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온종일 크레파스를 가지고 논다. 분홍색 아기용 책상 앞에 앉아 색깔을 바꾸어가면서 직직 줄긋기를 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기다. 나는 옆에 앉아 새도 그려주고 별도 그려주고 포도와 딸기도 그려준다. 어쩌다가 공들여 뽀로로라도 그려주면 야단법석이다.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가 뽀로로 인형을 들고 나와 그림 옆에다 두고 꺅꺅 소리를 지르는 거다.
아기는 저녁 무렵 놀이터에 나가 밤하늘의 달을 보는 일을 제일 좋아한다. 저 어린 아기의 눈에, 어두운 하늘에 그냥 찍 그어진 가느다란 초승달 따위가 무얼 예쁘게 보일까 싶은데 한껏 칭얼대다가도 “달 보러 나갈까?” 한 마디에 신이 나는 녀석이다. 그래서 달도 그려줬다. 노란색 크레파스를 들어 초승달 하나 그려주면 그렇게나 좋아했다.
어느 오후, 크레파스를 가지고 놀던 아기가 짤막한 줄 몇 개 그어놓고는 나를 불러댔다. 달, 달. 아기의 서툰 발음에 나는 건성으로 끄덕였다. 그래도 계속 내 팔을 부여잡고 아기가 떠들었다. “달 봐봐, 달!” 그제야 보니 아기는 크레파스를 쥐고 짤막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 아기가 그린 첫 초승달이었다. (내가 그 초승달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온 가족에게 메시지로 날리고, 자랑을 하고, 욕을 먹은 일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내 장래희망은 만화가였다. 나는 <어깨동무>며 <소년중앙>, <새소년>의 만화가들에게 되바라진 팬레터를 자주도 쓰던 꼬마였다. 하루 종일 연습장에 자를 대고 칸을 그린 다음 만화를 그려 아빠의 생일 선물로 내밀던 그런 꼬마. 그랬던 나는 3학년이 되어서 장래희망을 정정했다. 소설가로 말이다. 사실 소설가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만화가보다 조금 더 점잖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만화방에 갈 때마다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지만 동화책은 밥상머리에서 읽어도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십대가 되었으므로 만화가 대신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림을 꿈꾸는 사람으로 남았다. 서점에 갈 때면 문구 코너를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드로잉 북을 한 권 집어야 하고 색색의 펜과 연필을 사 모으는 사람이 되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보고는 싶지만 또 그게 쉽지는 않고 그저 꿈만 꾸는 사람. 그래서 내 작업방에는 빈 스케치북이 적어도 열 권은 될 거고 펜과 연필이야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저걸 다 언제 써먹나,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도 예쁜 풍경을 보고 예쁜 사람을 보고 예쁜 달을 보면 아무 데나 주저앉아 그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데.
그러다 마주한 책이 일러스트레이터 김효찬의 『펜과 종이만으로 일상드로잉』이었다. 평소 김효찬 작가의 펜 그림을 좋아한 터라 덥석 펼쳐들었다. 그는 정말로, 아무 데나 주저앉아 그림을 그리는 작가였다. 나 같이 마음만 있지 어찌할 바 모르는 꿈쟁이들에게 적절할 만한, 아주 쉬운 교본이다. 몇 장을 넘겨보던 나는 아무렇게나 쌓아두었던 드로잉 북의 먼지를 떨고 책상에 앉았다. 마침 여수 여행을 막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여수의 골목길을 나는 주섬주섬 그려나갔다.
얼마 전 나는 질문을 받았다. 어떤 노년을 생각하느냐고 말이다.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바닷가. 아주 여름일 필요는 없고요. 그냥 햇살 좋은 바닷가 모래밭. 썬베드 놓고 이제 다 큰 딸이랑 둘이 누워서 책 보다가 졸리면 자고. 그러다 눈 뜨고. 멀리 보이는 갯바위랑 갈매기가 예쁘면 그림도 그리고요.”
나는 진심으로 그런 노년을 꿈꾸는 중이다. 아기가 그린 어처구니없는 초승달을 보면서 내가 정말 기뻤던 건 어쩌면 그런 날이 정말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그리고 딸은 책 보다 잠든 백발의 나를 그려주고. 그런 평화로운 노년을 기다리는 요즘이다.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