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그리워할 편의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모 항공사에서는 직원들에게 비행기 표를 90% 할인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혜택을 준다고 했다. (거짓말 좀 보태) 고량주에 꿔바로우가 당기는 퇴근길엔 중국으로, 주말엔 태닝하러 동남아로 뜰 수 있는 거다. 후줄근한 현실을 팽팽하게 충전해주는 복지 혜택이다. 예전에도 앞으로도 내게는 없을 기회지만, 상상은 가능하다. 언젠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가끔은 홋카이도로 밤마실을 다녀올 것 같다. 간절히 그리워할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스물네 시간 ‘이랏샤이마세!’ 를 반복하는 그곳, 편의점으로 가겠다.
주황색 간판이 친절하게 불을 밝히는 서른 평 남짓한 S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간다. 로봇 같은 알바생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선 맘껏 어슬렁거린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신간 잡지를 훑으며 머리를 채워 본다. 그러고선 작은 바구니에 음료수며 아이스크림, 냉동식품이나 과자 따위를 내키는 대로 주워담는다. 계산 전엔 포인트 카드와 쿠폰도 잊지 않고 제시한다.
그리워하는 때는 어쩌다 한 번 있는 날이나 기념일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고 했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 것,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다 어느 순간 뚝 끊어버린 것들이 오히려 더욱 간절하다. 당시엔 별 것 아니게 보이던 것들이 아무렇게나 불쑥 생각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아득함의 진수다. 편의점은 그런 곳이다. 일본 생활을 하며 매일 아무렇지 않게 드나든다. 아침마다 커피와 점심 도시락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맥주와 안줏거리를 참 많이도 샀다. 그 공간에 흘러왔다 흘러가는 보통의 사람들, 보통의 시간, 보통의 물건들, 그 총체적인 편의를 나는 무척이나 그리워할 것 같다.
콘비니 안전 불감증
‘컨비니언스 스토어(convenience store)’의 원조는 미국이다. 한국엔 1989년에 처음 도입되었다. 일본에서 편의점은 ‘콘비니’라 줄여 부른다. 간단한 식료품을 살 수 있고, ATM이나 택배 서비스는 우리와 비슷하다. 다만 취급하는 물품이나 서비스는 더욱 다양하다. 음료나 주류, 식품이나 간식의 종류가 웬만한 큰 슈퍼 만하다. 고속버스나 콘서트, 스포츠 경기 표를 예매할 수 있고, 각종 쿠폰 발급과 이벤트 응모를 할 수 있는 기계도 있다. 공과금 납부와 우편물 접수는 물론, 팩스, 복사, 스캔, 사진 인화도 가능하다. 무료로 신간 잡지와 소년만화를 볼 수 있고, 눈치 보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 편의점 앞은 휴식을 취하는 운전자들과 영업사원, 담배를 태우는 행인들로 붐빈다. 목 좋은 곳엔 브랜드 별 점포가 네다섯 군데 있기도 하고, 주택가에도 골목마다 간판이 눈에 띈다. 그만큼 일상생활에서 콘비니 의존도가 매우 높다.
홋카이도에만 있는 편의점도 있다. 도(道)내에서 나는 상품을 주로 들여 놓고, 지역 특산물로 도시락과 간식을 만들어 판다. 상품의 7할이 ‘홋카이도 한정’이다. 여름이면 옥수수를 찌고, 겨울에는 가리비를 구워 도시락에 올린다. 가장 화려한 곳은 음료 판매대다. 계절 따라 한정 음료와 맥주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네들은 ‘한정(限定)’ 상품을 참 좋아한다. 계절이 바뀌거나, 특별한 지역 행사가 있는 경우 주로 내놓는다. 아무 때도 아닌데 ‘기간한정’이란 표시를 붙여 나오기도 한다. 맛은 글쎄, 복불복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번 손이 가는 걸 보니, 반복할 수밖에 없는 영업 비결이다. 맘에 두었던 상품이 어제로 판매를 끝냈다 해도 괜찮다. 오늘부터 또 다른 한정품이 새로 나오기 때문이다.
외로운 타지 생활에서 콘비니는 마음의 안식처와 같다. 거기엔 항상 누군가가 있다. 또한 가벼운 동전으로 허전함을 채우기에 그만이다. 나는 주로 캔 커피와 오니기리(삼각 김밥), 스파게티 도시락, 맥주에 의존한다. 가끔은 기름옷을 갓 입고 나온 닭튀김이나 달콤한 디저트에도 손을 뻗는다. 30여 평 직사각형 안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크기 별 속옷, 바비큐용 숯과 그릴, 스키 장갑,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와 금붕어와 거북이 사료까지 있다. 급할 때 집 앞 편의점에 가면 되는 거다. 그 기대에 낭패를 보기도 한다. 오밤중에 찾아간 편의점에서 원하는 걸 찾을 수 없을 때의 낭패란. ‘콘비니 안전 불감증’이라고나 할까.
당당하고도 사소한 고독
편의점 안 대부분의 사람은 혼자다. 집에 돌아가면 방도 하나, 사람도 하나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시달렸고 친구들은 모두 바쁘다. 여기에 들어선 당신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혼자임을 당당하게 제시하며, 1인분의 음식과 물건을 살 수 있다. 편리하고 고독하다. 이 고독함은 건들거리는 허세도 아니고, 눈물 떨구는 우울과도 가깝지 않다. 말하자면, 요즘 아이들의 인터넷 용어를 닮은 고독이다. 간결하면서도 여백이 많다. 있는 그대로의 담백한 그것이다. 시인 이상이 쓴 수필에서 묘사를 빌려 그 느낌을 이어 본다.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불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 이상, 『권태』 중에서)
어느 목 좋은 사거리의 일층 건물. 대부분은 홀로 서성이고, 바라보며, 생각하고, 결정한다. 하루의 노곤함을 어깨에 얹고 우두커니 창가에 선다. 여행 잡지를 뒤적이기도, 만화에 몰두하기도 한다. 느껴지는 건 고독뿐이요, 다만 모두가 비슷하기에 위로 받을 수 있다. 편의점에는 일상의 고독이 미련 없이 질주하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는 위로가 멈추어 선다. 상반된 두 가지가 상쇄돼 만나는 교차로다. 모든 것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진열품과 서비스는 일련의 순서대로 정돈되어 있다. 무척이나 정갈하고 깔끔하다. 동시에 무료하고 따분하다.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조용히 얻어 가고, 직원들은 정해진 동선과 서비스 인사를 기계적으로 행하느라 분주하다. 콘비니에 다녀오면 메마른 소설 한 장면에 들어갔다 온 기분이 물씬 든다. 두말할 것 없이 읽는 이를 더 고독한 존재로 타락시키고야 마는, 전형적인 일본풍 소설 말이다. 읽고 나면 가슴 한구석이 텅 비고, 관자놀이가 살짝 띵한.
하루에도 몇 번씩 편의점 문을 나설 때면, ‘저 젊고 기계적으로 성실한 알바생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라는 물음이 스치기도 한다. 다만 그에 대한 답은 짤랑이는 거스름돈 보다 중요하지 않다.
‘어서 오세요! 여기는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입니다. 적당한 고독을 파는 곳이죠. 허기진 낮의 위장을 그득한 기름으로 채우고 싶거나, 까칠한 밤에 무덤덤해지고 싶을 때 찾아오세요.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래도 나는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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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앙ㅋ
2014.09.26
해신
2014.08.31
그래도 편의점의 진정한 맛(?)은 일본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뚱이
201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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