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어려운 책에 대한 어려운 리뷰 2] 맑스주의 철학
1990년대, 어려운 책을 어렵게 읽었던 시대. 쉬운 책, 쉽게 읽히는 리뷰가 대세인 요즘, 도전정신 반 허세 반으로 붙잡았던 그 시절의 사상가들이 문득 떠오른다. 90년대 스타일을 간직한 번역가 이정인씨의 현대 사상가 리뷰를 연재할 예정이다.
글ㆍ사진 이정인
201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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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는 프랑스 최고 엘리트 교육기관인 고등사범학교의 철학 교수로 재직한 철학자였고, 그의 일생의 관심사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었다.


1960년대 널리 읽혀진 알튀세르의 두 주요 저작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자』는 당대 프랑스 학계의 주류로 떠오른 구조주의를 통해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라는 양극단을 지양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복원하겠다고 호언했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을 학문으로 정립하기 위해 언어의 발화(주체)와 지시체(대상)를 배제하고 “기호들 간의 차이의 체계로서 언어구조”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가 주장한 방법론에서 기원했다. 구조주의자들은 그것이 가변적인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을 학적 영역에서 배제함으로써 인간과학의 내적 엄밀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90년대는 루이 알튀세르에서 시작되었다

 

알튀세르는 구조주의를 빌어 와서 부르주아 인간주의에 오염된 헤겔 철학의 잔재와 단절하고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과학적 지식을 생산하는 구조주의 인식론으로 대체하고, 철학에 다시 “과학의 과학”이라는 왕좌를 부여했다.


알튀세르는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프로이트, 깡길렘, 바슐라르 등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무관한 사상가들을 풍부하게 인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놀랍게도 1960년대 이후 프랑스공산당의 주요한 이론가로 대접받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파시즘과 2차 대전 이후 공산당들이 합법적 제도 정당으로 성장함에 따라 더 많은 지식인들이 유입되었다. 사실 서유럽 지식인들을 설득시키기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너무 단순하고 도식적인 이론체계였다. 게다가 실천을 강조하는 철학적 인간주의는 공산당 지도부에 위협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소련의 헝가리 침공 이후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는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개혁적 사회주의자들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알튀세르의 이른바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스탈린주의 공산당에게 상당히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알튀세르는 당의 공식노선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지식인들의 지적 허영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세련되고 사변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했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당의 실천적 노선에 대해서는 많은 경우 침묵했으며, 인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사실상 스탈린주의 공산당에 비판적인 마르크스주의 진영을 겨냥하는 것이었다. E.P. 톰슨이 『이론의 빈곤』에서 격렬하게 비판하듯이 이론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는 사실상 스탈린주의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했다.

 

 

판도라의 상자

 

현실 속에서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인간과 세계의 가변적 영역을 배제하고 보이지 않는 불변의 대상을 탐구대상으로 삼는 구조주의는 본질적으로 내재주의적인 동시에 정태적인 것이었으며, 전후 유럽 자본주의 체제 안정화의 반영이었다. 서구 자본주의의 이러한 안정을 크게 뒤흔든 68혁명에 거리로 나선 젊은 학생들은 구조주의를 혐오했다. 혁명에 수동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던 공산당은 급진적인 젊은 세대의 신용을 잃었고, 여성, 환경 등 사회 변혁에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온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는 새로운 사회운동들이 부상했다. 68혁명 이후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소장학자들이 주도하는 포스트구조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알튀세르는 68년 이후 제기된 새로운 문제의식들에 대응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고 재정의했다. 이 속에서 알튀세르는 신좌파의 도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보루로 유럽의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각광받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전반적인 쇠락과 함께 알튀세르의 영향력도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알튀세르가 1980년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정신병을 이유로 기소에서 벗어나자 그의 영향력은 유럽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유렵의 70년대와 한국의 90년대

 

서구의 70년대와 한국의 90년대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대중투쟁의 폭발과 그 절반의 승리로 얻은 민주주의의 확대, 신자유주의로 들어서는 문턱에 서 있었지만 아직 횡포할 정도는 아닌 자본주의가 부여한 물질적 풍요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소비주의 문화로 귀결되었다. 한국의 386세대가 천안문 사태와 소련의 몰락을 보았다면 프랑스 68세대는 소련 군대가 “프라하의 봄”을 짓밟는 것을 보았다.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희망이 좌절된 뒤, 일상에서 개인의 급진적 저항을 찬양하는 포스트구조주의는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현실에 적합한 이론으로 여겨졌고,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는 어정쩡한 절충으로 보여졌다. 상호 자율성은 해체로 가는 길목이 되었고 프로이트에 대한 연구는 라깡과 들뢰즈에 뒤쳐졌으며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대한 탐구는 푸코가 훨씬 더 많이 나아갔다.


알튀세르의 운명은 한국에서도 비슷했다. 알튀세르는 낡은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로 반짝 부상하다 곧 이어 밀려드는 포스트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지식인들은 알튀세르를 거쳐 푸코, 데리다, 들뢰즈라는 더 새로운 우상을 찾아 나섰다.

 

 

철학의 감옥

 

『철학적 맑스주의』라는 제목으로 묶여진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 등 몇 편의 글은 개인적인 참극이 벌어진 후 죽을 때까지 사회적으로 유폐되어 있었던 알튀세르의 마지막 저술들이다. 여기서 그는 “마주침의 유물론” 혹은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데, 이런 입장은 엄밀성을 추구하던 초기의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완전히 벗어나 확고한 법칙으로 이루어진 “역사과학”의 도그마를 해체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제 자본주의의 등장 자체도 봉건제의 내적 모순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돈과 노동자의 (우연한) 마주침의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태도는 차이의 형이상학을 창조하려 한 들뢰즈와 비슷한데, 그들은 모두 전통적 철학이 배제해온 차이나 우연을 이론화한 새로운 유물론 철학을 제시하려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사회과학의 승리를 선언했다”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사이먼 클라크의 말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존의 철학을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철학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했다. 도그마화된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은 “마주침”, “우발성” 같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근거를 통해서 제기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여기서도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마르크스, 하이데거, 데리다로 이어지는 새로운 유물론 철학사를 만들어내는데 더욱 열심이다.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이라고 이름 붙은 원고에 속했지만 이 책에는 실리지 않은 “정치적 상황-구제적 분석?”(『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한국어판에 수록)이라는 짧은 글에서 알튀세르는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쇠퇴한 이유에 대한 현실적 분석을 시도한다. 아마도 그는 여기서 다시 시작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에게 그럴 시간은 남아있지 않았고, 여전히 철학(사변)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칼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사변이 끝나는 곳, 즉 현실적 생활에서,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과학, 즉 인간들의 실천적 실행 및 실천적 발전과정의 서술이 시작된다”고 썼다. 안타깝게도 알튀세르는 결코 “사변이 끝나는 곳”을 보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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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사회활동 틈틈이 추리소설, 교양서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정해진 원고 분량를 훌쩍 넘기며, 수많은 고유명사를 흩날리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말투가 경직되는 그는 진정한 90년대 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