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정여울 노경실, 그가 그립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5주년이 되었다. 이를 맞아 각계각층의 22인이 모여 그를 그리워하는 『그가 그립다』 을 발간했다. 책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적인 물음과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글ㆍ사진 유가영(예스24 대학생 리포터)
20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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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그가 그립다』 북 콘서트가 열렸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아 진행된 이 날 행사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몰려 그에 대해 다시 추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에 앞서 미리 준비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동영상이 먼저 시민들을 반겼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이 담긴 그 동영상을 보고 더러 눈물을 훔치는 시민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일어난 세월호 참사와 공권력의 무능함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국민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어, 연사 대표로 나선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제안으로 세월호 참사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 그리고 곧 있을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5주기를 맞아 묵념이 진행됐다.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섞인 시간이었다.

 

작가만남-그가그립다

 

 

다시 만나지 못할, 그러나 여전히 그리운 사람


유시민: 세월호 사고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준 것 같습니다. ‘책임이 있다면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으며, 우리 각자는 내 몫의 책임을 얼마나 감당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던져준 것 같고요. 대통령부터 평범한 시민들까지 모두가 따질 것은 따지되, 자기 몫의 책임을 먼저 생각해야 마땅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가그립다

 

이날 북 콘서트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문학평론가 정여울, 아동문학 작가 노경실, 카피라이터 정철 네 명의 연사와 수많은 시민들의 참여가 함께 어우러져 진행되었다. 『그가 그립다』 에는 정치인뿐 아니라 작가, 카피라이터, 배우, 이발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필자로 참여했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책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유시민: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안에는 다양한 동아리들이 있습니다. 특히 문학동아리에서 주동이 되어서 ‘서거 5주기 추모집을 만들어보자.’ 이야기가 나와서 노무현재단과 상의해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꽤 다양한 분들께서 필자로 참여해주셨고, 최대한 다양하고 들쭉날쭉한 글들을 실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제 개인적 입장에서 볼 때는 김갑수 선생님의 말이 재미있었습니다. “되는대로 살자. 노무현도 없는데. 종편에 나온다고 욕하지 말자.” (웃음) 그럼 책이 나오게 된 경위는 제가 설명했고, 노경실 선생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쓰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노경실: 저는 노 대통령님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인연을 따지자면 노 씨란 거죠. 보통 이런 책을 내면 청소년 작가들은 참여를 잘 안 하게 되는데 불러주셔서 감사하게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정신이 어른들에게 갑자기 일깨워진 종소리가 아니라,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작가들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이날 북 콘서트는 웃기는 노무현, 감동적인 노무현, 화나는 노무현 세 주제와 시민들이 직접 작성한 질문지로 진행되었다. 네 명의 연사들과 시민들은 자신이 각각 생각하고 기억하는 노무현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가만남-그가그립다

 

노경실: 저는 대통령님 코 후비는 모습 이런 것들도 참 웃겼어요. 그리고 본인이 어린 시절을 묘사하면서 “지금은 울퉁불퉁하고 못생겼지만 어렸을 땐 동그랗고 하앴다”라고 하셨을 때 얼마나 사랑스럽고 웃기던지요. 사실 시골 뙤약볕에서 뛰놀던 아이가 하야면 얼마나 하얗겠어요. 대통령님께서 지니신 그 유년시절의 순수한 착각이 사랑스러웠고 사람은 다 똑같구나 생각했죠.

 

유시민: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얘기가 있어요. 취임식 전날이었어요. 제가 밤을 꼬박 새우고 오전에 사우나에 갔거든요. 오전 열 시니까 사우나에 사람이 얼마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몸이 정말 좋은 남자 둘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탕엔 안 들어오고 샤워기 밑에서 얼쩡얼쩡하는 거에요 씻지도 않고.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어디서 많이 뵌 분이 들어오더라고요. 그게 노 대통령님이셨어요. 제가 나중에 경호원 실에 물어봤더니 그때 경호원들이 참 난감해했다고 하더라고요. 내일이 취임식인데 사우나를 들어가시니까 경호를 안 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사우나에서 다 벗고 경호한다는 게 전례가 없는 거에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참 웃겨요.

 

시민: 개인적으로 동영상을 보고 웃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대통령님께서 “저희 손녀딸 엄청 예쁩니다.” 하시길래 저는 정말 ‘엄청 예쁜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대통령님께서 “제 얼굴 보면 아시겠죠?” 하시더군요. 정말 빵 터졌습니다. 

 

유시민: 그러면 이제 감동적인 얘길 해볼까요?

 

정여울: 제가 아는 분께서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재임 중이실 때 칼럼을 쓰신 적이 있어요. 그때 분위기가 모든 오피니언 리더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님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쏟아내던 사나운 시기였어요. 그때 그분이 쓰신 글이 노 대통령님을 어느 정도 옹호하던 내용이었던 거에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그분께 쌀하고 술을 보내셨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이 사람한테 그런 따뜻한 선물을 줄 수 있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아팠죠.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한테 쌀이랑 술을 보내셨겠어요.

 

정철: 노무현 대통령님이 당선되셨을 때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는데. 그래서 제가 왜 이런 감정이 들까 생각해봤어요. 생각해보니까 노무현 대통령님이 제게 이렇게 묻는 것 같더라고요. ‘너 지금 그대로 살아도 되니?’ 사실 저 같은 광고쟁이들은 직업 특성상 남을 밟고 나가야 하거든요. 경쟁 PT를 하고 남을 제치고 선택 받아야 해요. 그런데 그런 삶에 대해 제가 회의를 가지게 됐고,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것도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살다 보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올 때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작가만남-그가그립다

 

유시민: 그러면 이제, 노무현 대통령님을 생각하면 화가 나는 것들을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정철: 예전엔 노무현 카피라이터라는 말을 듣고, 이어서 얼마 전엔 문재인 카피라이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돌아가신 날엔 저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 ‘나는 개새끼입니다’라는 글을 썼어요. 이런 글들을 쓴 이후에는 광고도 들어오지 않고 약속되어있던 강연이 하루 전에 취소 되는 일이 많았어요. 그런 점들이 화가 나요.

 

정여울: 노무현 대통령은 제가 처음으로 응석 부리고 싶었던 분이었어요. 그 외의 대통령은 다가가기 힘들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님은 제 말을 잘 들어 주실 것 같은 친근감이 들어 마음속으로 늘 편안했고 믿음이 갔죠. 우리에게는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 받는 그분을 미워하는 당시의 정치계에 너무 화가 나요. 하지만 저는 더 이상 화만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치가 아니더라도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함으로써 이러한 분노를 창조적인 힘으로 표출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시민: 참여정부 시절에는 늘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너무 부당한 공격만을 받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님은 약점은 많았지만 좋은 분이었어요. 대학도 안 나왔지만 아는 것도 많고 품격 있는 분이었어요.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마음을 소통할 줄 알고 자기 잘못이 있을 대 그걸 깨닫고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한 분이에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분한 것은 이런 분이 죽었다는 거죠. 사적인 분노인 동시에 공적인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월호 사건의 원인은 부정부패라고 생각해요. 원과 상식에 어긋나는 반칙과 편법. 그게 부패잖아요. 왜 우리 국민들은 마음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저렇게 물질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자극하고 타인의 고통에 마음으로 감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좋아할까 화가 나요.

 

이날은 행사 직전 시민들이 직접 작성한 질문지에 대해 네 명의 연사들이 대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다양한 질문들 속에 시민들이 공통적으로 얻길 원했던 답은,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Q. 20년 뒤에는 노 대통령님이 교과서에서 어떤 평가를 받으실까요?


정철: 보통 노 대통령님을 좋아하는 분들을 보면 40~50대가 많아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20대 분들이 발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러니까 젊은 친구들이 노무현 대통령님을 다시 보게 되고, 공부하게 되고, 거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저는 이 자리에서 봤다고 생각하고요. 그렇게 되면 아마 20년 후에는 역사교과서의 표지가 노란색이 되지 않을까요? (웃음)

 

Q. 악한 자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더 큰 악이 되어야 하나요 아니면 소신을 지키고 살아가야 하나요?


정여울: 사실 저도 항상 고민하는 문제거든요. 저는 어릴 때는 악에 저항하는 영웅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어요. 말 그대로 특별한 힘이 있는 영웅들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모두가 가진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바로 약한 사람들이 저항할 때 강한 사람들이 긴장한다는 사실이에요.

 

유시민: 제가 어느 책에서 봤는데요, 한 학생이 질문했어요 “선생님 착한 사람이랑 나쁜 사람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말해준 답이 “힘센 사람이 이기지.” 였어요. 우리는 착한 가운데 힘이 세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이 있다는 거에요. 전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바로 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응 능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마음이 아플 줄 아는 사람은 진보가 되는 거고, 그걸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가 되는 거죠. 오히려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만남-그가그립다

 

어느덧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되어간다. 작가 노경실의 말처럼, 어느새 우리들은 그 기억을 잊고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고 날마다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지난 5년이 그리움이 더 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최근 일련의 사건사고와 겉으로 드러나는 부정부패들로 국민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긴 지 오래고 다른 국가들이 부러워하는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 그러나 이런 나라에서 여전히 채울 수 없는 목마름과 마음의 허기짐을 느끼는 국민들.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그리운 것은 경제발전이나 복지 증진과 같은 현상적 발전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정이나 사랑.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아닐까.

 



그가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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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립다 유시민,조국,정여울 등저 | 생각의길
유시민, 조국, 정철, 신경림, 정여울, 노경실 등 『그가 그립다』에 담긴 스물 두 명의 메시지는 한 젊은이의 영혼 앞에 민낯으로 부르는 소박한 합창. 안될 것을 알지만 그른 것에 대항하는 용기, 인간에 대한 예의와 가치를 수호하는 정의로움, 사람을 위해 불의를 참지 않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키려 했던 사람, 노무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삶과 정신 속에서 찾아낸 희망의 불씨는『그가 그립다』 속에 스물두 가지의 빛깔로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우리 곁에 없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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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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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티샨티

2014.09.03

인간적이었던 바보 대통형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보고 싶은 날입니다. 재난 공화국에서 불투명한 미래를 살아야한다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지도자들이 판치는 나라에 적응하기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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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

2014.05.26

많이 그립네요. 너무도 바보 같았기에 우둔하게 앞만 보고 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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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j8920

2014.05.26

기사 잘보고 갑니다^^
저도 이날 콘서트에 갔었는데 웃고 울고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다양한 분위기를 느낀만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충만한 기대와 의지를 채웠습니다
이 글을 보며 다시 한번 그때의 기분을 떠올려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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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영(예스24 대학생 리포터)

if you want to be happy,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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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할 정도로 성격은 당차고 맹랑했다. 가난으로 인해 어렵게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였다. 졸업 이후 농협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군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사법고시에 매진하였다. '빨치산 부역 혐의로 옥사한 장인'과 '불투명한 고시생' 문제로 얽혀 양가가 티격태격한 결혼은 "판사안하면 어떠냐"라는 노무현의 엄포로 풀렸다. 1973년 결혼하였으며, 네 번째 도전만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1백억원대 소송도 연달아 수임하는 등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1981년 부림사건(대학생 독서서클 검거)의 변호를 맡으면서, 교도소에서 57일간 고문을 당한 한 학생의 시퍼런 몸과 겁에 질린 눈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도 참여하며 투사로 탈바꿈했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항쟁 후 재야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고,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은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그해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와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5월 광주 자위권 발동' 연설 때 명패를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이른바 '5공 청문회 스타'가 된 것이다. 1990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합당하여 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자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고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이후 부산에서 3차례 총선과 시장선거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2000년 4월,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하지만 이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지지모임 '노사모'도 결성되었다. 국회의원 낙선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김근태,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한 국민경선제 끝에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하지만 지방선거와 재보선을 거치며 노무현의 지지율은 바닥까지 곤두박질 친다. 이에 '후보교체론'까지 나오는 등 입지가 위태로워지지만, 정몽준 후보와의 극적인 단일화로 부활했다. 그리고 결국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당선 이후,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집권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이라크 파병' 결정은 그를 지지했던 진보·개혁세력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이라크 파병 결정이 가장 힘든 결정 중 하나였음을 밝힌바 있으며, 자신의 소신 보다는 '국익'을 생각해야 하는 대통령이라는 위치에서 내린 결정임에 대해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지지율 하락 속에서 총선을 앞둔 2004년 3월, 헌정사상 국회에서 탄핵당하는 첫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총선은 열린우리당의 과반 획득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사실상 국민들에 의해 '재신임'을 받음으로써 이후 참여정부의 개혁정책들을 점화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정치 실험'과 '개혁 정책'들은 '남-남 갈등', '진보-보수' 갈등 등으로 불리는 사회적인 논란 속에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져, '구시대의 막내'를 자임함으로써 다음 대통령에게 새 시대를 물려주고자 한 그의 신념과 정책은 아쉽게도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임기 말에는 '참여정부 실패론'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진보 세력들로부터는 신자유주의로 서민들의 삶을 더욱 고통에 빠뜨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기간 동안 많은 노력이 있었고, 또한 성과도 있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개혁을 해 나가고자 하였다. '평검사와의 대화' 등을 통해 검찰조직 등 권력기관, 사정기관들을 개혁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최고 권력자'인 스스로가 권력기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줄여나갔다. 이는 국가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행정수도 이전'으로 상징되듯이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를 줄이고, 균형적인 국토 발전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이전과는 다른 큰 변화들이 그의 재임기간 동안 일어났다. 또한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 속에서 복지 지출을 크게 늘려 서민의 삶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으며, 2007년 10월에는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10·4 남북정상회담을 업적으로 남겨, 동북아 긴장 완화-평화 정착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퇴임 후에는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가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 꿈은 정치인생 후원자였던 소위 '박연차게이트'와 함께 허물어졌다.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비판과 의심의 여론이 일었던 검찰의 수사를 통해 오랜 지인들과 가족들이 비리의 혐의를 받았으며, 그 자신도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09년 5월 23일 새벽,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뒤 봉화산을 경호원 1명과 함께 등산하던 중 아래로 투신해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갑작스런 서거 후 시민들의 추모물결은 거대하게 일었다.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객들은 몇날 며칠 끊어지지 않았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추모가 이루어졌다. 또한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 작업이 제기되면서 '노무현'과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새롭게 부각되었고, 노무현의 신념과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시도한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수면 위로 올라 왔으며, 참여정부가 '민주화'라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에 있어서 어떤 역사적 지위를 가지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논의도 시작되어, 그는 사후에 더욱 의미있는 조명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