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아야 할 삶, 기억해야 할 역사 : <귀향>
당연히 보고 기억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귀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끄러운 과거일수록 똑똑하게 기억해야 한다.
글ㆍ사진 최재훈
201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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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냥 빚을 갚은 말 한마디가 담고 있는 진심은 ‘존중’이었을 것 같다.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가 가지는 절망감을 보면, 더욱 그렇다. 얼마 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안을 합의로 받아들인 우리 정부의 태도에 대해 우리 모두가 느꼈던 것은 수치심이었다. 국민들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자괴감에 빠졌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 평생을 잔인한 기억의 상흔 속에서 살아온 그 여인들의 삶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지켜주지 못하고, 위로해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삶은 존중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 한마디가 있어야 했다. 애초에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가 만든 잘못을 되짚고, 짓밟힌 사람으로서의 존엄 앞에서 모두 고개를 숙였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거가 저지른 잘못이지만 속죄하는 맘으로 사는 현재의 모습을 본다면 피해자들은 비로소 사죄받고 존중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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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게 시작했지만,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 독립영화의 흥행기록을 새롭게 쓰고 있는 영화 <귀향>은 존중받아야 할 인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사람과 각자의 육체는 존엄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 가치는 존중받아야 한다. 영화는 존엄함을 무시당한 우리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막연히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위안부의 지옥 같은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1943년 한 시골 마을에서 시작한다. 가난하지만 가족과 단란하게 살고 있는 14세 소녀 정민(강하나)은 영문도 모른 체 일본군에게 끌려간다. 함께 끌려간 또래 소녀들과 중국에서 끔찍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된다. 1991년 현재 시점에는 성폭행 피해자 은경(최리)이 있다. 1991년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냈던 상징적인 해이기도 하다. 은경은 만신 송희(황화순)의 신딸로 들어오고, 송희의 지인인 영옥(손숙)을 만난다. 영옥은 과거 위안소 생활을 했던 아픔을 안고 있다. 은경은 계속해서 영옥의 악몽을 함께 겪고, 미처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 씻김굿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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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완성도로만 보자면 <귀향>은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다. 1991년 현재 성폭행 피해 소녀인 은경을 영매로 과거와 현재 소녀들의 아픔을 연대하려는 영화적 장치도 도식적이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시선도 아쉽다. 하지만 그 속에 담아내려는 진심 때문에 <귀향>은 줄곧 반짝반짝 빛난다. 그리고 그 빛은 의미를 담아 극장 밖으로 퍼져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논의를 담고, 논의를 끌어내고, 논의를 지속시키는 것, 그것이 <귀향>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다. 2002년 시나리오 완성 후 개봉까지 14년이 걸렸다.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 할, 누군가는 반드시 이어가야 할 기억과 속죄,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한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다시 되짚고 속죄해야 할 ‘시작’이라는 우리들의 자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삼일절 42만 명의 관객과 만났고, 3월 첫주말 이후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정도면 사회적 현상이라 할만하다. 사실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시리즈와 2014년 개봉한 추상록 감독의 <소리굽쇠> 등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는 처음이 아니다. <소리굽쇠>는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소재화한 첫 번째 장편영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의미 있는 작품이었지만 단 3,000명만이 이 영화를 본 것으로 집계되었다. 솔직히는 개봉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아픈 손가락이지만, 그만큼 심장에서 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갑작스레 <귀향>에 관심이 쏠린 이유는 무엇일까? 손쉽게 위안부 문제를 합의한 정부에 대한 비난과 죄의식이 함께 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국정교과서에서 위안부 이야기가 삭제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니 교과서에서는 삭제되었지만, 절대 역사에서, 우리의 기억에서 삭제해서 안 되는 진실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고 싶은 국민의 염원일 수도 있다. 당연히 보고 기억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귀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끄러운 과거일수록 똑똑하게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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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 보는 거로 죄의식을 덜어내거나 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2016년 현재, 과거의 수치를 되짚어 여전히 똑같은 탄압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단죄해야 할 사람들을 단죄하지 않고, 사과받아야 할 일을 이제 됐다 하며 묵과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높여 25년이나 싸웠지만, 결국 받아내지 못했던 사과를 받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분들 모두 하늘나라로 떠나 더는 증언을 해줄 사람이 없는 순간에도 우리는 계속 잊지 않고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 <귀향>은 언제든 되짚어 살펴볼 수 있는 단단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행실이 나쁜 여자를 비하할 때 쓰는 ‘화냥X’이라는 욕의 시초는 청나라 군대가 침략해 온 병자호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에 패배한 후 아주 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고,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고향(鄕)으로 돌아온(還) 여자라는 의미로 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 뼈아픈 역사 속에서 위로받아야 할 피해자를 우리는 감싸주지 않고 되레 손가락질하며 살아온 것이다. <귀향>에서 은경이 씻김굿을 하는 사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비웃는 표정으로 서 있는 일본 군인의 혼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오싹한 현실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 싸늘한 시선과 관망하는 태도가 오늘날 위안부 피해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되짚어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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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