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1882년 태어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무렵에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에 정착했다가(1914~1920) 다시 파리로 귀환합니다(1920~1939). 그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땅은 미국이었지요. 1939년 미국에 도착해 1971년에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중간에 딱 한번, 미국과 옛소련에 극하게 대립하던 1962년에, 그러니까 그의 나이 80세에 48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적이 있기는 합니다.
며칠 전에 본 어떤 원고 때문에 그의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국내의 한 출판사가 머잖아 책으로 출판할 원고인데, 담당 편집자가 한번 읽어보라고 교정지를 건네줬습니다. 1939년 9월에 미국에 도착한 스트라빈스키는 하버드 대학에서 모두 여섯 차례의 강연을 했는데, 제가 건네받은 교정지는 바로 그 강연을 수록한 것입니다. 제목은 ‘음악의 시학’이지요.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한 책인데 그동안 국내에서는 번역본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번에 좋은 번역으로 출간되기를 저도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스트라빈스키에 대해 ‘혁신가’ ‘반항아’ ‘이단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요.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 그가 보여줬던 음악들이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곡들이 세 곡의 발레음악입니다. 당대의 예술기획자였던 디아길레프(1872~1929)의 의뢰로 탄생한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이 던져준 신선함과 파격으로 인해 스트라빈스키는 ‘새로운 시대의 음악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당시 파리의 비평가들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전해오는 이국풍(러시아풍)의 낭만성, 원초적인 에너지에 주목해 ‘원시주의’라는 타이틀을 부여했지요. 물론 20세기 초반의 파리 사람들이 이국풍을 열렬히 좋아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미술, 춤 등의 여러 장르에서 그런 경향이 모두 나타나고 있었지요, 앞서 언급한 디아길레프는 그런 파리 사람들의 요구에 발빠르게 부응했던 인물이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나타났던 파리의 ‘러시아붐’에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영민한 예술기획자였던 그가 선택한 음악가가 바로 스트라빈스키였던 것이지요.
게다가 그의 음악이 초연되는 극장에서 벌어졌던 한바탕의 소동도 오늘날까지 ‘혁신가’의 이미지를 더욱 부채질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마치 하나의 전설처럼 회자되는 장면, 바로 <봄의 제전>이 초연됐던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일어났던 소동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날 관객들은 아주 흥분해서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에 따르면, 객석에서 일어난 소동이 점점 번져서 한바탕의 시위로 확산됐고, 무대 뒤쪽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스트라빈스키는 잔뜩 화가 난 안무가 니진스키(1890~1950)가 무대 위로 뛰쳐나갈까봐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러시아 발레단(발레 루스)의 단장이었던 디아길레프는 조명기사에게 극장의 조명을 계속 껐다가 켜도록 지시했다고 하지요. 그렇게 해서라도 소동을 진정시키려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그날의 소동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니라 니진스키의 혁신적 안무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작곡가였던 스트라빈스키조차도 그날의 소동이 자신의 음악 때문이었던 것처럼 ‘은근히’ 피력하면서 전설을 조장한 측면이 있지요.
물론 오늘날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스트라빈스키=혁신가’의 이미지는 결코 잘못된 판단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꼭 기억돼야 할 점이 있는데, 사실은 그가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 음악가였다는 점입니다. 그런 맥락과 관련해, 앞에서 잠시 언급한 1939년의 하버드대학 강의록 <음악의 시학>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초연하고 26년이 흐른 뒤에, 그 음악에 대해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편의상 군데군데 발췌해 소개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나를 무슨 혁명가로 간주한다면 단단히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해요. <봄의 제전> 발표 당시에 그런 얘기들이 참 많이도 나왔습니다.… 나는 졸지에 본의 아니게 혁명가가 되었더랬지요. … (물론) <봄의 제전> 같은 작품에서 오만한 자세를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 작품이 구사하는 언어가 새로운 탓에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요. … 예술은 그 본질상 구성적입니다. 예술은 혼돈의 정반대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센세이션을 일으키려고 분별없는 무질서와 노골적인 욕망에 대담함을 쏟아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름지기 ‘말’은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가 중요하지요. 60세를 바라보는 스트라빈스키, 새로움을 향한 도전뿐 아니라 이른바 ‘신고전주의’로 불리는 두번째 파리 시기(1920~1939)까지 이미 경험한 그는 이 강연에서 ‘질서’와 ‘구조’를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전통에 기반하지 않은 새로움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얼핏 보수적인 음악관으로의 회귀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단지 음악 형식으로서의 전통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형식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예술가의 진심’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과장해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욕심,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좀더 익숙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려는 태도 같은 것들을 “속물들의 허영심”으로 지칭하면서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중반의 서양음악사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쇤베르크(1874~1951)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습니다. 한때는 친밀했지만 미국에서는 불과 5km 거리에 살고 있었음에도 서로 내왕조차 안했을 정도로 불편한 사이였던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에 대해 이런저런 견해들이 있는 줄 압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과격한 반발이나 빈정대는 웃음을 사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정직한 정신과 진짜배기 음악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달에 홀린 피에로>의 작곡가(쇤베르크)가 자신의 작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아무도 기만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모든 예술가들은 앞 세대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지요. 같은 세대 안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 감정싸움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예술사에서 비일비재하지요. 그들도 인간이었고, 특히나 예민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고르(러시아식 발음으로는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대음악가였던 림스키 코르사코프(1844~1908)의 직계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스승에게 직접 수업을 받는 것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나 가능했지요.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원(음대)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인 표트르 스트라빈스키는 당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성악가였지만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스트라빈스키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법학과에 다녔습니다. 어찌 보자면 바로크 시대의 헨델과 비슷하지요. 한데 헨델이 그랬던 것처럼 스트라빈스키도 법학에 전혀 흥미가 없었습니다. 법대를 졸업하자마자(1905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문하에 정식으로 들어가 수업을 받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것이 음악 공부의 첫걸음은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제자인 표도르 아키멘코에게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또 대학 시절에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두 아들과 친구가 됐기 때문에, 훗날 스승이 되는 림스키 코르사코르의 60회 생일파티(1905)에서 축하 칸타타를 작곡해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당대의 유명 성악가였던 까닭에 스승의 집안과 이미 교분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나고 자랐을 뿐 아니라 스승인 림스키 코르사코르를 통해 ‘러시아적 전통’을 이어받지요. 그래서 그의 음악에서는 러시아의 민속 선율들이 때로는 그대로, 또 때로는 완전히 변형된 형태로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또 20대 후반에 디아길레프의 손에 이끌려 건너간 프랑스에서 그는 바로 앞 세대의 음악가였던 드뷔시의 영향력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파리에서 공연할 발레용 음악을 작곡하면서 드뷔시 풍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의 초기작들이 그렇게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까닭에 본국인 러시아에서는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지요.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은 1911년 작곡을 시작해 1913년 초연됐습니다. 앞서 작곡한 <불새>와 <페트루슈카>보다 더 원숙한 음악으로 평가받습니다. 두 편의 발레음악으로 이미 성공을 얻어낸 스트라빈스키의 자신감이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 음악은 샹젤리제 극장에서 발레공연으로 초연된 이듬해에 연주회용 버전으로 러시아와 파리에서 다시 연주됐습니다.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연주회에서는 쿠세비츠키가 지휘했고, 파리에서는 발레 초연의 지휘를 맡았었던 피에르 몽퇴가 지휘봉을 들었지요. 스트라빈스키는 특히 파리 연주회에 대해 흡족한 소감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샹젤리제 극장에서의 소동 이후 <봄의 제전>은 드디어 빛을 발했다. 연주회장은 만원이었다. 음악을 방해하는 무대 장치가 없는 연주회였기 때문에 청중은 집중해 음악을 듣고 열정적으로 박수를 쳤다. 작곡가로서 보기 드문 성공이었다.”
음악은 태양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러시아 이교도들의 태고(太古) 의식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모두 2부(Part1, Part2)로 나뉘어 있지요. 1부에는 ‘대지에 대한 경배’(L’Adoration de la terre)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서주로 시작해 ‘봄의 징조, 젊은 처녀들의 춤’ ‘유괴의 유희’ ‘봄의 론도’ ‘서로 다투는 부족들의 유희’ ‘현자의 행렬’ ‘대지에의 찬양’ ‘대지의 춤’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이런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원시의 들판에서 남녀들이 춤을 추다가 짝을 찾고, 부족 사이에 대결이 등장했다가, 부족의 장로들이 이를 진정시키고 대지를 경배하는 의식을 치르면서 춤을 춥니다.
‘희생’ 혹은 ‘제물’(Le Sacrifice)로 제목을 번역할 수 있는 2부는 서주로 시작해 ‘처녀들의 신비한 모임’ ‘선택된 처녀에 대한 찬미’ ‘조상의 혼을 불러옴’ ‘조상들의 의식’ ‘희생의 춤, 선택된 처녀’가 이어집니다. 그렇게 이교도들의 제물 의식이 차례로 치러지는 것이지요. <봄의 제전>은 스트라빈스키의 초기작들이 대개 그렇듯이, 관악기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음악입니다. 에너지의 응집과 분출이 대단히 강렬하게 펼쳐지지요. 1부의 막을 여는 신비로운 파곳 선율, 이어지는 호른과 플루트의 선율이 프랑스적 인상주의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합니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원시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변박자의 리듬, 아울러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더해져 20세기 음악의 한 페이지를 강렬하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피에르 불레즈/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1991년/DG
<봄의 제전>을 운위하면서 현대음악의 거장 불레즈의 음반을 빼놓을 수 없겠다. 악기 하나하나의 표정과 음색을 명징하게 살려내고 있는 연주다. 불레즈는 역시 치밀한 해석의 연주를 들려준다. 그래서 역으로 음악에 쉽사리 빨려들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음악의 회화적 측면을 부각한다거나, 리듬의 강렬함으로 듣는 이를 매료시키는 연주가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이토록 정교한 디테일로 음악의 구조를 쌓아나가는 연주를 놓칠 수는 없다. 불레즈는 1969년에도 같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봄의 제전>을 녹음했으나 이 지면에서는 1991년의 디지털 녹음을 권한다.
▶에사 페카 살로넨,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2005년/DG
핀란드 태생의 지휘자 살로넨이 LA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도전한 녹음이다. 그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는 확고부동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도전적이고 강렬한 사운드를 맛보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진지한 해석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적 리듬감을 이처럼 멋지게 구현하는 연주를 찾기는 쉽지 않다. 살로넨은 1989년에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같은 곡을 녹음해 소니(Sony)에서 내놓은 적이 있다. 이 음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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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