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사촌오빠의 아들이라며 우리에게 사진을 종종 보여주었다. 깜짝 놀랄 만큼 예쁜 아이였다.
“이름도 예뻐. 초록이야.”
정말 이름도 예뻤다. 초록이라니.
“오빠가 옛날에 같은 성당에 다니는 누나를 좋아했는데, 그 누나 이름이 초록이었대. 그래서 아들 이름을 초록이라고 지은 거야.”
어릴 적 혼자 좋아했던 누나 이름을 몰래 따서 아기 이름을 짓는 남자라니. 우리는 그 남자의 순정함을 제멋대로 상상하며 환호했다. 못 말리는 로맨티스트 같으니라고.
유학생이던 J의 사촌오빠는 오랜만에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친구들을 만났다. 야, 그때 그 녀석은 어떻게 지낸대? 결혼은 했고? 그들은 오래 소식이 끊겼던 이들의 안부를 전하며 아마 삼겹살을 굽거나 낙지볶음을 먹었을 것이다. 빈 소주병이 테이블에 쌓이기 시작할 무렵 J의 사촌오빠는 문득 말을 꺼냈다. 알알한 취기에 볼이 살짝 붉어진 채로 말이다.
“그 누나 소식은 알아? 초록이 누나 말야.”
친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
“초록이 누나. 옛날에 우리랑 같이 성당 다녔던.”
희한하게도 친구들은 초록이 누나를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J의 사촌오빠는 답답했다. 그 예쁘고 똑똑했던 누나를 왜 기억 못하지? 사촌오빠는 한참을 설명했다. 그녀의 아담했던 키와 야무졌던 입매와 자주 입고 다니던 체크치마까지. 그제야 친구들이 그녀를 기억해냈다.
“철옥이 누나 말하는가 본데?”
J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초록이 누나가 아니라 철옥이 누나였다고?”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우리는 술집 테이블을 땅땅 두들기며 웃어댔다. 너무 많이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초록이라는 이름보다 철옥이라는 이름이 더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초록이가 아니라 철옥이었다는 어쩔 수 없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럼 이 로맨티스트의 지나간 순정은 어쩌란 말인가. 아내에게 고백하지도 못하고 그저 아기 이름을 초록이라고 지어야겠다고 우겨댄, 한 남자의 귀여운 첫사랑을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저 벙벙한 표정만 지었을 J의 사촌오빠를 연민하며 우리는 소주를 퍼마셨다. 어떡해, 너무 안쓰러워.
이 칼럼의 제목은 김서령의 ‘우주 서재’이다. 우주는 이제 태어난 지 열 달이 조금 넘은 내 딸의 이름이다. 이 다음에 우주가 꼭 읽었으면 하는 책들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우주서재라는 제목을 붙였다. 우주는 내 첫사랑의 이름이 아니다. 아기아빠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책 중의 하나, 브라이언 그린이 쓴 『우주의 구조』 제2장을 내 앞에 펼쳐주면서 아기의 이름을 골라보라고 했다.
“예를 들어볼게. ‘제2장 회전하는 물통과 우주’라는 제목이 있지? 그러니까 아기 이름을 회전이라고 할지 물통이라고 할지 혹은 우주라고 할지 결정해보라고.”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했다. 아기아빠는 이미 마음으로 ‘우주’라는 이름을 찜해 둔 거였다. 하마터면 회전이나 물통이가 될 뻔도 했지만 나는 우주라는 이름에 결국 동의했다.
나는 우주가 나중에 자라 심윤경의 장편 『사랑이 달리다』 와 그 후속작 『사랑이 채우다』 두 권을 모두 읽었으면 좋겠다. 이 소설들에는 정말 사랑스러운 남자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혜나의 작은오빠 김학원은 얼렁뚱땅 괴상하기 짝이 없는 귀염둥이고, 그녀의 남자친구 정욱연은 예민하지만 여린 사랑쟁이다. 우주에 점점이 아리땁게 박힌 별들 중에서, 그렇게 사랑스러운 남자들을 잘 알아보았으면 좋겠다. 내 책장이 차고 넘쳐도 그 두 권을 곱게 간직해서 우주에게 건네줄 생각이다. 노랗게 바랜 책장을 들추며 우주가 나처럼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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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달리다심윤경 저 | 문학동네
부모의 황혼이혼으로 펑펑 써대던 아빠 카드도 사라지고, 난생처음 돈을 벌게 된 서른아홉 살의 혜나. 그녀의 미치광이 가족들과 그녀를 사랑하는 두 남자, 우리를 만만하고 시시하게 대할 뿐인 화려하고 도도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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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채우다심윤경 저 | 문학동네
여기, 흔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게 화내고 기뻐하고 거짓과 진심을 반복하며 치열하게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걸 집어던지고서라도 사랑에 빠지고 싶은 상대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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