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독자] 로런 그로프를 소개합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저자와 출판사들이 각자의 언어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서점에 놓인 책들은 아직 한국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읽는 사람은 번역자일 것이다. 그리고, 번역자야말로 한 줄 한 줄 가장 꼼꼼하게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맨 처음 독자, 번역자가 먼저 만난 낯선 책과 저자를 소개한다.
글ㆍ사진 정연희(번역가)
2017.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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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ren Groff ? Megan Brown

 

지하철 7호선. 앞에 앉은 남자에게 문득 눈길이 간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호감형이다. 그런데 뭔가 아쉽다. 한때 얼굴에 분화구처럼 퍼졌던 여드름이 잦아든 자국.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더 끌린다. 오디션을 보러 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어느새 나는 그의 얼굴에서 로토를 읽어낸다. 로토는 미국의 작가 로런 그로프가 『운명과 분노』에서 그려낸 좀 허술한 신화적 인물이다. 이 현대판 오디세이의 주인공에게 존재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러나 얼마간 만화 같은 약점이자 매력이 바로 그 여드름이었다. 우리가 로토라는 캐릭터에 푹 빠져 구름에 가려진 그의 운명을 신화적 인물의 당연한 곤경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여전히 찬란한 존재로 느낄 때, 그 여드름이 불쑥불쑥 나타나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약점, 그를 더 인간적이게 만드는 아킬레스건의 매력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중적인 관점!)

 

2015년에 세 번째 장편소설 『운명과 분노』를 발표한 로런 그로프는 1978년생의 젊은 작가다. 이 책과 더불어 앞서 출간한 세 권의 책이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고 여러 주요 문학상 후보로 오르며, 그로프는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라는 평을 얻었다. 그 수식어들이 허황되지 않게 그녀의 작품은 독자와 교감하는 범위가 크다. 번역을 맡게 되면 나는 그 작품과 작가에 늘 얼마간 빠져드는데, 『운명과 분노』의 번역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휴우 한숨이 터져나오면서, 이런 장대한 작품을 도대체 어떻게 쓴 거지?, 이 지적이고 몰아치는 서사를 끌어내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라는 호기심과 함께 작가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자라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의 그녀는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과는 말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말하는 것을 글 쓰는 것만큼이나 좋아하는 것 같다. 전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운명과 분노』를 2015년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는 소식에 “까무러쳤다 다시 살아났어. ……그래, 이제 은퇴해도 되겠어”라고 이렇게 좀 호들갑스럽게(?) 트위터에 올렸는데, 인터뷰에서 답한 내용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로토가 마틸드의 이야기를 훔친 것에 대해서는 “남편과 스물한 살 때부터 같이 살았는데, 제가 남편의 이야기를 매일 훔치는 사람이에요…… 어느새 제 기억이 되어 있더라고요,” 대괄호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이유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저는 작중 인물들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과 밀착된 관점을 모두 제시하고 싶었거든요”라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에 대해 솔직하다. “나는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처음 쓸 때 완벽한 글이 되지 않을까봐 두렵고 그래서 처음에는 일부러 엉망진창으로 글을 써요……” 그러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영혼을 키워내기도 하고 이런 대작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운명과 분노』의 원제는 ‘Fates and Furies’이다. Fates는 로토를 내려다보는 운명의 세 여신을 말하고, Furies는 로토의 아내가 되는 마틸드를 내려다보는 분노의 세 여신을 말한다. ‘운명’ 부분이 사건 중심이라 극적이고 신화적이라면, ‘분노’ 부분은 극적이라기에는 감정이 더 부각되었고 단연코 신화적이지 않다. ‘운명’이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거센 외부의 힘이라면, ‘분노’는 가장 강력한 내면의 힘일 수 있다. 그들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그리고 누군가의 ‘파란만장’ 이면에는 늘 그의 ‘인생 키워드,’ 즉 삶을 관통하는 일관성이 있는 듯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곰처럼 생긴 아버지와 한때 관람객들 앞에서 인어로 살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다소 신화적인 탄생을 한 로토. 그 이후 그는 추락과 비상을 반복하다 극작가로서 뜻밖 아닌 뜻밖의 성공을 거둔 뒤 마흔여섯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생계의 책임을 떠안기고, 틈만 나면 아이 타령을 하고, 혼자 아내를 지고지순한 성녀로 만들어놓고는 나중에 배신을 당했다며 절망한다. 그럼에도 로토는 비루한 인생을 사는 이기적인 남자가 아니라 등 뒤에 찬란한 햇살이 펼쳐진 눈부신 로토로 읽힌다. 그것이 세상에 머리를 내놓는 순간부터 특권을 지니고 태어난 자의 운명이다. 그 특권이 유리하게 작용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러니 그를 흔들어놓기도 하고 붙잡아주기도 하는 일관된 키워드는 운명, 즉 특권이다. 또한 그의 삶은 그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큰 힘의 작용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


마틸드, 즉 오렐리의 탄생은 평범했으나, 자신의 행동 혹은 행동하지 않음 때문에 동생이 죽은 뒤로 그 삶은 순탄치 않았다. 화려한 적도 없었다. 결혼해서는 억척스레 생계의 책임을 떠안고, 남편을 성공시키고, 로토의 죽음 이후에는 한동안 자기 파괴적으로 살다가 관객이 한 명도 들지 않는 연극의 희곡을 쓴다. 그리고 노령이 되어 죽음을 맞는다. 그런 마틸드의 인생 이면에는 늘 ‘주먹을 쥐게’ 만드는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 뒤에는 “황혼녘의 자살” 같은 푸른색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삶은 언뜻 비루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합 또는 결혼. 로토에게 결혼은 운명적인 것이었지만, 마틸드에게 결혼은 의도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먹고사는 그 단순하지만 어려운 문제에서부터 심오한 철학적인 문제까지 결혼에 관한 많은 질문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결혼생활을 이루는 것은 어떤 친밀함들인가? 섹스는 결혼생활을 유지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는가? 결혼생활이라는 제삼자는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떻게 끼어드는가? 자식을 낳는 것, 낳지 않는 것은 결혼생활을 어떻게 바꾸는가? 결혼생활을 유지시키는 것은 솔직함인가 침묵인가? 누군가를 완전히 안다는 것, 알 수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 비극, 희극도 관점의 문제고 선과 악도 관점의 문제다. 이 소설을 결혼생활을 다룬 이야기로 보느냐 결혼이 개입된 두 사람 각각의 이야기로 보느냐도 관점의 문제다. 그러니 이 질문들을 놓고 명확한 주장을 펼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건가, 저건가, 그런 결론 없는 다양한 관점들이 어쩌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지하철에서 로토의 모습을 만난 날, 하얀 얼굴에 눈부신 파란색 스커트를 입은, 얼굴에 미소를 그려넣고 가슴속에 독사의 똬리를 들어앉힌 마틸드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느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오는 마틸드는 젊은 날의 마틸드가 아니라, 그 똬리도 거의 풀어진 “겁먹은 망아지 같은 다리”로 걷는 예순이 된 마틸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나이 든 내 모습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소설 속 주인공들이기에.


 

 

운명과 분노로런 그로프 저/정연희 역 | 문학동네
폭발적인 서사, 시적이고 우아한 문체, 지적이고 독창적인 서술로 “동시대 가장 뛰어난 미국 작가 중 한 명” “산문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가. 그러나 아직 국내 독자에게는 그 이름이 낯선 로런 그로프가 자신의 최신작이자 대표작인 『운명과 분노』로 국내에 첫선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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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 #로건 그로프 #삶 #관점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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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de44

2018.01.05

번역만큼이나 글도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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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희(번역가)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인문학의 즐거움』 『다시 그 강가에 서다』 『패션 디자이너를 위한 스타일북』 『솔리튜드』 『헬프』『비둘기 재앙』『새해』『죽음과의 약속』『안녕이라고 말할 때까지』 등 다수의 작품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