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름다움’의 어원이 ‘앓은 다음’임을 아시나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란 어쩌면 삶의 비밀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낙천주의자의 기원을 상상하며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어봅니다.
글: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202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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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낙천적인 아이』

원소윤 저 | 민음사

 

‘미래’를 떠올릴 때 비관주의자가 그곳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과 절망부터 가늠해 보는 사람이라면, 낙관주의자들은 기대와 희망부터 짐작하는 사람이다. 이들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몰이해의 강이 흐른다. 실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기엔 비관이 더 적합한 태도라고 믿는 태생적 비관주의자로서, 나는 낙관주의자들을 경계해 왔다. 실은 내심 깔보기도 했다. 왜냐하면 비관이 세계의 진실에 더 가까운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원소윤의 소설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고 나서는 좀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비극에서 웃음을 발견해 내려면 얼마나 지극한 사랑이 필요한지 알 것도 같아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관주의자 역시 그런 사랑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결국 우리는 습자지의 앞면과 뒷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꽤 낙천적인 아이』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뒷면의 표정, ‘낙천주의자’의 기원에 대해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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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먼저 도달하는 정보들이 있다. 나를 비롯해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의 작가인 원소윤을 유튜브에서 보았을 것이다.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한 쇼츠 영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의, 채식을 실천하는 코미디언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유머는 고도로 맵싸하고도 지적이다. 영상 속 그의 농담을 한 번이라도 마주친 사람이라면 검색창에 ‘원소윤’을 입력해 그가 나오는 모든 영상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농담’에는 놀라운 마력이 있다. 

 

하지만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고 나면 영상 속 유머는 그가 가진 재능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며, 품고 있는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엔 코미디 무대만으론 충분치 않았으리란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짐작하게 된다.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란 어쩌면 삶의 비밀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책은 자전적 성장소설의 꼴을 한다. 성장소설의 성패는 화자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는데, 그런 점에서 『꽤 낙천적인 아이』에는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설정들이 몇 개 있다. 신실한 가톨릭 집안의 블루칼라 노동자 부모 밑에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된다는 그의 궤적이 우선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탄생한 집안에 드리운 종교적 아우라는 이 소설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할아버지 치릴로와 할머니 소피아, 그들의 딸 로무알다와 사위 로무알도는 우리네 평범한 가족의 구성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름(세례명) 덕에 어쩐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속 인물 같은 느낌을 준다. 동시에 전국 공사현장에서 80미터 높이의 타워크레인을 운전하고 환갑이 되자마자 가족의 얼굴 타투를 몸에 새겨넣는 테토남 아빠 로무알도,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상담 봉사에 꾸준히 나가면서 어쩐지 그곳의 흉악 범죄자들에게 남편의 주거지와 신상 정보를 구체적으로 알리는 엄마 로무알다 등, 소윤의 서술을 통해 묘사되는 그들은 마치 시트콤의 등장인물처럼 좌충우돌 우당탕탕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이처럼 독보적인 ‘설정’은 사실 신이라는 존재에 의탁하지 않고서는 헤어나올 수 없었을 상실에 근거하고 있다. 소윤과 오빠가 태어나기 전, 엄마 아빠는 그들의 세 살 난 아기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리고 이들의 슬픔과 신앙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마리아(소윤)은 자신이 ‘죽은 아기의 죽음에 근거해 태어났다’는 까닭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소윤은 바닥을 구르며 “지금 여기 만두가 다섯 개 있어. 그러면 나한테 몇 개 줄 거야?” 라고 외치며 독점적 사랑을 갈구하다가도, 매년 아기의 기일마다 넋을 놓는 엄마가 혹시라도 사라질까 쉬는 시간마다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아이가 될 수 밖에 없다. 부모가 다시는 상처 입지 않도록 선생님으로부터 “소윤이는 무인도에서도 살아남을 아이예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모범생이 되고 마는 소녀를 떠올리면,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 애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고 그 애가 쓰는 모든 편지에 정성스레 답장을 해주고 싶어진다. 

 

불가피한 조숙의 상황 가운데서도, 소윤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질을 길러나간다. ‘아침 경건회 활동’으로 시작되는 미션스쿨 고등학교, ‘비극도 낭만도 없는’ 고시원에서의 생활, 결국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마는 직장을 거치면서도, 소윤은 결코 농담의 미학을 잊지 않는다. 거의 공격적으로 느껴질 만큼 시끄러운 고시원의 세탁기에 잠을 설치지만, 고시원 거주자 50여 명의 빨래를 처리하기 위해 주말 반납 매일 13시간을 일해야 하는 세탁기의 노동에 자신의 배스킨라빈스 아르바이트를 겹쳐볼 줄 알고, 그에게 ‘(고)탁기’라는 이름까지 붙여 다정하게 호명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소윤이다. 

 

소윤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어떤 슬픔과 사랑 가운데서 자라 어른이 되었는지 새삼 떠올려보게 된다. 누추해 보이는 풍경도 톺아보면 그 안에 올올이 우정과 사랑이 박혀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소윤이 대학에 가서 만난 연인이다. 수학교육과 학생인 그는 소윤이 술자리에서 들려준 ‘어릴 적 만두 일화’를 기억해 두었다가 리포트에서 “사과 5개를 가지고 있는 소윤이가 사과 3개를 더 받으면 사과 8개를 가지게 된다”고 예시로 활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소윤의 농담에 귀 기울이고 그 안에 담긴 마음을 곱씹어 보는 사람ㅡ “사랑으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존재. 그런 사랑 덕에 소윤은 ‘꽤 낙천적인 아이’로, “‘아름다움’의 어원이 ‘앓은 다음’임을 아는” 아이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두는 사람으로.

 

고통의 승화라고요, 웃음으로 눈물 닦기라고요. 저는 모르겠어요. 그냥 세상 많은 것이 영원히 끔찍해요. 아무리 농담해도 가벼워지지 않는다고요. 승화가 안 돼요. 눈물이 안 닦여요. 어쩌면 그래서 농담을 해도 되는 거겠죠. 아무리 농담해봤자 고통을 감히 가볍게 만들 수 없으니까(…) 세상의 고통에 농담이 대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겠어요, 적어도 제 삶의 고통은 농담으로 치유되지도, 훼손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농담의 기능에 어떤 기대도 품지 않고 그냥 다 포기하고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두는 거, 저는 이 방식이 좋아요.” (254~255쪽)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으며 나는 우리가 서로의 농담에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비열하고 비정한 세상에 실망한 다음에도, 우리는 서로를 보며 깔깔 웃을 수 있다. 웃음으로 서로를 어루만져줄 수 있다. 슬픔은 나누면 절반,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나. 태생적 비관주의자라도 이런 소설을 만나면 개종되기도 하는 법이다. 이제 나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아름다움의 어원이 왜 앓은 다음”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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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한국일보 기자)

199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영상학을 전공했다. 발표된 적 없는 소설과 상영되지 않은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2016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