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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바꾸기보다 나를 둘러싼 공간을 바꾸는 게 훨씬 효과적인 심리치료라고 나는 믿고 있다.
글ㆍ사진 김병수(정신과의사)
201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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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몇 년 전에 짧은 원고와 작가 프로필을 함께 써서 보내 달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내 소개 글에 아우스게일의 를 틀어 놓고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 반짝 빛나는』 을 읽고 있을 때 행복해진다고 적었다. 하지만 편집자는 이 짧은 내 취향 이야기를 쏙 빼버렸다. 내가 편집자라도 삭제했을 것 같기는 했다.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음악과 소설의 조합이고, 정신과의사에게 청탁한 글에 이따위 소개를 적었으니 담당자가 좋아할 리도 없었을 테니. 어찌 되었건 내가 아우스게일의 음악을 사랑하고,  『반짝 반짝 빛나는』  이 좋아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는 건 사실이다. 이번 여름휴가로 아이슬란드에서 일주일을 보냈는데, 레이캬비크 시내의 음반점 <12 Tonar>에서 무지개 같은 선이 아우스게일의 얼굴을 따라 그려진 음반 표지를 보고 있으니 지워져버렸던 내 소개 글 일화가 생각났다. 아, 이렇게 멀리 와서 활자화되지도 못 했던 썰렁한 에피소드가 다시 생각나다니.

 

를 틀어 놓은 채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나 지평선이 보이는 길 위를 운전하고 있는데, 후두둑 후두둑 비가 자동차 앞유리를 때렸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는 이 음악 속에서 흘러나오는 두둥거림이 노래 제목처럼 세차게 흐르는 격류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말발굽 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다. 아이슬란드의 광활한 녹초지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말들을 보니 반복된 비트를 말발굽 소리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본 아이슬란드 말들은 제대로 뛰어다니지 않았다. 어슬렁거리며 걷거나 술렁술렁 풀을 뜯고, 심지어 배를 보이고 누워 있는 말도 종종 보였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을 잘 통제하기 위해서는 억압이 아니라 자유를 주면 역설적으로 통제하기가 더 수월해진다는데, 아이슬란드 말들의 행태를 보니 이 이론이 딱 들어맞았다.

 

일 년에 한 두 번씩 해외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는데 20,30대 때는 쇼핑가를 헤집고 다니며 시간을 다 써버렸고 사십을 넘기면서부터는 자연 속에서 트래킹하는 시간이 늘었다. 내년 여름에 다시 한 번 더 아이슬란드 여행을 하고 싶어졌는데, 그 이유도 란드마나라이거에서 출발하는 4박 5일짜리 트레킹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보고 싶어서이다. 이번 휴가 때는 이곳에서 하루 일정의 트레킹 밖에 하지 못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상상해보지 못했던 다채로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녹색 이끼와 기묘한 돌들 사이를 걸어 들어가 유황 연기가 나오는 둔덕을 지나면, 주황색과 회색빛이 오묘한 비율로 섞여 있는 돌산들을 옆에 끼고 걷게 된다. 눈과 얼음이 덮인 둥글둥글한 산들이 어깨동무하고 모여 있고, 그 사이 길을 뚫고 걸으면 길고 넓은 빙하가 나타난다. 하나의 트레킹 코스에 로맨스, 액션, 멜로, 다큐멘터리 영화가 합쳐져 있었다. 등산화가 밟은 돌이 이러저리 튀기도 하고, 푹신한 카페처럼 펼쳐진 녹초 위를 붕붕 떠다니기도 하고 갑자기 쏟아진 비가 흙 길을 사라지게 만들어 물속을 첨벙첨벙 걷기도 했다.

 

그렇게 란드만나라우가의 자연 속에 있다가 한낮 같은 저녁이 되어서야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누가 보든 말든 주차해둔 차 뒤로 숨어 들어가 등산복을 벗고 수영복을 입었다. 그리고 노천 온천으로 뛰어들었다. 연못 같은 둥근 물속에는 영국 고등학생들이 모여 앉아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고, 온천이 바로 흘러드는 뜨거운 물 앞에는 말없는 서양인 남녀가 허공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시내처럼 온천물이 스며드는 구석에 앉아 머릿속으로 를 리플레이해서 들었다. 그리 앉아 있으니 이 참에 비까지 쏟아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파란 하늘을 보며 비를 맞고 싶어졌고, 하니 어린 시절 외갓집 텃마루에 앉아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이는 듯했다. 비만 오면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옷도 갈아입지 않으려고 떼를 쓰던 어린 시절도 보이고, 학창 시절 시험을 망치고 일부러 비를 맞으며 걷던 모습도 떠올랐다. 다니기 싫던 피아노 학원을 빠진 뒤에 놀이터에서 몰래 놀다가 비를 맞고 나서 피아노 학원에 간다고 거짓말했던 게 들통 났던 일화도 생각났다. 일요일 오후 늦게 비가 내리면 괜히 우울해졌던 사춘기 시절의 그 감정도 느껴졌다.

 

이렇게 멀리 떠나와서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게 되니 울퉁불퉁했던 여러 가지 모양의 자아에게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었다.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12시간을 날아와서 포장도로를 타고 3시간, 오프로드를 2시간 가까이 달려 찾아온 이곳에서 내가 떠나온 곳과 의식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다니. 역시 인간이란 존재는 아이러니투성이구나! 떠나고 나서야 떠나온 곳을 그리고, 떠나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 보게 되는구나. 뿌리를 뽑아 들고 멀리 날아와서야 나를 만든 뿌리를 쫓아 마음으로 파고들고 있으니.

 

마음을 바꾸기보다 나를 둘러싼 공간을 바꾸는 게 훨씬 효과적인 심리치료라고 나는 믿고 있다. 심리치료를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마음은 원래 잘 바뀌지 않게 구성되어 있다. 레고 블럭처럼 쉽게 분해했다 새로 쌓을 수 없다. 나란 사람을 재조립하는 데에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설계도도 제대로 없다. 무엇보다 도대체 완성본이 어떤 모양인지 정확히 알기도 어렵다.

 

하지만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 내가 만지는 것, 내가 느끼는 향기를 바꿔보면 그것에 감응해서 나란 사람도 변한다.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화선지에 물이 젖듯 서서히 변해간다. 이런 변화가 진짜다. 의도하고, 계획하고, 억지로 꾸미기보다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런 변화의 흐름을 따르며 공명하듯 변해가는 것이 진짜다. 그래서 우리는 갑갑한 이코노미 좌석을 견디며 비행기를 타고, 눈을 밝혀주는 새로운 광경을 찾아 졸음을 이겨가며 장거리 운전도 마다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찾기 위해서, 나를 바꾸기 위해서.

 

 

 


 

 

반짝 반짝 빛나는에쿠니 가오리 저/김난주 역 | 소담출판사
자칫 지리지리 어둡거나 피터지는 사랑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녀만의 독특한 서정성과 문체로 우리에게 투명한 사랑 이야기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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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