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18리터 생수통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쏟아진 물까지 다 마시겠다는 듯 흥건해진 바닥에 달려들었다. 그렇게 수십 분이 흐르자 모든 관객이 포만의 고통에 빠져야 했다. 누가 저 사람 좀 말려줬으면 생각하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그때, 관객석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만 하세요! 우리가 같이 마셔주면 되는 거예요?” 배우 강애심이었다. 인터뷰에서 물었다. 그때 왜 그러셨냐고. 그녀가 답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고.
인터뷰를 마칠 때쯤 알았다. 배우 강애심은 주저앉아 후회만 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툇마루가 있는 집>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어요?
김승철 연출에게 전화를 받았어요. 주인공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에 다시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잖아요. 그게 꼭 한 사람만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저는 이 시대에 대한 죄책감이 있어요. 친구들이 거리로 나가 열심히 싸울 때, 저는 공연만, 정말 공연만 죽어라 했어요. 그때 함께하지 못했던 부채의식이 남아있죠.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참여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때요?
김승철 연출이 배우를 했던 사람이잖아요. 그래서인지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요. 어느 날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가 열여덟 번 공연하는 건, 한 작품을 열여덟 번 하는 게 아니라고요. 열여덟 편의 작품을 한 번씩 하는 마음으로 임하자고요. 그래서 저도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어요.
할머니 역할을 맡으셨어요. 똑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참 다르죠?
제가 연기하는 할머니는 참 속 편해요. 치매에 걸렸잖아요. 마음대로 말하고, 멋대로 행동하죠. 며느리만 만날 울고 힘들죠.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이 할머니도 옛날에는 며느리였어요. 아마 시어머니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다 며느리를 맞아선 당신도 그걸 되풀이하는 거고요. 며느리도 아마 또 시어머니가 되겠죠. 속절없이 되풀이되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요.
배우님도 한때는 후배였을 텐데, 이제는 선배가 됐어요. 찾아오는 후배들에게는 보통 어떤 조언을 하세요?
저는 말 많이 안 해요. 30대에 말이 제일 많았던 것 같아요. 세상을 다 깨친 것처럼 굴기도 했고요. 그러다 40대에는 더 깨달아서 말이 줄고, 50대가 되면 더 말이 없어지죠.
다만, 제가 연기를 시작했을 무렵에 만났던 강압적인 선배들 모습은 닮지 말자는 건 잊지 않으려고 해요.
그간 작품을 살펴보니 이런 역할명이 많아요. 할미, 여인, 할머니, 엄마, 어미, 여자.... 이름을 가진 역할을 하고 싶진 않으세요?
이름을 가진 역할이 더 의미가 깊다는 생각은 안 해요.
작가가 극을 쓰고, 그 인물에 이름을 ‘어미’로 줬다면 그 사람의 어떤 면모보다도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저는 그런 걸 찾아서 표현하면 되는 것이고요.
반대로 이름 자체에 인물의 성격이 부여된 캐릭터가 있다면 그 부분을 놓치지 않으면 되겠죠. 그런데, 제가 할미, 할머니, 어미, 엄마 같은 역할을 정말 많이 하기는 했네요. 이제야 알았어요. (웃음)
일곱 살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다는 거 진짜예요? 그 이후로도 그 꿈을 그대로 이어오고, 심지어 수십 년째 배우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대단해요.
저도 신기해요. 일곱 살 때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고 감동 받아서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초등학교에 가서는 합창반에 들었어요. 그때, <백설공주>라는 학교 오페레타가 있었는데 그 오디션에서 떨어졌어요. 객석에 앉아서 다른 애가 백설공주 연기하는 걸 보는데 부글부글 속이 끓고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 이후로 쭉 달려들었더니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이제는 하고 싶은 역할은 다 하실 수 있잖아요. 남이 하는 걸 보고 속 끓일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아직 로맨스를 못 했어요. 한없이 여자다운 역할이 잘 들어오는 편은 아니죠.
얼마 전에 마친 <빨간시>를 비롯해서 굴곡진 이야기가 있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연기를 할 때 정말 힘들죠. 그러다가 <툇마루가 있는 집>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 역할을 맡아 마음대로 떠드니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며느리는 속이 터질지 몰라도 저는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웃음)
<툇마루가 있는 집>을 기대하고 있을 관객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70~80년대 격동기를 온몸으로 맞았던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면 감회가 남다를 거예요. 최루탄 맞으면서 뛰던 시절이 생각날 거예요. 이 시절을 책으로 배운 젊은 관객들은 삭막한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요.
모범답안이네요. 친구가 ‘너 이번에 무슨 역할 하니’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 거예요?
제가 비극적인 역할을 참 많이 했었잖아요. 이제는 ‘나 이번에 좀 웃긴다!’고 말할래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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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