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같은 다정함이 우리를 부른다”
하나의 단어는 이미 문장을 탑재한다. 단어가 지닌 뜻 때문에 몇 가지 문장으로써만 단어는 제 뜻을 제대로 빚을 수가 있다
글ㆍ사진 김소연(시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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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 월요일, 시인 김소연이 읽은 책 이야기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하나의 단어는 이미 문장을 탑재한다. 단어가 지닌 뜻 때문에 몇 가지 문장으로써만 단어는 제 뜻을 제대로 빚을 수가 있다. 하나의 단어에 탑재된 문장의 가짓수야 많고 많겠지만, 우리가 아는 범주 안에 대부분 있다. 그래서 단어가 문장 속에서 항상 점잖고 얌전하게 자리잡아 있곤 한다. 그 점잖고 얌전한 단어들이 자꾸만 탑재된 문장을 배반하고 제멋대로 제자리가 아닌 것만 같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 이 일을 전담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가장 제멋대로 제자리가 아닌 것만 같은 자리를 찾아주는 이를 꼽으라면 나는 이제니 시인을 꼽겠다.

 

이제니는 어쩌면 외국인일지도 모른다. 우리말을 처음 배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처음 그 단어를 알게 된 사람처럼 쓰기 때문에 그렇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단어와 그 단어가 놓인 문장이 우리가 생각하던 그것들 바깥에 놓일 수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것은, 의아함을 선사해주지만 이제니가 쓰는 단어와 문장의 이질은 동질의 범주 안에 있는 경우보다 더 뛰어난 접착력이 있다. 그 접착력 때문에 단어의 질감과 문장의 질감을 가장 깊숙하게 이해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모국어를 가장 능란하게 이해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니는 모국어를 한국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외국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모국어를 가장 많이 주워모은 다람쥐거나 개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말똥구리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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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가 단어를 말똥구리처럼 굴려서 어딘가로 향해 걸어간 한 편 시를 가만히 음미해보면, 단어의 뜻과 소리값과 모양새 모두를 감각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는다. 이질의 감각으로도 착! 하고 붙는 접착력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발휘되는 건 바로 이제니가 우리말을 상형문자로도, 소리문자로도, 뜻문자로도 감각했기 때문이리라. 분명히 그 때문일 것이다.

 

  감이 먼 목소리로 너는 말한다. 이것이 내 사과다. 사과는 어둡구나. 사과는 부드럽구나. 부드러움과 미래는 가깝구나. 사과를 받은 내 마음은 고요하다. 사물들은 끝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사과 이전에도 사과 이후에도. 한없이. 가없이. 동시에. 일시에. 간헐적으로. 산발적으로. 한 마음에서 한 마음으로 건너갈 때. 한 마을에서 한 마을로 건너가듯이. 영영 뒤돌아섰지만 다시 뒤돌아서게 될 겁니다. 어쩌면 다시 제대로 만나게 될 겁니다. 사과는 감이 멀었지만 우리는 감으로 다 알아들었다. 가장 순한 순간에도 가장 악한 악한이 될 수 있다. 아무도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다 오직 너 자신 외에는. 맺힌 것이 있었던 것처럼 너는 울었다. 매끄러운 곡선 위를 흐르는 하나의 물방울처럼. 울면 풀리는구나. 풀리면 가까워지는구나. 탁자 위에는 작고 둥근 것이 놓여 있었다. 흐릿하고 환하고 맑고 희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이제 막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사과 이후에 문득 가까워진 감이 있었다.
- 「사과와 감」 전문

 

“사과”라는 말과 “감”이라는 말의 공통점은 과일의 종류라는 것과 동음이의어가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이 시를 재미있게 받아들이면 좀 곤란하다. 이 시를 멀어짐과 가까워짐에 대하여 해석해서도 곤란하다. 열매인 사과와 감이 다른 명사인 사과와 감과 어떻게 하여 같은 소리값을 가질 수 있었을까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라고 언급한다면 조금 나은 해석이 될 수는 있겠다. 사과와 감은 이 시의 시작에서 기체로써 존재한다. 아직 하나의 명사가 탄생되기 이전이다. 그래서 과일의 종류이자 동시에 또다른 뜻을 지닌 또다른 명사가 될 수 있다. 이 기체가 서서히 영글어 액체로 뭉쳐진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기체로 돌아간다. 고체처럼 보이는 기체로. 고체처럼 보일듯 말듯하는 순간에서 우리는 이 동음이의어를 과일의 한 종류처럼 잠시 감각하며 지나간다. 그리고 곧바로 과일의 한 종류가 아닌 또다른 뜻과의 겹침을 감각한다. 감각하자마자 그것은 하나의 명사와 가까워지려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그 어떤 명사도 아닌 채로 다시 기체가 된다. 명사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단한번도 고체와도 같은 고형화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 이제니의 시가 알쏭달쏭하고 뜻을 배제함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감각되는 이유이다.    

 

“복숭아 같은 다정함이 우리를 부른다.”
- 「기적의 모니카」 부분

 

복숭아. 잘 익은 복숭아. 고체처럼 생겼지만 그득한 과즙으로 먼저 감각되어 액체인 것만 같은 복숭아. 액체인 것만 같지만 실은 그 신묘한 냄새로 군침을 먼저 돌게 하는 기체 같은 복숭아. 「기적의 모니카」는 “나선의 감각들” 연작들처럼, 이제니가 시로 쓴 이제니의 자화상 같다. 이제니는 시를 감각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복숭아스럽게 이 시에다 담았다. “나선의 감각들” 연작들에 도움을 받아 대략적으로 요약해본다면 이런 것이다. 시를 감각하는 일은 언어를 감각하는 일이며, 언어를 감각하는 일은 언어가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다 더듬이를 담그는 일이며, 그 더듬이는 결국 언어로 이 세계의 거대한 플롯을 감각하기 위한 열쇠이며,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어 이 세계의 비밀한 플롯을 여는 일이다. 이제니의 시는 이 세계의 플롯을 열어보였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에게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은 이 세계에서 어떤 질감으로 살고 있는지를 다 보여준 셈이 되었다.

 

다 보여주었지만 우리는 사실 그 엿본 세계에 대하여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본 그것이 이제니가 보여주려던 그것이었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똥구리처럼 전진한다 하였지만 실은 이제니는 말똥구리처럼 전진하면서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언어가 생성되기 이전의 세계로. 의미가 파생되기 이전의 세계로. 후진이 아닌 전진의 방법으로도 이 되돌아감은 가능한 것일까. 이제니의 시를 읽다보니 가능하다는 것을 알겠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시가 끝난다면 무엇이 함께 끝나게 될까. 끝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니는 자신의 더듬이로 그 끝을 엿보았을 것이다. “나선의 감각들” 연작을 몇 번씩 소리내어 감각해보고서 (읽어보는 게 아니라) 그 끝을 엿보았고 회귀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표사의 마지막 문장에 “무한을 보고 싶다”고 이제니는 적었지만, 이제니가 무한을 본 적이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 시집은 그 증거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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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이제니 저 | 문학과지성사
그는 사물의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해, 쓰고, 다시 쓰고, 덧붙이고 지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의미라는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에 리듬을 흘러넘치게 한다. 지금까지 이제니의 리듬을 수식했던 '발랄'은 이번 시집에서 '의연(毅然)'이라는 좀더 절실한 표현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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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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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5.02.13

하나의 단어는 이미 문장을 탑재한다. 단어가 지닌 뜻 때문에 몇 가지 문장으로써만 단어는 제 뜻을 제대로 빚을 수가 있다. 하나의 단어에 탑재된 문장의 가짓수야 많고 많겠지만, 우리가 아는 범주 안에 대부분 있다. 그래서 단어가 문장 속에서 항상 점잖고 얌전하게 자리잡아 있곤 한다. 그 점잖고 얌전한 단어들이 자꾸만 탑재된 문장을 배반하고 제멋대로 제자리가 아닌 것만 같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 이 일을 전담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라는 문장 참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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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