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을 읽다
[나이듦을 읽다] 말년성 개념을 지극히 범속하게 만들기
나이든 삶의 모습을 책을 경유해 다양한 측면으로 상상해 보는 리뷰 시리즈 ‘나이듦을 읽다’. 김영옥 작가가 전하는, 말년성에 대한 67세 초짜 노년 여성의 한 견해.
글: 김영옥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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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애 단계가 그렇듯 늙어서의 삶도, 살다 보니 살아지는 삶이기도 하고, 어떻게든 살려고 애써서 살아내는 삶이기도 하다.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우리는 늙은 해녀와 젊은 피디가 33년의 나이 차이를 끌어안고 빠져드는 그 특별한 사랑의 배경이 “살암시민 살아지매”와 “살아보젠”임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목숨 내건 물질 하나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의 삶과, 4.3 사건 등 잔혹한 역사적 시간을 살아내야 했던 도민들의 삶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이와 등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죽음을 껴안고 사는, 살아내야 하는 노년기의 삶 또한 혹독하다. 혹독한 만큼 치열함과 가벼움을 동시에 요구한다. 

 

이제 ‘겨우’ 67세인, 초짜 늙은 여자인 내 경우만 보더라도, 당장 하루의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다. 꼭 빈속일 때 먹어야 하는 갑상선약을 먹고, 3가지 안약을 차례차례 눈에 넣는다. 눈물샘 문제로 이미 두 번이나 눈 수술을 받았는데, 3번째 수술? 당연히 피하고 싶다. 다음은 아픈 허리 근육을 강화하기 위한 브릿지(Bridge)와 버드 독(Bird Dog), 데드 버그(Dead Bug) 운동. 손가락 관절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파라핀 치료가 그 뒤를 잇는다. 1주일에 한 번은 골다공증약을 먹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복용해야 할 날이 지나고 나서야 문득, 그야말로 문득, 떠올리곤 자책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늘 시름시름 앓는 사람인데도 이 모든 ‘수행’은 여전히 조금 억지스럽다. 이게 뭐람, 학습 능력이 이렇게 떨어진다니, 이래서야 늙어감의 기나긴 ‘하강’ 여정을 제대로 해내겠나, 츳. 

 

사소하고 하찮아 보일 수 있는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는 건 ‘늙어가는 사람, 어떻게 사는가/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추상적 명제 차원이 아닌, 땅 위에서의 포월(匍越)’로1 접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늙어감 자체든, 노년이든, 노년기든 소외시키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탐구한 ‘말년의 양식’ 또는 ‘말년성’을 사선(斜線)으로, 사시(斜視)로 불안정하게, 불규칙적으로 읽는다. 말년성은 분명 매우 흥미로운 개념이다. 특히 나같이 노년의 삶이나 노년기의 특이성을 시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는 의미 있고 쓸모 있는 분석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맛보게 되는 것엔, 인식이나 삶 차원에서의 지평 확장뿐 아니라 어떤 한계, 그리고 소외도 있다. 바로 이 추상적 명제적 차원의 편협함/고지식함 때문이다. 그가 이 개념을 얻어온 아도르노의 경우와는 달리, 사이드 자신은 분명 이 개념의 의미가 ‘지금 여기의 나’를 응시하고 있는 죽음의 존재와 무관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몸의 생리학적·사회문화적 삶이 대면해야 하는 하강의 경험은 별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글렌 굴드처럼 라이브 연주의 세계에서 물러나 음반 작업에만 몰두함으로써 한창 활동할 때 이미 ‘사후적’이라는 특성을 얻은, 그렇게 자신만의 말년성 형식을 창조한 예술가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말년성과 죽음의 연관성은 완전히 삭제되기 어렵다. 이런 면에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학과 예술』이 탐구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왜 모두 남성인지 묻는 것은 타당한 비판적 태도다.


 

말년성(lateness)이라는 단어에서 근간이 되는 늦다(late)는 시기가 지난 것, 생명을 다한 것, 때를 놓쳐 버린 것, 너무 늦은 상태 등을 의미한다. 늦저녁, 늦가을처럼 정확한 시점을 표현하는 표현들도 있지만 시계라든가 달력이 요구하는 식의 정확성은 여기에 없다. 말년성은 시간과 관련된 한 가지 관계만을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다. 시간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그것은 항상 ‘시간을 일깨워 흐르게 한다.’ 이게 핵심이다. 예를 들어서 베토벤의 말년 작업을 두고 아도르노가 말하는 ‘파열된 풍경’에서는 죽음이 굴절된 양식으로 드러난다.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 노쇠나 죽음의 직접적 결과일 수는 없지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술가의 의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에 반영된다. 청력을 잃었고, 노쇠했고, 소외된 늙은 남자 작곡가 베토벤이 이렇게 작곡했다, 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시의성(timeliness)의 반대급부인 말년성의 대표적 속성이 시대착오라고 할 때, 그것이 오로지 뛰어난 어떤 단독자의 자발적 선택일 수만은 없다. 예술가의 말기 작업을 두고 성숙함이나 완숙함, 혹은 조화와 해결의 면모를 기대하는 게 통상적이라면, 시대착오나 난국, 비타협이나 풀리지 않는 모순 등으로 나타나는 말년성은 분명 이어지는 여러 질문을 촉발하는 ‘문제’다. 오래전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모두 비극적 추락의 낙차가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컸기 때문에 그토록 비극적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비극적 추락을 경험할 수 있다. 여자라서, 장애인이라서, 성소수자라서, 초과 체류 이주노동자여서, 난민이어서, 홈리스라서 원치 않아도 시대착오적, 즉 시의적절함으로 요약되는 시대정신과 어긋나는 불화의 삶을 산다. 나처럼 늙어가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기에는 너무 빠른 사회경제적·기술적 시간 체계 속에서 시의성은 내게 기만적이고 허풍이 센 과대광고의 일부다.

 

물론 인문철학의 계보에서 시대착오는 니체의 ‘비시의성(Unzeitgemässigkeit)’과 연결되고, 각종 권력과 결탁한 시대/시대정신과 의식적으로 불통, 불화하니 정치적·예술적 망명의 형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사이드가 잊지 않고 언급하듯이 망명자도 어딘가에 산다. "현재 속에 거주하지만 묘하게 현재에서 벗어나 있다."(『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16쪽)는 사이드의 말을 나는 “현재에서 벗어나 있지만 묘하게 현재에 거주한다.”로 바꿔 읽는다. 용인된 것, 정상적인 것을 넘어서서 살아남는다는 생각 안에는, 그 넘어섬 또한 세상의 흐름을 살아내는 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포함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년성에는 비극적 측면만이 아니라 유희적인 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 반전을 이끌어내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망명이든 불화든 시대착오든, 누구와 함께 어디서, 그리고 어디를 향해서인가? 

 

사이드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예시로 들면서, 일상의 압력에서 벗어나 "방종과 재미와 사치를 무한정 추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때, 나는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의 저자 사노 요코의 말년을 떠올린다. 암이 전이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자마자 외제 차 매장에 들어가 재규어를 사는가 하면,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시간을 특유의 가시 돋친, 그러나 ‘화사함’을 잃지 않은 냉소로 소비하고, 죽음보다 더 지독한 통증의 몸으로도 즐거움과 사적 자유를 누린다.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어버렸다. 그런 눈은 온갖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탐욕스럽게 번들거린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죽는 게 뭐라고』, 50쪽) 같은 통찰도 책 곳곳에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죽음으로 편안하게 이행하려면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시간에 천착해 보자면, 시간은 시의성(timeliness)과 비시의성(Unzeitgemässigkeit/lateness) 사이에서 동요한다. 시간은 언제나 어긋나 있다(골절 상태다out of joint). 그러니 망명한다고 해도 그 망명의 영토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예술에서나 삶에서나 적절한 때가 존재한다는 가정에 토대를 둔 게 시의성의 개념이다. 시간에 맞게 늙어 가는 게 시의성이라면, 이때의 ‘시간에 맞게’는 강요된 합의, 강제된 정상성이다. 그렇다면 아도르노나 사이드가 주목하는 저 ‘위대한’ 남성 단독자 주체인 예술가나 비평가가 아닌 범속한 너와 나, 늙고 병들고 아프고 (고독이 아니라) 외로운, 빈곤한, 잃을 게 없는 노년들은 어떻게 늙어가야 하나? 이들에게 ‘시대정신과 불화한다’는 저 멋지고 웅장한 삶의 태도인 말년성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나? 아도르노 자신이 시도했듯이, 용인될 수 없는 긴장과 고집으로 어떻게든,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다른 어떤 규범이나 제도도 아닌, 바로 저 '상처받은 삶에서' (『미니마 모랄리아』) 미래/세대에 책임지기 위한 성찰을 해 나가는 것이리라.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한다. 말년성 개념이나 담론에 은근히 숨겨져 있는, 아니 노골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조건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직시하면, 그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는 많은 이들이 사실은 나름의 말년성을 구현하며, 시간을 일깨워 흐르게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교육받고 훈련된 고도의 성찰성이 있어야 하고,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전문성은 돈 버는 생계를 벗어나 활용하는 여유가 있어야 하고, 각종 규범의 좁은 현실 타협주의를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안목이 있어야 하고, 문화 예술을 비롯해 탁월한 언어 능력을 갖춰, 절대 자신을 누군가가 대리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등등의 어떤 수준을 요구하면서, 말년성을 마치 특정인만이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정치적·도덕적 자산인 것처럼 으스대는 거야말로, 시대착오성을 배신하는 반시대착오적 시대착오 아닐까.

 

말년성이 그 안에 말년의 삶의 국면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꼭 예술 작품에서뿐 아니라 삶의 국면에서도, 저자들이 요청하는 비타협의, 저항하는, 난국을 숨기지 않는, 부조화의 얽힘을 통해 우리가 책임지고 준비해야 하는 미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미 몸으로, 실존적 양태로 제시할 수 있다.

 

현재에 대해 비시의적인, 심지어 파국적 평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상처받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해 서로 몸을 돌리고 성찰을 엮는 것, 말년성이 집단적 형태를 띨 수 있게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말년성 지위‘의 시작이자 보상일 것이다. 늙어가는 사람들이 얻고 싶은, 선택하고 싶은 말년성 지위를 나는 이렇게 상상한다. 




1 철학자 김진석이 제안한 개념으로 ‘포월’은 ‘초월’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산뜻하게 우월한 처지에서 뛰어넘는 게 아니라 배를 땅에 붙이고 사지로 바닥을 기듯이, 대상을 감싸안으면서 가까스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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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드워드 W. 사이드> 저/<장호연> 역

출판사 | 마티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저/<이지수> 역

출판사 | 마음산책

죽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저/<이지수> 역

출판사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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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저자, 『돌봄과 인권』 공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