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 PD, 바르셀로나의 생활자
숙소 말고 방을 구하기로 했다. 가이드북 말고 텍스트북을 들기로 했다. 이곳저곳 찍는 대신 한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거점을 두고 살면서 하는 여행.
글ㆍ사진 이지원(PD)
201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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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중학교 때쯤이었을 거다. 반상회에 다녀오신 어머니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맞은편 아파트 2층인가에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다 정년퇴임한 노부부가 사는데, 1년에 하나씩 언어를 정해서 반년은 함께 공부를 하고 나머지 반년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실제 나라에서 살다 온다는 거였다. 그렇게 매년 정복한 나라가 벌써 몇 개국이나 된다고. 어린 마음에도 그분들의 여유로운 삶이 무척 부러우면서도 저렇게 사는 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궁금했다.

 

2005년 겨울, 난 프랑스 파리 4구의 유명한 카페 보부르(Cafe Beaubourg) 2층 창가에 앉아 혼자 쇼콜라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동창 집에 놀러 왔다가 일주일을 눌러앉아버린 참이었다. 창밖으론 벙어리장갑을 낀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퐁피두센터 앞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옆 테이블엔 엄지손가락만 한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 세상 큰일 난 것처럼 열띤 토론을 벌이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엄마 둘이서 그 옆에 앉더니만 갑자기 랩 배틀이라도 벌이듯 노인들 토론에 끼어들며 맞담배를 피우는 게 아닌가? 서로 처음 본 사이가 분명한데, 위도 아래도 없이 즉석에서 성사된 맞담배 부킹이 흥미진진해서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꺼내들다가 불현듯 그때 그 노부부 생각이 났다.

 

저들의 얘기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사진이 아니라 대화를 시도할 텐데. 오늘 일정을 내일로 미뤄도 된다면 에펠탑 따위는 언제든 주머니 속에 넣어둘 텐데.

 

1초면 찰칵- 하고 끝나버리는 한 장짜리 사진이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연속 재생이 가능한 일상의 동영상이 궁금해졌다. 무슨 뜻인지 모를 잡음에 불과한 저들의 대화도 조금만 공부한다면 의미 있는 삶의 소통으로 남지 않을까? 같은 길을 걷고도 간판이라도 읽을 수 있는 것과 아무 구별조차 못 하는 건 체험의 폭이 천지차이 아니던가! 하지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진 한두 장을 몰래 찍고는 재빨리 다음 관광지로 이동할 지하철 노선도를 꺼내드는 일뿐이었다. 그때 결심을 굳혔다. 언젠간 반드시 지도와 카메라 따윈 던져버리고 생활자가 되어 다시 오리라.

 

어쩌다 보니 오대양 육대주에 걸쳐 60여 개국을 다녀봤다.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만큼 인생 공부가 깊고 다양해진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여행이 거듭될수록 관광이 아닌 생활인으로 머물러보고 싶단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무늬만 그런 게 아니라 정확히 저들과 같은 조건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숙소 말고 방을 구하기로 했다.

가이드북 말고 텍스트북을 들기로 했다.

 

이곳저곳 찍는 대신 한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거점을 두고 살면서 하는 여행.
달팽이처럼 집을 구하고 나면 돈은 오히려 싸게 먹힐 것이었다.

 

어디로 떠날지만 정하면 됐다.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 선택은

7년 전 마음을 빼앗겼던

눈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탁 트인 지중해를 품은 도시
바르셀로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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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PD)

예능 피디, 작사가, 작가. 지금껏 60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언론정보학과를 거쳐 2000년 SBS 예능국 피디로 입사했다. <유재석의 진실게임> <이효리의 체인지> <김정은의 초콜릿> <하하몽쇼> <정글의 법칙> <도시의 법칙> 등 수많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기획, 연출했다. 다비치, 앤씨아 등의 작사가로도 활동했으며, 저서로 『이 PD의 뮤지컬 쇼쇼쇼』 등이 있다. facebook,instagram ID:@ez1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