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옛날 음악을 얘기하는 게 좀 지겹다. 오늘은 역으로 가본다. 과거에 들었다면 좋았을 요즘 음악 얘기다. 반응 괜찮으면 계속 역으로 가겠다. 그래도 지겨우면 강남역이라도 가고.
어쩌면 우리들은 지겹지 않기 위해, 글을 쓰거나, 읽는 것 아니었나? 아님 말고.
2003년, 딱 요맘때 나는 배낭 메고 아테네에 있었다. 세상에, 13년 전이라니. 내가 지금 딱 스무 살이니까, 일곱 살 때인가? 농담이다. 칼럼에 개그 욕심 부리는 것도 이제 지겹다.
어쨌든 그땐 네트워크 문명이 지금처럼 현란하지 않아서 인터넷으로 숙박을 예약하고 나발이고 그런 게 없었다. 숙박할 곳은 발바닥으로 구해야 했다. 못 구하면 노숙인 거고. 그 긴장감이 어드벤처 게임 같긴 했다. 옛날이 더 좋았다는 식의 너절한 얘기가 아니고, 노숙할까 봐 똥줄 타서 스릴 있었다는 얘기다.
근데 뭔가 신기하다. 그때 유럽 가는 항공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오히려 잘 찾으면 지금이 더 싸다. 어째서지? 물가가 오르기만 하는 건 아니었나. 또 하나 신기한 건 당시 숙박비랑 지금 숙박비도 비슷하다는 점. 거 참 신기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못 웃기는 것도 그래서인가?
그러나 전혀 비슷하지 않은 게 있다. 그땐 빅뱅이 없었다. 나는 요즘 빅뱅의 M.A.D.E 시리즈를 자주 듣는다. 다 좋지만 그 중에서 특히 <루저Loser>라는 곡을 사랑한다. 내가 루저라서가 아니다. 가사에 나오는 상처뿐인 머저리, 센 척하는 겁쟁이를 거울 속에서 매일 만나기 때문이다. 아, 그럼 루저 맞나?
모르겠고, 그때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 도착한 나는 빅뱅의
“혹시 나한테 화났어요?”
“내가 왜? 아테네는 신타그마에서 시작하면 돼. 웰컴 투 아테네!”
아테네도 터프했다. 이방인에게 쉽게 숙소를 허락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에 잘못 온 줄 알았다. 해가 질 때까지 숙소를 못 구했다. 난 흔한 가이드북도 사오지 않았다. 문체와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바보였다. 어드벤처 게임이고 뭐고, 알파α, 베타β, 감마Γ, 시그마Σ, 말고는 생전 한 번도 못 본 그리스 글자들 천지였다. 그것은 내게 고대 페니키아 문자를 해독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파르테논장 여관, 대실 2만원 숙박 3만원’ 이라고 적혀 있어도 아예 못 읽는 거다.
영어로 HOTEL이라는 간판을 건 곳은 숙소겠지, 설마 거기서 호박을 팔겠어? 싶었지만 너무 비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반짝이는 로비를 가진 호텔에 용기 내어 한 번 가 보았다.
“혹시 멍청한 녀석에게 주는 특별히 싼 방 없나요?”
“왜 없겠소. 70유로짜리가 하나 남았소.”
어마어마한 금액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부르는 걸 보니 거기서 자다간 눈을 깜빡이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샐 것 같았다.
절망할 무렵 극적으로 관광안내 센터를 발견해 숙소를 몇 군데 추천받고 지도까지 얻었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간 호스텔에서 나는 계속 퇴짜를 맞았다.
“침대가 한 개도 안 남았소.”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여기 방이 있댔어요.”
“난 거짓말할 이유가 없소. 당신이 너무 늦게 온 거지.”
어떤 호스텔은 이랬다.
“바깥 간판 말인가? 그건 골목 가로등이 고장 나서 켜 놓은 거야. 투숙객을 받으려는 의도는 없어.”
“이런 빌어먹을 조르바!”
나는 대표적인 희랍인을 욕했다.
그렇다. 밤은 깊어가고, 공원에 침낭을 깔기 직전이었던 그때 빅뱅의
멈출 줄 모르던 나의 위험한 질주 이젠 아무런 감흥도 재미도 없는 기분
난 벼랑 끝에 혼자 있네 I’M GOING HOME 나 다시 돌아갈래 예전의 제자리로
인생, 사랑 등에 제대로 지쳐버린 자의 푸념과, 절망감의 표출이 주제인 이 노랫말이 그때의 내 심정과 딱 통했을 것이다. 이 음악이 너무 좋은 건, 판에 박힌 사랑타령이나, 유치한 허세 없이 유니크한 노랫말 때문이다. 천하의 빅뱅이 이런 좌절감과 절망감을 깊숙이 잘 드러내면서 훌륭한 음악성까지 곁들여 놓다니, 감탄하면서 자주 듣는다. 빅뱅은 누가 뭐래도 훌륭한 아티스트지만 이 곡은 특히 독창적인 표현력을 자랑한다고 본다.
그나저나 13년 전 노숙 위기의 루저는 결국 한밤중에 숙소를 구했다. 본 중에 제일 썩은 호텔이었다. 문을 열자 끼으으 하는 소리가 났고, 술 냄새를 풍기는, 혈색이 붉고 목소리가 큰 남자가 나타났다.
“우와, 여행자로군. 신기하네. 어서 와! 우리 호텔은 시설이 정말 좋아.”
“환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여기 3일 묵을래요.”
나는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뭐? 30유로? 내가 아직도 드라크마(그리스의 유로가입 이전 화폐단위)랑 유로를 헷갈릴 줄 알아?”
“아니 3일 밤 잘 거라고요.”
“그렇게는 안 돼. 유스 호스텔 가서 처 자라고. 여긴 호텔이야.”
그 말은 ‘디스 이즈 스파르타’와 같은 어조로 들렸다. 우린 서로 영어가 엉망이라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마침 카운터에 탁상 달력이 있었다. 나는 날짜를 하나, 둘, 셋을 찍어가며 보디랭귀지로 자는 시늉을 했다.
“아아, 삼 박? 진작 그렇게 얘기할 것이지!”
스파르타인 피가 많이 섞인 것 같은 그는 껄껄껄 호탕하게 웃은 뒤 1박에 30유로를 불렀다. 뭔가 허무했다. 아마 그때부터 내가 못 웃기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내가 90유로를 건네자 그는 세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열쇠를 내게 던졌다.
“체크인 됐고, 방은 3층이야. 복도 끝이라고. 잘 자.”
열쇠엔 33호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방은 삼삼하진 않았다. 침대가 바나나처럼 휘어있고 가운데엔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 어쨌든 그때가 지금이었다면 그 방에서 또 빅뱅을 하염없이 들었을 거라는 얘기다.
어쩌면 우리들은 너무 외롭거나 절망하지 않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것 아니었나?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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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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