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다>의 한 장면
<춤과사람들> 2011년 2월호 ‘예술가가족’이라는 코너에 국립발레단의 자매 단원 박나리와 박슬기가 소개된 적이 있다. 그 때 “무용수로 뛸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무대에 서고 싶어요. 기회 가 된다면 안무도 하고 싶어요.”라고 안무에 대한 욕심을 피력했던 게 필자의 기억에 남았다. 박나리는 그 꿈을 이루려는 듯 작년에 이어 올해도 국립발레단의 안무가 육성프로젝트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안무자 ‘박나리’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두 해 연이어, 작년 <오감도>, 올해
아직 저는 무용수이고, 안무를 직업으로 하고 있진 않아요. 관객들의 평가가 어떠하든, 안무에 도전한 제 스스로 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10여년 무용수 활동에선 인정을 받았겠지만 안무자 박나리의 길은 아직 멀지요?
이제 겨우 두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뿐이에요. 주제 선정, 작품 전개... 모든 게 어려워요. 특히 출 연자에게 주제를 설명 후 동작과 주제 간의 연계성을 설명한다든지, 그들을 리드 한다든지... 어려움을 느끼지만 작년과 올해 무용수와 저와의 간극이 조금 좁아졌다고 믿어요. 이번 작품은 작년보다 더 즐겁게 풀어냈고 출연진들의 그런 노력 덕분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나온 것 같아요.
그날 공연의 안무자 4명은 공연을 위해 출연자 오디션을 따로 하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단원들에게 작품 출연 제의를 해야 해요. 단원들은 항상 다음 작품을 위해 연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 공연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어서 연습을 하다 보니 선뜻 공연에 출연을 해 주겠다는 단원들은 많진 않아요.
<마주하다>의 한 장면
2005년에 국립발레단 첫 입단, 퇴사 후 싱가폴댄스시어터에서도 활동을 했던데요.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적응을 잘 하지 못했어요. 다국적 무용단인 싱가폴댄스시어터가 한국에서 공연을 하고 난 후 한국무용수가 없기 때문에 영입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김선희 교수로부터 전해 듣고 2008년 그 단체에 입단, 2년 반 정도 활동을 했어요.
싱가폴댄스시어터에서 어떠했나요?
한국무용단에서와는 달리 단원들 간의 관계가 굉장히 자유롭더라구요. 말 그대로 다 같이 작업자로서의 동료로 상대한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무용수로서도 굉장히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되었고요. 또 30명 남짓 단원으로는 클래식 발레를 올리는 게 용이하지 않아 창작발레를 주로 올렸어요. 안무적으로도 제가 얻은 부분이 있죠.
싱가폴댄스시어터는 단장이 직접 안무한 작품만 올리나요?
그렇진 않아요. 외부 특히 유럽에서 활동하는 안무자들의 작품을 올리기도 하고요. 이리 킬리언의 작품 혹은 아시아 안무자들을 초청하기도 했어요. 특히 저는 추산고 작품의 독특함에 빠져들었었죠.
그곳에서의 생활에 만족한 것 같은데요. 한국으로 다시 온 이유는요?
싱가폴 활동을 접고 미국이나 캐나다 쪽으로 이적을 생각했어요. 그때 최태지 단장님이 국립발레단의 재입단을 권유하시더라고요. 20대 후반의 나이에 외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에 부담스럽기도해 2010년 재입단을 했습니다.
발레단에 들락날락(?)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의미에서 실력이 된다는 말이네요. 발레는 언제 시작했나요?
어머니를 졸라 무용을 시작한 게 9세 때입니다. 유치원 때부터 발레가 뭔지도 모르면서 제 꿈은 ‘발레리나’였어요. 선화예술고등학교, 한국 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그리고 국립발레단에 입단을 하면서 제 꿈이 실현되었어요.
<콰르텟오브소울>의 한 장면
동생 박슬기와 발레를 같이 시작했는데, 테크닉적으로 동생이 더 낫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성장과정에서 동생에게 미안점이 있었어요. 저와 같이 시작 했지만 언니이다 보니 제가 걸어온 길을 동생이 똑같이 걷게 되는 거예요. 동생 박슬기는 어느새 ‘박나리 동생’으로 불리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할 수 없이 어머니가 학교에 동생에게 ‘000의 언니가 아닌 박슬기’라는 이름을 불러달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어요. 지금 동생은 발레단 안에서 수석무용수로 굉장히 잘 해 내고 있어요. 각자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따로 있습니다. 자매라고 똑같이 잘할 수는 없죠.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개발해서 그 길을 향해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전 제 자신이 발레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두 분의 성향은요?
자매이지만 서로 달라요. 부모님에게 받은 신체적인 조건은 좋으나 동생이 집념이 강하기 때문에 무용수로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것 같아요. 안 되는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되게끔 만들어내는 끈기가 있거든요. 제게는 그 점이 부족합니다.
안무에 관심이 더 많은가요?
어려서부터 안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선화예고를 다니면서 창작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럴 때 안무를 하는 게 힘들지 않더라고요. 대학 입시도 무용원 실기과보다는 창작과를 지망해서 안무에 대해 더 공부를 할까도 고민을 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실기과를 다니면서 안무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게 좋다고 조언을 하시더라구요. 그 말씀 듣길 참 잘한 것 같아요. 안무는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안무자가 동작으로 구사해 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콩쿠르 운이 없었나요? 동아콩쿠르 동상. 나고야 콩쿠르 파이널, 상하이 파이널 등의 수준에 그쳤는데....
각자의 자기만의 스타일의 춤이 있습니다. 또 콩쿠르에서는 짧은 시간에 심사위원들에게서 자신의 기량을 평가받는데요. 그 안에서 진정한 춤을 평가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현역 발레리나 중에서도 테크닉이 좀 부족하면 드라마로 승부를 걸기도 합니다. 콩쿠르 성적만으로 무용수의 기량을 평가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무용수는 몸관리도 굉장히 중요하죠. 어떻게 관리를 하나요?
꾸준히 운동하고 부족한 약한 부위는 재활을 통해 보완을 하면서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죠. 연습으로 힘들어도 휘트니스에서 근력운동을 잊지 않고 꾸준히 합니다.
무용을 하면서 슬럼프로 인해 춤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
뒤돌아보면 아직까지는 무용을 그만 둘 정도의 슬럼프는 없었던 것 같아요. 성격이 긍정적이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그 일들이 좌절이 될 수 있었겠지만 전 성격적으로 전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그 위기들을 보낸 것 같아요.
잘 적응 못했던 발레단, 재입단 후 어떠했나요?
제가 없는 사이에 발레단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아요. 아니면 제 마인드가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때 느꼈던 위계질서 같은 것들이요. 어쩜 제가 당시 오만하고 겸손하지 못해서 생겼던 문제일 수도 있어요. 그때 사회생활을 너무 몰랐던 거죠. 그저 학교에서나 주위에서 항상 잘한다는 말만 듣던 저에게 조직 생활은 너무 힘들었던 거죠. 철이 드니 이제야 저를 다시 돌아보게 돼요.
<오감도>의 한 장면
작품에 대한 질문입니다. 첫 안무작 <오감도> 어떤 작품이었나요?
시가 쓰인 일제강점기, 불안하고 두려웠던 시기의 우리민족의 ‘한’에 대한 이야기를 춤으로 풀었어요. 그러면서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 불안해하며 초조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안무를 했는데요. 발레와 한국무용의 호흡을 사용하다보니 한국무용적인 색채가 강했다는 평도 들었습니다. 우리의 ‘한’을 표현하기에는 한국무용의 호흡이 들어가야겠더라고요.
<오감도>를 하며 어떤 어려움을 느꼈나요?
시가 가지고 있는 느낌과 우리의 정서를 심플하게 생각했습니다. 많은 분이 표현이 명확하다고 좋아해주셨어요. 그러나 이번에 선보인 작품은 이미지로 전달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반 관객들은 지난 작품에 비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고 하시더라구요.
<오감도>에서는 저고리와 치마를 개량한 듯한 의상 등 한국적 요소가 보인 반면 이번 작품에서는 발레 튜튜를 반만 덧붙인다든지 의상 상체에는 옆모습의 사람 얼굴을 그려져 마치 무용수의 의상들 또한 ‘마주보면서’ 춤을 추는 제목에 부합하려는 시도가 느껴졌습니다.
반쪽짜리 튜튜를 덧붙인 것에 큰 의미를 둔 것은 아닙니다. 2막과 4막 작품의 반전을 위해서 사람형상의 그림과 눈을 의상에 그려넣었던 것이고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한 장면
발레단 기획으로 안무하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발레를 전공한 무용수들이 창작을 한다는 거 사실 힘들긴 합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장르에 비해 발레는 이렇다 할 안무가가 배출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안무자가 주는 동작을 받아 춤을 추다가 안무자로서 무대 조명, 의상, 연출, 주제선정, 안무, 무용수 섭외 등을 하는 게 힘들죠. 하지만 안무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 하고 싶습니다.
어떤 안무 주제를 선호하나요?
아름다운 발레 작품은 이미 너무 많습니다. 저는 관객들과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주제의식을 가지고 제대로 전달을 해야 하는 게 안무자의 몫인 것 같아요. 결국에는 작품은 안무가가 관객들에게 그 작품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잖아요. 대화를 하려면 모호한 낱말을 나열해서는 안 되고 이해시켜야 한다고 믿어요.
이상의 시 <오감도> 그리고 플라 톤의 ‘동굴’에서 비유한 이번 작품을 보면 책을 통해 주제를 선정하나 봅니다.
꼭 그렇진 않습니다. 단지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깊어지며 그것을 통해 춤으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용수로서 솔리스트라는 직급에 만족하나요?
네. 전 무대에 서는 게 꿈이었고 그 안에서 제 열정을 풀어냅니다. 그걸 못한다면 많이 힘들 것 같아요. 제가 맡은 역할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며 그 이상은 욕심을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저, 만족하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캐릭터로 출연을 하나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는 ‘ 고양이’, ‘카나리아’ 같은 새 역할과 <백조의 호수>에서는 ‘스페니쉬춤’, ‘세 마리의 백조’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는 ‘창녀’를 맡았어요. 감성적인 느낌은 충만하지만 그러기에는 테크닉이 부족한 것 같아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한 장면
안무작에 출연한 동생 슬기 씨가 안무에 조언도 해 주나요?
네. 동생이 출연을 하면서 제 작품을 더욱 빛내주는 것 같아요. 무용수들의 동작을 유심히 본 후 맞는 동작을 주는 편인데 슬기는 어떤 동작이던지 잘 해 내니까 여러가지 동작을 해보게끔 하고 거기에서 또 영감을 받아 만들어내기도 해요. 동작적으로 저는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선을 최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그들의 장점을 평소에도 유심히 관찰하죠.
안무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생각은 없나요?
안무는 공부를 해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는 무용이 아닌 다른 것들을 배워 작품에 응용하고 싶어요. 테크닉은 이미 많이 배웠다고 생각을 하구요. 예를 들면 수학이나 미술관 관람. 그래서 전시와 책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생각에 전환을 많이 합니다.
본인은 이번 작품에는 출연을 하지 않았지요?
네. <오감도>에 출연을 해 보니 안무자가 할 일이 너무 많더라구요. 조명도 봐야하고 구성, 또 무용수들의 움직임들을 끝까지 챙겨야하는데 제가 출연을 해보니 다 챙길 여력이 없더라구요. 안무를 하는데 이것을 개선해야겠다고 냉정하게 꼬집어 주세요. 집요한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안무를 하다가도 스스로에게 타협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면을 앞으로는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두 번째 작품에서 완성도가 향상되었다고 보시나요?
첫 번째 작품은 제가 안무를 하고 무대에 올리면서도 감격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번째 작품 <마주보다>에서는 플라톤의 ‘동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상 밖으로 뛰어나오는 인간들의 투쟁. 내 자신과 대화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세상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속안 깊숙이 들어가면 아름다운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추함도 거짓도 있음을 춤으로 표현했으나 관객들이 다소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스스로 작품을 풀어가는 방식에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봐요.
무용수로서의 언제까지 춤을 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용수로의 생활이 너무 행복합니다. 춤을 출 수 있는 시간까지는 춤을 추고 싶기 때문에 무대를 떠나는 건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네요.
박나리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졸
-2011 국립발레단 재입단
-2008 ~ 2010 싱가폴 댄스시어터 단원
-2005 국립발레단 단원
수상경력
-2005 동아무용콩쿠르 동상
-2005 일본 나고야국제무용콩쿠르 파이널리스트
-2004 중국 상하이 국제발레콩쿠르 파이널리스트
이수연(yeonemail@gmail.com)
춤과사람들
월간 <춤과사람들>은 무용계 이슈와 무용계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전문잡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