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중앙에 자리한 9층 건물 밀리컨 도서관은 칼텍 지진연구소 연구자료용 건물로 진도 9.0의 강진에도 버틸 수 있게 설계되었다.
교과서 없는 강의실, 칼텍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패서디나에 위치한 캘리포니아공대(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ㆍ칼텍) 강의실은 교과서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교수들은 매 강의마다 직접 자료를 준비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발전하는 과학ㆍ공학 분야에서 교과서는 시대에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학부생 1,000명, 대학원생 1,200명, 교수진 320명. 칼텍의 현황을 보여 주는 숫자들이다. 학생수로 따지면 작은 고등학교 하나에 불과하지만 칼텍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야말로 혹독한 입학관문을 뚫은 수재들이다. 2014년 가을학기 입학생의 경우 합격률은 8%. 미국 명문대학인 MIT(8%), 스탠퍼드대(5%)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특히 칼텍 입학생의 98%는 고교시절 성적이 상위 10%에 들었던 학생들이다. 포스텍(포항공대)은 1987년 첫 신입생을 뽑으면서 ‘한국의 칼텍’을 표방했다. 칼텍처럼 규모는 작지만 세계적인 연구 중심 대학으로 성장하겠다는 의미다.
학부생의 경우 교수 1인당 학생수가 3명에 불과하다. 대학원생 역시 교수 1인당 학생수가 4명 수준이다. 학교 설립 이후 이 비율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데, 이런 ‘소수정예의 원칙’이 오늘날 칼텍을 세계 정상급 대학으로 만든 원동력이라 평가한다. 칼텍 교수들은 학생들을 일대일로 지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심성의껏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고 해도 여러 명의 학생을 지도하면 학업 효율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소수정예의 칼텍 학생들은 배움의 기회가 많다.
칼텍에서는 34명의 교수 및 동문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이를 통해 소수정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 상당수 노벨상 수상자들은 수상 후에도 후학 양성을 위해 연구실을 지키고 있다. 칼텍은 3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 외에도 교수 3명 중 1명이 미국 국립과학원 NAS이나 미국 과학아카데미 멤버다. 이는 미국 대학 중에서도 가장 높은 비율이다. 칼텍의 교수 선발절차는 아주 까다로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학교는 수차례 인터뷰를 통해 칼텍에서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를 선택한다. 교수영입에는 예산과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 만큼 꼭 필요한 교수는 삼고초려도 불사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칼텍의 상징 ‘Fleming Cannon’. 매년 학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 위해 발포된다. 사진 김민수 제공.
특별한 수재들의 학교
칼텍은 이공계 수재들이 다니는 학교답게 이벤트도 평범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과학적 실험과 단순 재미를 넘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칼텍 학생들은 매년 핼러윈이 되면 캠퍼스 중앙 밀리칸 도서관 꼭대기에서 ‘밀리칸 호박 떨어뜨리기 실험’을 벌인다. 밀리칸 도서관은 학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데 액화질소로 얼린 호박이 바닥에 떨어지면 산산히 부서지는데 이때 순간적인 마찰로 빛이 난다. 해마다 이벤트가 벌어지는 밤 11시면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도서관 주변은 호박이 내는 빛과 함께 부서진 호박으로 물든다. 이 행사는 약 5분간 진행되는데 1972년부터 4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매년 졸업생들이 주축이 돼 진행하는 ‘땡땡이의 날(Ditch Day)’도 특별하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학기 중 하루를 정해 수업 등 학사 일정을 중단한 채 기숙사 방을 비운다. 선배들은 기계ㆍ전기ㆍ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몇달 동안 심사숙고해 후배들에게 제시한다. 후배들은 이 기상천외하고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방에 들어갈 수 있다. 교수들 역시 학생들이 땡땡이의 날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수업을 휴강하고 배려해 준다. 멋모르고 등교한 학생들은 응징을 당하는데 캠퍼스 나무에 묶이거나 물벼락을 맞기도 한다.
이러한 칼텍은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대학으로서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MIT와의 경쟁도 치열하다. 이 두 대학의 라이벌 의식은 연구성과 경쟁은 물론 학생들의 자존심 싸움도 만만치 않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졌다. 2005년 4월 칼텍 학생들은 MIT 신입생 예비 방문기간에 캠퍼스 본관에 새겨진 교명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을 ‘또 하나의 공대(That Other Institute of Technology)’라고 바꾸는 장난을 쳤다. 이는 칼텍이 최고이며, MIT는 그 뒤를 잇는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칼텍 학생들은 MIT 신입생들에게 ‘칼텍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가는 대학’이라는 티셔츠를 뿌리기도 했다. MIT 캠퍼스 본관에 칼텍을 상징하는 야자나무 형태의 설치물을 가져다 놓거나, 오렌지색 풍선에 헬륨을 넣어서 로비에 띄우기도 했다. 이에 자극받은 MIT 학생들은 ‘오직 하나의 공대 (The Only Institute of Technology)’라는 문구로 칼텍의 도발에 응수했다.
수학, 과학은 잘하는데 사교에는 관심이 없는 학생, 운동이나 취미보다는 공부에만 몰두하는 학생, 미국의 많은 대학들이 모범생보다 봉사활동이나 사회성을 강조하지만 칼텍은 예외다. 칼텍은 공부에 전념하고 자신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이곳에서 인재들은 팀플레이와 융합의 문화를 배우며 미래의 이공계 엘리트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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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은 어떤 인재를 원하는가설성인 저 | 다산4.0
세계 최고 10대 이공계 대학의 면면을 낱낱이 보여 주는 이 책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쓰나미 앞에서 새로운 인재란 누구인지, 인재는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해답이 가득하다. 미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국가지도자ㆍ교육관계자ㆍ기업인ㆍ학부모ㆍ학생들은 꼭 한번 읽어봐야 할 필독서다.
설성인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2006년 전자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현재 조선일보 경제·경영 섹션 「위클리비즈」를 만드는 조선비즈 위비경영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이공계 문제와 대학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해외 명문 이공계 대학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고, 차곡차곡 콘텐츠와 지식을 쌓았다. 첨단 과학부터 실용 학문에 이르기까지 뿌리 역할을 하는 대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상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