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간의 사랑은 행복의 원천이기도 비극의 원천이기도 하다. 누구나 서로 엇갈리는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좌절과 아픔을 겪는다. 사랑은 또한 변한다. 사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치관도 변하고 라이프스타일도 변하기 때문에 사랑하던 파트너가 어느 순간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걸림돌이 되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도 변하고 파트너도 변하니 결국 인생의 길이 달라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특히 경제력이 취약한 여성들에게는 어떤 남성과 결혼하느냐에 경제적 계급과 사회적 지위가 달려 있다. 일상을 함께 하며 독점적인 사랑과 성을 공급해줄 파트너를 정하고, 경제적?사회적 지위마저 결정짓는 결혼은 일생일대의 도박인 셈이다. 워낙 판돈이 큰 도박이니 결정 장애가 따르게 된다. 결혼을 안 해도 목구멍에 풀칠은 할 수 있게 된 현대 여성들의 상당수는 결혼을 유보하거나 안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발적으로나 비자발적으로 결혼하지 않는 남성들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이혼 후 재혼할 생각이 없는 돌싱도 많다.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성을 즐기며 모계 가족이 공동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모쒀족 사회는 오래 전 한 잡지의 여행 섹션에 실린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이것이야말로 사랑, 성, 자녀양육의 딜레마를 해결해줄 최상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에 해외도서들을 검토하다가 이 책(원제 The Kingdom of women)을 발견하고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딱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면 선택이 어렵지만 10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만큼 누구나 선택하고 선택받기 쉬워지기 때문에 거절과 실연의 아픔, 또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을 고통 속에 보낼 이유가 적어진다. 특히 모쒀족 방식의 양육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 이상적이다. 우리 사회는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이혼율이 급증했고, 이제는 결혼을 하지 않는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결혼제도의 퇴조는 뚜렷하며 유럽의 경우 혼외출산율이 절반을 넘어섰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혹은 이혼을 하면 어떻게 가족을 이루어 살아야 할까? 아이들은 어떻게 낳고 키워야 할까? 가족의 개념을 재정립해야 할 지금, 모쒀족 사회는 더욱 현실적인 대안으로 다가왔다.
이런 종류의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홍보하는 과정은 정치 캠페인과 비슷하다. 개개인의 먹고사는 문제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의미 있는 아이디어와 콘텐츠를 이슈화해서 널리 퍼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세를 형성하려면 먼저 그 콘텐츠의 가치를 보증해줄 전문가 집단과 열렬한 지지자들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각 타겟 집단에 친숙한 사람이 친숙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이 콘텐츠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볼 사람은 누구인가? 이 책의 타겟 독자에 대한 영향력이 큰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들의 입을 트이게 해줄 언어를 탐색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를 집필, 단숨에 페미니즘 저술가로 주목받게 된 이민경 작가의 약력에서 통번역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는 내용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이런 식의 섭외는 맨 땅에 헤딩하기일 때가 많지만, 이민경 작가는 흔쾌히 번역 의뢰를 수락했다. 번역을 의뢰할 때는 몰랐지만, 이민경 작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2012년 대학 수업에서 모쒀족의 가모장제 모계사회에 대해 알게 된 것이 훗날 이성애 결혼을 거부하고 비혼으로 살아갈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모쒀족에게서 큰 힘을 얻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두 명 입양하여 모계 가족의 도움을 받아가며 양육하고 있는 나는 부계사회에서 모계가정을 이루어낸 셈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결심한 건 아니었지만, 비혼 모계가정이 나에게 무척 자연스러웠던 건, 분명 젊어서 모쒀족의 모계사회에 대해 알게 된 덕이 크다. 비혼이 유독 많기로 유명한 출판계에서 여러 지인들이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심지어 부러워했다.
이민경 작가는 꼼꼼하고 성실하게 번역을 완성하는 한편, 그 자신이 이 책의 ‘보증인’이 되어 주었기에 출간 전 원고를 리뷰하고 추천사를 써줄 다섯 분의 ‘의인’들을 모을 수 있었다. 문화인류학자 김현미와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 책의 내용적 가치를 보증해줄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대중문화 영역에서 인지도가 높은 이다혜 기자와 위근우 칼럼니스트, 청춘들에게 인기가 높은 서늘한여름밤 작가는 주저하는 대중을 이 책으로 이끌 믿음직한 안내인이었다.
두 아이를 입양하는 과정에서 접한 입양 관련 자료들을 통해 아이들에게 모쒀족의 모계사회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왜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아이들은 태어날 때 축복받지 못하는가? 왜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능력이 인생을 망치는 저주가 되어 버리는가? 모쒀족은 연애와 가족을 분리시킴으로써 자유연애와 안정된 가족을 모두 성취했다. 우리나라에서 동거와 결별, 결혼과 이혼으로 가족이 생기고 깨지고를 반복하는 반면, 모쒀족 사회에서 연애와 섹스는 생활의 활력소일 뿐 모든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속한 모계가정에서 이모들과 삼촌들, 할머니와 할머니의 형제들의 넘치는 보살핌을 받으며 평생 안정된 생활을 누린다. 물론 어떤 이들은 태어난 모계가정이 굴레로 느껴져 벗어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정상가족이란 없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한 최선의 가족을 이룰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널리 알려져 삶의 기로에 서서 갈등과 고민을 거듭하는 많은 청춘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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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나라추 와이홍 저/이민경 역 | 흐름출판
최첨단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성공한 변호사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중국 오지의 모쒀족과 가족이 되어 6년 넘게 거주하면서 모쒀족의 세계를 철저히 탐색하고 체험한 페미니스트의 여정을 그렸다.
백지선(흐름출판 편집자)
키치
2018.07.15
보랏빛향기
2018.07.11
스크랩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