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과 함께 삶을 보듬었던 시간
제가 가장 간직하고 싶은 순간의 느낌 같은 것들이 제 지난 일기장이나 옛 사진첩이 아니라, 먼 이국의 옛 작가가 쓴 작품에 녹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2017.12.04.)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1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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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사회』의 저자로 잘 알려진 작가 정지우가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출간하며 독자들에게 ‘문학’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이상하게도 명석한 이성과 논리의 세계로 나아갈수록, 마음이 점점 허물어져 가는 것을 경험했고 한때 자신의 방에서 치워 버렸던 문학을 다시 채워 넣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끈질기게 품고 있던 질문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고민, 해명하고 싶은 삶의 순간들에 대한 언어가 필요했던 작가는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무참한 시간의 더께를 견뎌 온 작품들에서 그 실마리를 건져 올렸다. 소로의 『월든』, 그르니에의 『섬』, 카뮈의 『결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등 작가가 믿고 의지했던 열두 편의 작품과 함께한 삶의 기록이 『고전에 기대는 시간』에 담겨 있다.

 

첫 책인 『청춘인문학』부터 시작해 삶으로부터의 혁명, 『분노사회』,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등 이전까지 인문, 사회 관련 책을 주로 저술하셨는데 이번 책 『고전에 기대는 시간』에서는 왜 ‘문학’ 이야기를 하게 되셨나요?

 

사실 그동안 인문, 사회 분야의 책들을 써 오긴 했으나 제 원래 전공은 문학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방 안에 한가득 쌓여 있던 책들 역시 문학이 대부분이었고, 첫 책을 출간하기 전까지 주로 썼던 글들도 대부분 소설 혹은 에세이류였습니다. 하지만 관심 분야와 실제로 하게 되는 일이 늘 일치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뛰어난 창작자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개인적인 한계가 많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신 어느 순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꼭 ‘문학적인 무언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허구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첫 책을 출간했고, 의외로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자신감을 얻어, 쏟아 내듯이 몇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지만, 마음에는 쉬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제 청춘의 대부분이나 마찬가지였던 문학을, 단지 ‘개인적인 한계’ 때문에 방치해 놓는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슬슬 마감하게 되는 ‘청춘’이라는 것을 스스로 해명하기 위해서라도, 저 자신을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라도 문학을 마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문학작품들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지금까지 썼던 어떤 책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제 안에 가장 깊이 다다라, 이번 책을 썼다고 믿습니다.

 

이 책에 담긴 열두 편의 문학을 고른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요?


열두 편의 작품을 처음부터 골랐던 건 아닙니다. 제가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던 작품들, 혹은 어렴풋이 다시 ‘읽어야만’ 한다고 느낀 작품들을 다시 다 끄집어냈습니다. 몇 십 편 정도 되었는데, 그것들을 모두 다시 읽은 후 재차 선별했습니다. 기준은 제 삶과 가장 연결 고리가 많은 작품들, 다시 말해 제 삶을 해명하고자 할 때 기댈 수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책에 담긴 작품들 중에서는 아무래도 장 그르니에의 『섬』이나 알베르 카뮈의 『결혼』에 가장 큰 애착이 갑니다. 이 작품들은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언제 다시 읽더라도, 이 작품들 안에 담긴 무척이나 아름답고 고유한 세계를 다시 만나는 느낌이 듭니다. 숨 막힐 정도의 농도로, 어떤 빛 혹은 감각의 향연, 그리고 지성의 깊이가 응축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제가 가장 간직하고 싶은 순간의 느낌 같은 것들이 제 지난 일기장이나 옛 사진첩이 아니라, 먼 이국의 옛 작가가 쓴 작품에 녹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책의 서문에서 어느 시점에 방에서 문학을 모두 치워 버린 적이 있다고 하셨는데 당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묘한 일이지만, 문학의 세계에 몰두하면서 삶의 가장 깊은 진실에 가 닿으면서도, 동시에 실제로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유리되는 듯한 이중성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문학 바깥에서의 삶을 생생하게 사는 게 더 ‘문학에 가까운 삶’이 아닐까 싶기도 했던 것 같아요. 책 읽을 시간에 사랑이나 여행을 하고, 문학의 깊이로 파 내려가는 대신 다채롭고 표면적인 경험들을 누려 보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제법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냉담했던 신자가 돌아오듯, 결국 다시 문학을 찾게 되더군요. 삶의 다채로운 경험의 세계, 무언가 일어나고 복잡다단하게 진행되어 가는 인생은 자주 저를 지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문학작품을 다시 펼쳐 들고서, 저는 모든 게 되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모되거나 흩어지지 않는 깊이와 감각이 숨 쉬는 곳이 문학이었습니다. 지금은 점점 그런 문학의 위안을 가까이 두는 조화를 알아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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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젊은 청년들이 ‘직장’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작가님 또한 그러한 과정을 겪으셨고, 스스로 아직까지 “나는 어떠한 ‘계’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하셨어요. 작가님에게 ‘소속’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흔히 소속이란 자신이 속한 가족, 다니는 학교, 출근하는 직장 같은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어디에서도 그렇게 깊은 소속감을 느끼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들을 사랑했고,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분리되는 저 자신만의 세계라는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세계에서는 실제로 육성을 교환하는 사람보다는, 어떤 추상적인 존재들과의 접촉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오래전 작고한 어느 작가라든가,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환상 세계의 인물이라든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먼 땅에 내리고 있을 유성우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 묘한 세계에 대한 소속감이랄까, 혹은 그 세계를 만나는 감촉이랄까, 하는 게 유달리 강하다 보니, 현실의 소속이란 제게 그만큼 강렬하지도 공고하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런 ‘다른 세계’에 대한 소속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소속감을 지키고자 끊임없이 읽고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이쪽 세계보다는 그런 다른 세계의 시민이라 더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평생 지켜 낼 수 있다면, 더없이 흡족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작가님의 아주 내밀한 이야기들도 가감 없이 담겨 있는데요.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그런 독자와의 연결이 주는 위안이 궁금합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내밀한 이야기들만 하더라도, 주변 친구들을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늘어놓기는 곤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내면은 복잡다단하고 여러 깊이를 지니고 있겠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도 온전히 다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굳이 찾아 읽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채널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채널이 서로 맞기란 쉽지 않지만 세상 전체를 뒤지다 보면 또 결코 적지만은 않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접속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글쓰기란 어쩌면 저와 ‘채널이 맞는’ 사람들을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서 악수하고 눈빛을 교환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세상 어딘가에 있는, 나의 또 다른 조각 같은 사람들을 찾아 나가는 여정을 언제까지고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큰 위안을 얻습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 깊습니다. 정지우에게 서른이란?


저에게 서른은 이상한 한 해였습니다.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그래도 하나의 강물처럼 이어진다면, 서른만큼은 동떨어진 하나의 ‘섬’처럼 남아 있습니다. 서른 이전에 저는 십 년이 넘도록 매일같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해에는 거의 쓰지도, 읽지도 않았습니다. 타고 있던 배는 잃어버린 채, 외딴 섬에 정박하여 쏟아지는 현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한 해였다고 해야겠지요. 이미 취직하고 결혼하여 자리를 잡아 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저 또한 더 늦기 전에 그런 ‘일반적인 삶’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 해 동안은 부지런히 다른 현실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 영향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제 삶에 여러 변주를 주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읽고 쓰는 일은 되돌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서른의 충격이라는 게 저에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청춘, 언제까지고 그저 읽고 쓰는 일만 하면 된다고 믿었던 나날들은 어떻게 보면 늘 달콤한 디저트만 먹는 시간 비슷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식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어떻게 하면 앞으로 주식과 디저트를 골고루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청춘’은 언제나 힘겹습니다. 청춘에 관한 책으로 저술 활동을 시작하셨고, 또 한 시절을 넘어 이 책에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담으셨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주세요.


‘청춘’이라는 말은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버리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저마다의 청춘들이 각자 너무나 다양한 삶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라, 제가 나서서 무어라 한 마디 하기는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돌이켜 보자면 청춘을 통틀어 제게 남은 것은 진실로 ‘몰입’했던 순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따라가다 보면, 저마다의 청춘이라는 게 그 나름대로의 궤적을 그려 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때의 몰입이라는 게 단순히 무언가를 소비하고 마는 종류의 일이라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집요하게 무언가를 생산하고자 했던 날들, 그로써 내 안의 무언가를 쌓아 올렸던 날들만이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합니다. 이때 생산이란 반드시 실용적인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제 안에 숨어들고 싶던 날들을 이겨 내고 혼자 떠났던 어느 여행길에서, 저는 새로운 감각들 속에서 제 자신을 생산했습니다. 그 감각들을 고스란히 글로 옮기면서 말이죠.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이든, 영화든, 일이든 그런 것들이 주는 무언가를 붙잡고 그것 자체가 저 자신의 생산적인 무언가로 승화되길 바랐습니다.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투쟁했던 날들은 결코 후회를 남기지 않습니다.

 

 


 

 

고전에 기대는 시간정지우 저 | 을유문화사
내가 읽었던 고전을 다른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삶에 적용하는지 궁금했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고전 읽기의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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