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말한다
아이의 말을 미숙한 말로 바라보지 않는 순간 새로운 시야가 트이곤 한다.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서 나를 더 많이 점검하게 된다. 이 역전된 교육이 신선해서 아이가 입을 열면 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가르침을 기다린다. 조용, 지금 아이가 말한다.
글ㆍ사진 김성광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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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동생 만들어주세요"

 

느닷없이 아이가 말했다. 어린이집 친구에게 동생이 생겼단다. 아내와 나는 둘째를 가질 계획이 없다. 아이를 낳아보니 아이를 기르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게 되었고, 아이를 가지기 전의 막연함은 해소되었지만, 아이가 둘이라는 상상은 또 나름의 무거움으로 다가온다. 아이가 하나일 때 유지할 수 있는 균형과 아이가 둘일 때 유지할 수 있는 균형은 아마 다를 것이다.

 

"지안아. 동생 생기면 지안이가 잘 돌봐줘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응"


"인형이랑, 블록이랑, 뽀로로 주스도 양보해야 하는데 양보할 수 있겠어?"


"안 돼."

 

이것으로 일단 방어는 성공했다. 지안이의 "안 돼" 대답을 들은 후 아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마주 웃었고 상황은 지나갔지만 궁금증은 남았다. 아이의 진짜 마음은 어떤 걸까. 그냥 친구에게 동생이 생겼고, 책에서도 동생 얘기가 많이 나오니, 호기심에 동생을 갖고 싶다 말한 걸까. 아니면 돌봐주거나 항상 함께 있고픈 누군가가 필요한 마음이 그런 식으로 툭 튀어 나온 걸까. 형제자매가 없는 것이 아이에게 어떤 감정과 영향으로 나타날지 늘 궁금하다. 아내와 나 둘 다 동생이 있어서 ‘혼자’가 상상되지 않으니 더 그렇다. 아이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다. 지안이는 요즘 부쩍 "내 동생 곱슬머리 개구장이 내 동생"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할 때는 어서 말했으면 싶었다. 울음소리 만으로 자고 싶은지, 배가 고픈지, 기저귀를 갈아야 할 지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아서였다. 아이도 제 요구를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우니 답답했을 것이다. 확실히 말을 하고 나서는 많은 게 수월해졌다.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 수 있고, 왜 기다려야 하는지 상황을 이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을 한다고 아이의 정확한 마음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말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문 뒤에는 꽤 복잡한 미로가 있다. 그 미로를 잘 통과해서, 나는 아이의 마음에 닿고 싶다.

 

하루는 지안이와 블록 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안이는 악어 집을 만들고 아빠는 곰 집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아빠 벽돌 집으로 지어주세요" 당부한다. 아기 돼지 삼형제 책에서 첫째 돼지는 짚으로 집을 만들고, 둘째 돼지는 나무로 집을 만들었는데, 늑대가 집을 무너뜨리고 돼지를 잡아 먹었다. 하지만 벽돌로 집을 지은 셋째 돼지 집은 늑대가 무너뜨리지 못했다. 책을 읽은 후로 지안이는 우리 집은 나무로 지었는지 벽돌로 지었는지 이따금 물어본다. 이제 악어와 곰 친구들 집도 튼튼하게 지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클라이언트의 주문을 잘 접수하고 나는 튼튼한 벽돌로 짓겠다고 약속했다. "벽돌을 차곡차곡 잘 쌓고 있어요" 보고해가면서 블록을 끼운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곰 집에 있으면 안 되잖아"라고 지안이가 말했다. 아니 뭐가, 나는 그저 평범한 블록들로 만들었을 뿐인데.

 

"지안아, 곰 집에 있으면 안 되는 게 어떤 거야?"


"이거"


"이게 뭔데?"


"꼬꼬자"


"응?"


"꼬꼬자"


그게 뭐야?"


"꼬꼬자!"


"요 갈색 블록?"


"아냐"


"요 울타리 블록?"


"아냐"


"그럼, 요 세모 블록?"


"아냐 아냐 그거 아니야!!!"

 

끝내 지안이가 무얼 말하는 지 알지 못했다. 지안이는 "아빠가 내 말 못 알아 들어" 하면서 엉엉 운다. 나는 억울했다. "지안아, 듣는 사람이 잘 알아 들어야 하는 게 아니고, 말하는 사람이 잘 알아 듣게 말해야 하는 거야" 말하고 싶었다.

 

말을 하고 있을 때는 잘 알아듣게 말하고, 말을 듣고 있을 때는 맥락을 잘 알아들으려 노력해야 한다. 무엇이든 상대를 자신에게 맞추라 하기 보다는 자신이 상대를 맞춰주는 태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선을 넘을 정도로 나를 무례하게 대하기 전에는 그런 태도를 갖춰야 한다고, 그걸 지안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이에게 나를 맞추지 않고 아이를 내 생각에 맞추려 하고 있다.

 

아이들의 발음은 때로 정확하지 않다. 아이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발음으로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한 시간으로 하는 것이다. 아이가 어떤 대상을 어떤 발음으로 하는지 옆에서 지켜본 경험이 누적될 때 아이의 부정확한 발음도 해독 가능한 언어가 된다. 아마 그때 아내가 있었다면 지안이의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물어보니 "꼬꼬자"는 '꼬꼬닭"이었다. 닭 그림이 그려진 블록이 곰 집에 있으면 닭이 곰에게 잡아 먹히니까, 거기 있으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런 예쁜 마음을, 그 순간의 반짝거림을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하다. 마음에 새겨 놓고 싶은 순간을 놓치면 늘 아쉽다. 너의 말로 너의 마음에 닿고 싶어서 너의 곁에 항상-오래 머무르고 싶다.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단지 아이와의 교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게 많다. 누군가의 곁에 머물러 보지 않은 채 멀리서 순간의 언행만으로 판단하는 내 모습을 경계하게도 되고,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기도 한다. 아이의 말은 형성 중이므로, 부정확한 발음뿐 아니라 상황이 뜬금없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말조차도 나를 일깨운다.

 

지안이의 경우 "미안해"와 "고마워"를 자주 한다. "고마워"는 그런 경우가 잘 없는데 "미안해"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때가 종종 있다. 지나가다가 내가 지안이에게 툭 부딪혔는데 지안이가 내게 "미안해"라고 한다. 빨래를 개키고 있는데 옆에 다가와 "나도 해 볼래" 하며 한참을 꼼지락 거리더니 갑자기 "미안해" 한다. 머리를 감았는데 수건이 안 보여서 "수건 어딨지" 찾았더니 지안이가 "미안해"하기도 했다.

 

나와 아내는 부딪힌 사람이 미안한 거라고, 도와주려고 했다가 잘 안 된 게 미안한 건 아니라고, 지안이가 맡은 일이 아닌 것에 대해 지안이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준다. 혹시나 지안이가 너무 여러 가지를 자기 책임으로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물론 그저 말의 용법에 익숙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말이 적절한 순간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일 확률이 높다. 자라면서 저절로 깨닫게 될 거라는 걸 안다.

 

아니, 그런데, 따져보면. 다 자란 어른들이라고 미안하다 말해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는가. 사과에 인색하고, 사과는커녕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알아챌까봐 날 서 있는 사람들, 내 잘못을 사과라는 결론으로 연결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어른들. 그런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때로 그런 사람들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지안이의 "미안해"는 자주 나를 일깨운다. 어쩌면 지안이가 깨달아야 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의 말이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닐까. 미안할 범위를 축소시키기 보다는 확장해야 할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의 말을 미숙한 말로 바라보지 않는 순간 새로운 시야가 트이곤 한다.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서 나를 더 많이 점검하게 된다. 이 역전된 교육이 신선해서 아이가 입을 열면 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가르침을 기다린다. 조용, 지금 아이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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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