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구름 좀 봐.’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멈추고 혼잣말했다. 정말, 누구라도 봐야 할 구름(들)이 하늘에 떠 있었다. 구름은 높고 파란 하늘에서 변화무쌍하며 거창했다.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그 느린 움직임을 따라 먹고사는 생활의 속력을 가늠해보기도 하고, 계절의 순환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유한한 존재가 아닌가, 지난여름의 ‘헐레벌떡’을 소란스러웠노라, 되돌아보기도 했다. 구름을 쓱 보았을 뿐인데 사무의 공간이 돌연 사무적이지 않은 공간이 되었다.
그곳에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재미란 게 있다. 교실에서 만화책 읽기, 사무실에서 하는 인터넷 서핑, 남편이나 아내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무한 도전에는 대결의 묘미가 있다.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사이의 쫄깃한 긴장감은 숨바꼭질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런가 하면 그 시간에 해야 의미 있는 짓도 있다.
환절기만 되면 이불 가게 앞에 잠시 발길을 붙잡아두거나, 오래 사용해서 빨갛게 김치 물이 밴 밀폐 용기를 한꺼번에 버릴 생각, 칙칙한 암막 커튼 대신에 계절의 감수성이 묻어나는 직물을 찾아보는 일은 시간에 발맞췄으므로 더 의미 있다. 계절에 적응하는 것은 몇 달 동안 익숙했던 내 생활의 인테리어를 바꾸는 재미난 일이다.
가을이 돌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찬물을 끼얹으며 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미지근한 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잠자리에 든다. 그때 느끼는 맨발의 개운함은 여름의 그것과는 다르다. 여름의 맨발은 원초적인 것에 가까워서 감각적인 차원에 들지 않는다. 여름의 맨발은 둘 중 하나. 덥거나 시원하다. 이분법에 가깝다. 가을의 맨발은 어떤가.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이 부는 밤바람을 느낄 수 있고 그걸 감각할 수 있는 덕에 가을이 보내는 신호에 맞춰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도 있다. 그렇게 누워 있다 보면 어느새 한 사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게 된다. 생각 속에 떠오른 그 얼굴은 이미 나와 만날 수 없는 먼 사람의 것인데도, 피를 따뜻하게 할 정도로 가깝게 느껴진다.
가을의 맨발은 덥지도 시원하지도 않다. 미지근하다. 미지근한 감정으로 한쪽 발등에 다른 발바닥을 올려놓고 자문하게 된다. 그때 나와 그 사람은 왜 멀어졌던 것일까…. 가을에는 만남의 이유가 아니라 헤어짐의 연유에 골몰한다. 그게 가을에 하는 짓 중에서 가장 쓸모 있는 짓이다. 모든 헤어짐은 가을이 옳다. 왜냐하면 가을에야말로 우리는 생각의 울타리를 쌓는 인간이길 포기한 채 네 발로 사색의 초원을 서성이기 때문이다. 잠들기 때문이다.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의 「가을」
여름밤엔 보지 못했던 사람을 가을밤에는 보았다. 꿈에서 멀리, 더 멀리 다녀왔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이모를 만났다. 이모와 나는 한적한 해변에 앉아서 파도를 보며 대화를 나누었고―대화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화하는 장면이 그 자체로 대화 같을 뿐―그걸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나는 이모와 내가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해변에 홀로 남겨진 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눈을 뜨니 가을 아침이었다.
이모가 꿈에 보이면 엄마에게 전화해 소식을 전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모 얼굴이 보였노라 말하지 못하고 안부를 물었다. 날이 선선해지니 살겠다며 가을 된장을 담아 보내겠노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있자니 지난밤 엄마의 꿈자리도 미지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겹쳐 들었다. 이모가 좋아했던 ‘언니의 꽃게 된장찌개’는 지금도 여러 자식과 친지들의 심금을 울리는 맛인데….
파도가 제철일 때 해변을 찾는 일과 구름이 제철일 때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유난히 발이 찬 사람과 제철 꽃게를 푹 쪄 먹는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꿈에서도 자연히 하던 일을 멈추고 오랫동안 침묵이라는 해변을 거니는 사람이 되는 일이 사실, 가을이다. 맨발로, 네 발로, 생각을 켜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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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저 | 창비
그의 시는 손등에 와닿는 햇살처럼 따사롭고 옷깃을 스치고 가는 바람처럼 쓸쓸하다. 그의 시의 미소 속에는 천진하게 웃고 있는 깨달음의 경계가 번득인다.
김현(시인)
찻잎미경
2018.10.08
멋진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