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뀔 때면 몸과 마음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해 바람 따라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곤 한다. 어쩌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기업 내 직원 교육을 담당했던 사내 강사로 시작한 첫 직장 생활은 나쁘지 않았지만 고단하고 단조로웠다. 어릴 때부터 하나의 일만 하며 사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그것을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이용해 직장의 일상을 만화로 그려 개인 홈페이지와 직장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했다. 만화가를 꿈꿨던 어린 시절 첫 번째 꿈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림 실력은 부족했지만, 실제 직장 생활을 통해 쓰고 그린 이야기는 차츰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기대 이상으로의 반응은 마침내 사이트 내 공식 연재로 이어졌으며 2년여에 걸쳐 200편을 연재했다. 그러는 동안 여기저기 기업의 사외보에서 연재 의뢰가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리고 싶었던 만화를 시작해 지금까지 작업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즐겁다.
이어 두 번째 꿈이었던 국어교사가 되기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 달짜리 기간제 교사부터 시작해 현재 재직 중인 중학교에 정교사가 되어 어느새 13년째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세 번째 꿈인 서양화가에 도전해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네 번째 꿈인 에세이 작가가 되어 그림 에세이를 출간했다.
연재 원고가 많았던 어떤 해에는 매주 세 편의 만화 원고와 일러스트를 그렸으며 2권의 교과서 일러스트와 개인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었다. 3학년 담임을 맡아 수업과 진학 업무를 하면서도 그림과 원고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실 개인적인 휴식과 잠을 줄이는 것 말고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학교에서의 시간 이외에는 모든 순간에 원고를 떠올리고 작업에 몰두했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네 시간 미만이었다. 힘들거나 괴롭다는 생각보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매진했다.
여행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처방전
돌이켜보니 정말 스스로 행복하다고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몸과 마음이 더는 견디지 못하는 순간 스페인의 어느 작은 마을의 골목길과 파란 하늘이 담긴 사진 한 장이 내게 있어 치료는 여행뿐이라는 처방전을 던졌다. 나는 그 처방전을 들고 우선 항공권부터 뽑아 들었다.
여행의 시간은 내게 있어 가장 확실한 진통제였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미리 몇 달 치 원고와 일들을 처리하느라 또 피로와 두통에 시달리지만, 여행의 시간 중에는 늦잠도 자고, 어디든 앉아 쉬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느긋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꿈꾸는 일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모두 이룰 수 있다는 내 신념 앞에 나는 스스로 흔들리며 지금까지 아슬아슬 쓰러지지 않고 견뎌오고 있다. 여행이 내게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씩 없애 주고 있다.
이젠 흔들리며 걸어도 괜찮고, 가다가 주저앉아도 괜찮고, 잘못된 길에 들어 다시 돌아 나와도 괜찮다. 진짜 흔들리지 않는 삶이란 그 모든 것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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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흔들리지 않아배종훈 저 | 더블북
책에는 저자가 직접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도시들 풍경과 역사, 사유가 노트북 자판기를 꾹꾹 두드려 쓰였으며 원색적인 색감의 붓칠로 그림들이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여행지의 파란 하늘을 모티브로 연신 눌러대는 셔터 소리가 들리는 듯한 풍광 사진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텅 빈 마음을 충만하게 채운다.
배종훈
서양화가,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여행 작가, 그리고 중학교 국어교사라는 1인 5역을 맡아 늘 바쁘게 살고 있다. 서른여섯에 처음 간 유럽에 완전히 중독되어 거의 매년 유럽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고 돌아와 전시를 열었다. 요즘에는 여행 드로잉 비법을 전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일본과 인도 등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고 그림과 글을 쓰는 일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