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 AI의 그림 실력은 형편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AI는 대체할 수 없는 직업 목록을 유머로 소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씁쓸한 미소만 걸립니다. 챗 GPT가 숙제나 사과문을 대신 써주는 건 어색하지 않은 용례이죠. 정신과 상담을 대신하고 바람 상대로 의심받는 시대가 왔으니까요. 동시에 인구 감소는 차곡차곡 진행되고 그에 따른 고령화와 이주자 문제, 계급 갈등 또한 몸집을 불리고 있습니다. 기술의 변화가 경주마처럼 달려오는데 트랙마저 금이 간 상황이랄까요.
손원평 작가는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인구 감소를 몸소 체험하고 『젊음의 나라』를 구상했다고 합니다. 어린 세대들이 지금의 문제를 안고 미래를 맞이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될까?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실직자 ‘유나라’는 노인 복지 시설의 면면을 마주하며 자신의 미래를 찾아 나갑니다. 그 여정은 무섭도록 잔인한 현실과의 대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희망을 탐색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안고 있는 노화와 미래에 대한 불안, 사회적 문제에 막연하게 품어왔던 질문이 이 작품을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로봇이 내리는 커피 향이 나는 미래
『젊음의 나라』라는 제목이 직관적이라 영화 제목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주변 반응이 반으로 나뉘더라고요. 올드하다, 옛날에 쓰여진 무게감 있는 작품 같다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어요.(웃음) 저도 끝까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 제목 외에 떠오르는 게 없더군요. 미래의 청년인 주인공 나라가 젊음과 청춘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면서 나이를 넘어 시대 안의 젊음이란 무엇인가 묻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중의적인 의미로 가장 적합하다 생각했죠.
소설에는 노인 인구의 증가, 이주자 차별, 안락사, 계급 사회 문제 등 다분히 현실적 문제들이 겹겹이 반영되어 있는데 근미래라는 시점을 취했는지 궁금했어요. 동시에 작가님이 2020년에 발표한 단편 「아리아드네 정원」에 등장하는 “미래는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고 눈 깜짝할 사이에 현재를 점령한다.”라는 구절이 답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고요.
이 소설이 지금으로부터 5년 정도 전에만 나왔어도 훨씬 SF처럼 느껴졌을 것 같아요. 「아리아드네 정원」을 쓸 때부터 저출산과 초고령화 시대에 관심을 가졌고 그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썼었죠. 그러고 나서 1~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게 바뀌었어요. 특히 챗 GPT의 등장 이후로 멀찍이 있다고 생각한 미래의 어떤 모습들이 성큼 다가온 거예요. 점프하듯이 현재로 다가오면서 현재를 갱신해 버렸어요.
그리고 저에게 두 명의 아이가 있는데 이 둘의 나이 차이가 8년이 나거든요. 이 사이에 인구 구조와 사회가 변했다는 걸 양육자로서 가까이서 체감하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이 아이들이 컸을 미래를 떠올려봤어요. 지금의 사회가 품고 있는 씨앗들이 발화해서 엉켜 나갈 때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그려보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가까운 미래를 선택하게 됐어요. 모든 것이 기계화된 은빛 미래가 아닌 로봇이 능숙하게 커피를 내려주지만 여전히 향과 온기의 가치는 그대로인 시대를요.
독자 입장에서는 일기 형식의 글이 쉽게 읽혔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짧은 하루에 정제된 이야기를 채우기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기 형식은 어떤 장치로 쓰였나요.
가장 큰 이유는 이 시점에서 서술적인 실험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지금까지 1인칭, 3인칭으로 써보고 인터뷰 형식의 단편도 써봤는데 일기 형식의 글을 쓰면 어떨까? 작가로서 도전이 될 것 같았어요. 근데 정말 너무 어렵더라고요.(웃음) 일기란 아무도 읽어줄 일 없는 혼자만의 비밀 글이잖아요. 상황이나 사건을 정직하게 풀어서 설명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매일 쓰인 일기를 읽으면서 독자가 상황이나 사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보의 배치를 적절하게 하는 게 관건이었어요. 문학적인 표현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아쉽기도 했고요.
AI와 더 젊은 노동자에 의해 실직한 나라는 시카모어 섬의 메타버스인 시카모리아에 VR로 접속해 이상의 세계를 통한 위안을 얻어요. 누구나 꿈꾸는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 ‘이상’의 의미해 대해 깊은 고민을 했을 것 같은데요.
공상 과학적인 이상향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나라라는 인물이 어떤 곳으로 가고 싶을까에 좀 더 초점을 뒀어요. 청춘의 시기에는 현재가 불안하잖아요. 불안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고정돼 있지 않아요. 화학에서도 분자처럼 불안정한 것들은 막 움직여요. 청춘들은 그 불안한 영혼을 가지고 어딘가 좀 더 현실이 아닌 어두운 곳을 꿈꾸는 것 같아요. 현실과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전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욕구와 다른 곳에 가서 뭘 하든 여기보다는 나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 상상. 마치 미래의 워킹 홀리데이를 상정하며 구체화했죠.(웃음)
젊음도 노화도 죄가 되는 미래
시카모어 섬에 갈 수 있는 열쇠이자 최대 노인 복지 시설 유카시엘은 다섯 개의 유닛으로 나뉘 있어요. 나라는 모든 유닛을 거치며 계층 구조로 나눠진 그 안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됩니다.
유닛의 등급을 나눌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얼마나 여러 단계로 나눠야 할까 제 머릿속에서도 계속 충돌이 있었어요. 고급 실버 타운에 대한 이야기나 굉장히 빈곤한 노인들의 모습은 알고 있지만 그들 개인에게는 좀처럼 조명이 비춰지진 않았기에 어렴풋하게 그려졌던 것 같아요. 이미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이들의 모습을 구체화시키고 미래로 끌어가 봤어요. 어느 시점부터는 노인 인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고 결국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관리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때가 와도 지위와 돈에 의한 지배는 더 심화될 것 같았어요.
발레를 했던 노인, 그림을 그렸던 노인 등 모두 젊었을 때는 가치를 인정받은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종국에는 유카시엘에 들어와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죠. 이 대목이 씁쓸하고 두려웠고 모두가 하는 고민이라고 느껴졌어요.
노인이 아닌 세대는 노년 계층을 굉장히 플랫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이 아닌 덩어리로 뭉뚱그려 얘기하기도 하고요. 그분들도 젊었을 때는 각자의 이야기를 지닌 좀 더 도드라진 개인이었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의 MZ세대가 노인이 되었을 때는 지금과도 또 다른 모습일 것 같아요. 지금의 노인 계층은 문화를 향유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매진하지 못했던 세대 같거든요. 여자들은 거의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고 남자들은 돈을 벌거나 사회 생활을 하기에 바빴으니까요. MZ세대는 어릴 때부터 문화를 가까이 접하고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골몰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추구하는 직업을 얻는 경우가 예전 세대보다 높아요. 이 세대가 노인이 되었을 때는 사회가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까 떠올려봤는데 여전히 그 개인들이 개체로 인정받는 날은 안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취적인 캐릭터인 민아 이모는 영화를 제작하고 LP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었고 나라 역시 연기라는 행동하는 꿈을 꿉니다. 냉정한 사회에서 인간미를 가진 이들이 유독 예술을 사랑하네요.
잠시 딴 얘기지만 얼마 전 마트에 갔을 때 계산대에 있던 점원들이 한 분 빼고 전부 사라진 걸 의식하고 놀란 적이 있어요. 셀프 계산대가 늘어난 만큼 그 자리에 있던 분들이 사라진 거죠. 물론 다른 파트에서 일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지워지는 걸 일상에서 종종 목격할 때마다 소름이 돋고 이상한 기분을 느껴요. 근미래에는 분명 사라진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 생길 거고 그만큼 스스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갈증을 느끼는 상황도 생길 거예요. 그 안에서 예술은 결국 자기가 선택하고 다가가는 지점인 거죠.
반면 간호사인 이민 2세대 엘리야, 안락사를 집행하는 의사 재희는 고령화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여하면서 일상에서는 혐오를 숨기며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이들을 혐오의 아이콘으로 생각한 건 아니에요. 우리 사회가 점점 유럽의 여느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썼어요. 난민 문제로 우경화가 진행되고 혐오를 대놓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는 세상이잖아요? 다문화가 진행된 우리 사회를 뒤돌아 보고자 했어요.
그럼에도 연대가 힘이 되는 미래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콜라주 되어 있지만 그토록 만나고 싶고 동경하던 존재의 현실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결말이 따스했어요.
사회와 문명이 빠르게 변화하고 자본을 숭상하는 정신적 유행이 만연하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 소중한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각박한 상황 속에서도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마음? 아무리 혐오를 표현하는 사람들이라도 그 안에는 자신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원하는 것처럼요. 이런 개인의 연결 욕구가 사회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면 연대가 되는 거잖아요. 점점 계층이나 세대 갈등이 심해져도 나 자신과 남을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이 회복되었으면 좋겠고, 그러려면 서로를 일단 잘 바라보면 좋겠어요. 가만히 서로를 응시하다 보면 아름다움을 알고 갈등도 조금은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작가로서 희망을 담고 싶었어요.
작가님이 좀 더 젊었을 때 어떤 고민을 안고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저도 20대 때 되게 불안했던 것 같아요. 서른 살이 되기 전, 20대 중반을 지나면서 내가 더 이상 어리지 않지만 또 나이가 많은 건 아닌 시기. 가능성이 있긴 한데 그게 눈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죠. 아예 문이 닫혀 있다면 포기가 빠를 텐데 내가 갈 수 있을 것 같은 여러 문들이 서서히 닫히고 있다는 압박감에 힘들었어요. 문이 닫히기 전에 어디든 가야 하는데 막상 결정하고 나면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굉장히 불안했던 것 같아요.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의 ‘나라’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나요?
불안했던 상태를 떨쳐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지만 지금 보면 서툰 노력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 길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얘기해 보자면 불안의 다른 이름은 자유이고 내가 움직일 수 있음이며 가능성인 것 같아요. 그러니 계속 탐색하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젊음의 나라
출판사 | 다즐링

박의령
여러 패션 매거진의 피처 디렉터로 일하다 지금은 자유롭게 글을 쓴다.

표기식
사진 작가.
헬롱
2025.08.26
아직 30대인 저도 고령화 사회와 제가 노년이 되었을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도 엘리야와 같은 생각을 살았던 사람으로써 많은 깨달음과 생각을 하게되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원평 작가님 글은 정말 쉽게 술술 읽히는 것 같아 정말 좋아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작품 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