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공항에서 교토 가는 기차 안에서 이 글을 쓴다. 관서지방은 처음이지만 일본 여행은 긴장감도, 모험심도 필요 없고, 언어장벽도 수위가 낮고, 저건 어디서 온 개뼈다귀지?’ 하는 불편한 시선도 받지 않아서 좋다. 그래서 좀 심심한 것만 빼면.
지금 탄 열차 이름은 하루카인데 내게 하루카라는 일본인 애인이 있고, 심심해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 라고 상상을 시작했다. 만날 때 꽃을 사 갈지 소주를 사갈지 고민하며 행복한 표정이 되어갈 때 시커먼 승무원이 다가와 검표를 했다. 개뿔이었다.
황사를 피해 달아난 건데 이곳 날씨는 몹시 흐리다. 인천 하늘보다 훨씬 뿌옇게 느껴진다. 개뿔이다. 오늘은 신해철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나에게 이제 더 이상 신해철이 없는 세상도 마찬가지로 개뿔이니까.
교토까지는 아직 1시간 이상 더 달려야 한다. 창밖 풍경은 그다지 감흥이 없다. 하지만 기차를 타는 건 참 오랜만이라는 감흥만 있다. 칙칙폭폭 덜컹덜컹은 아니지만 아스라한 느낌이 밀려온다.
내 옆자리에는 분명 원고마감에 쫓기는 작가임에 틀림없는 대머리 남자가 불편한 자세로 노트북 자판을 다다다 두들기고 있다. 일본어 자판은 한글 두벌식보다 입력 속도가 느려 보인다. 눈빛에 여유가 없다. 머리숱도 거의 없는데 곧 남은 머리칼도 쥐어뜯을 것 같다.
'하아 불쌍해라, 참 안됐네.’
그때 문득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나도 마감인 것이다. 이 원고다. 깜빡하고 있었다.
어제 밤새 연재소설 원고를 써서 보내고, 잠깐 자다 기침을 하며 깼다. 공기가 너무 매캐해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못 살겠군, 작가가 좋은 점은 노트북만 들고 째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점 하나잖아. 그래서 제주도라도 피난 가려고 항공권을 알아보는데, 비슷한 가격에 오늘 오사카 가는 항공권을 발견했다. 또 카드 한도로 결제하고, 가방에 대충 쓸어 담고 집에서 튀어나와 정신차려보니, 오사카에서 교토 가는 기차안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기차 안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는 경쟁적으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한일전인가?
번갯불에 팬티를 말려 입듯 급히 나오다 보니 이럴 수가, 음악을 안 챙겨왔다. 분명 뭔가 깜빡한 게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음악이라니. 내 입장에선 차라리 팬티를 안 챙겨오고, 음악을 챙기는 편이 낫다. 팬티는 안 입어도 큰 지장이 없지만 음악은 안 들으면 바보처럼 보일 것 아닌가.
최근에 휴대폰을 바꿨다. 쓸 데 없이 새 폰엔 새 메모리 카드지 하고 외치는 바람에 즐겨듣는 음악이 폰에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메모리카드에 넥스트(N.E.X.T) 앨범이 들어 있다. 언제 넣어둔 건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신해철 음악을 듣지 못한지 좀 되었다. 올 가을 무렵엔 2년이 된다. 왜 안 들었느냐면 듣다 보면 우울해지기 때문이었다.
신해철의 음악이 우울하게 들리다니, 그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이란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가는 기차여행 같은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태어나 보니 열차 안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야 한다. 그런데 신해철이라는 위대한 객차가 어이없는 외부적인 이유로 탈선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와 함께 여행하던 시절은 분명 즐겁고 유쾌했다. 그는 유창했고, 직관적이고, 솔직했고, 세련됐고, 친근했고, 현명한 여행자였으니까.
지금 귓구멍에 흐르는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의 노랫말이 무척 슬프게 들린다. 그의 음악을 좋아해 온 세월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다시 시간을 돌린대도 선택은 항상 신해철이다. 그런 관점으로 듣자니, 심지어 「그대에게」를 들어도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세상이 끝난 곳에서도 나는 영원히 그대 곁에 있겠어요.
그런 얘기를 해놓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신곡을 발표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물론 음악만은 영원히 곁에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옆에서 웬 잘생긴 아저씨가 울어재끼면 옆자리 대머리 남자가 글쓰기에 방해를 받을 것이다. 국적을 떠나 선수끼리 동업자 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불쑥 떠난 여행이지만 마음의 공허는 꼼짝없다. 교토에 가서 뭘 할 건지 정하지도 못했다. 연재소설 때문에 여유롭게 돌아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돈 없어서 근사한 데스크가 있는 호텔에도 투숙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벚꽃도 이미 다 져버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나, 불멸은 없다는 걸 벚꽃을 통해 실감한다. 공기가 그나마 맑은 곳에서 이유도 모른 채 노트북과 씨름하기만 해야 할 것이다. 왜 이런 여행을 떠났나 싶고, 삶도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그때 또 머리칼이 쭈뼛 선다. 옆자리 남자가 엔터키를 한 번 세게 때리더니, 휴우, 한숨을 내쉬곤 노트북을 덮는다. 의자에 등을 기대는 폼에 해방된 자의 여유가 드러난다. 입 꼬리에 씨익, 미소가 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아아, 다 썼나보다. 나는 아직 이 글의 결론을 내지 못했는데 몹시 부럽다. 게다가 한일전에서 패배하다니. 조국의 팬들에게 너무 송구스럽고 부끄럽다.
내릴 곳은 점점 다가오는데, 나는 아직도 이 여행과,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할지 잘 모른다. 당연히 이 원고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론 역시 다음 곡으로 재생된 넥스트의 음악이 내려줬다. 신해철 아저씨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정말 고마운 존재다. 넥스트 2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인 「불멸에 관하여」의 마지막 부분, 연주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노랫말이 갑작스런 기차 여행을 하며, 혼란에 빠진 나의 의문에 결론을 내줬다.
예전에는 신해철 아저씨 다 좋지만 목소리 깔면서 무게 잡을 때는 웃긴다 싶었는데 이젠 전혀 그런 느낌도 없다. 땅이 꺼지도록 더 깔아도 되니까 아직 함께 기찻길을 달리는 중이기만 하면 좋을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노랫말이 결론이다. 역시 그는 뭔가 알고 있는 아티스트였다. 그립다. 몹시.
그대 불멸을 꿈꾸는 자여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으라 말 하는가 왜
왜 너의 공허는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 하는가 처음부터 그것은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렇다. 처음부터 내릴 곳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인생이든 여행이든 텅 빈 채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원고의 의미가 텅 비어 보이더라도, 그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종착역이 가까워지지만 걱정이 없어졌다. 아직 넥스트 음악은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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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시골아낙
2016.04.27
joapower
2016.04.26
저도 3주 전.
벚꽃 보려고 간사이공항에서 바로 교토로 향하는 하루카를 탔었죠.^^
전 그때 장범준의 신보를 들으며 밀린 스터디에 대한 고민을 했었는데 ㅎㅎ
종목은 다르나 묘하게 겹치는 구간이 있어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