고.
그의 이 말에, 나의 마음인지 너의 마음인지 모르는 무언가 무너졌다.
그렇게 그는 그 손을 내게 건넸다.
나를 모르면서.
그러자 그 손은 나도 모르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손에 응답하기 위해 썼고, 편지는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착하지 못하는 편지는 사라지는가?
전달한다(deliver)는 것은 구원한다는 것. 푸른 불씨 같은 당신의 이야기를 혼자서만 움켜쥐고 있을 수는 없는 것. 누군가에게 건네고 또 건네야만 그걸 살릴 수 있다는 것. 이야기는 전달되면서 구원받는다. 그것이 이야기의 운명이리라.
그러니 메아리여, 나는 그 손을 이제 당신에게로 건넨다.
[1] 『안녕, 테레사』, 차학성, 문형렬 역, 문학세계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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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령
장혜령은 시인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 퍼포머이다. 2017년 『문학동네』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 소설 『진주』, 시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를 펴냈다. 최근 몇 년 간 문예지 <악스트>에 차학경, 한강, 아니 에르노, 김혜순 등의 여성 작가의 쓰기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를 연재했고, 이를 토대로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2025년 봄 출간 예정)』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