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고 묻기 전에 사랑하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책을 사랑하는가? 나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 이 책을 편집하는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원제는 ‘The art of Reading’이지만 책과 삶, 예술과 책의 관계를 깊숙이 파고드는 이 책에 다른 제목을 붙일 수는 없었다. ‘왜’가 붙은 이유는? 책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많은 그림에 책이 담기지 않았을 테니까. 원서 편집자도 비슷한 고민을 했는지 원래는 ‘Books do furnish a painting’이었던 제목을 슬그머니 바꾸었다.
사실 작업이 매우 까다로운 책이었다. 수십 명의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등장하는데 물론 익숙한 이름도 있었지만 생소한 이름도 많았다. 책이 인생과 예술에 미치는 영향, 그것이 얼마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는 만큼 그동안 내가 얼마나 책의 한쪽 면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림과 책을 일일이 찾아보고 그것이 적확한지 확인하는 작업과 너무 간략하거나 뭉뚱그려진 설명을 적절하게 풀어 주는 길었던 시간이 그 반증이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구성된다. 먼저 중세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책과 독서의 역사를 여섯 시대로 나누어 서술한다. 그리고 150여 점의 그림을 통해 책이 가진 온갖 은유를 설명해 준다. ‘책이란 무엇인가?’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책은 중세부터 현재를 지나, 150여 점을 그림을 거쳐, 마침내 책이란 우리 자신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가 말하는 그대로 책이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는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원래의 모습 그대로다. ‘십계명이 아이폰에 담겼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권위를 지닐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책에는 자체로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기술은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유일한 원동력이 아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고 저마다의 기준을 갖고 꼼꼼히 읽을 책을 고른다. 그런데 이유가 너무 확실하고 지나치게 꼼꼼히 고르다 보면 오히려 금방 벽에 부딪힐 수 있다. 그럴 땐 우연에 기대어 보는 것도 좋다. 이 책은 그런 우연을 기대해 봐도 좋을 책이다. 편집자를 괴롭혔던 수많은 작가와 작품명은 애서가의 호기심과 자존심을 은근하면서도 강하게 건드린다. 이 책이 소개하는 어떤 책, 무슨 그림이건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박스처럼 예상치 못한 ‘맛’을 안길 것이다. 어떤 맛인지 궁금하지 않은지.
이 책을 읽는다면 서문을 빠뜨리지 않았으면 한다. 작가가 쓴 서문도 좋지만 역자가 쓴 서문이 먼저 마음을 움직인다. 나는 장 그르니에의 『섬』 에 쓰인 카뮈의 서문을 좋아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읽어 보게 되는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라고 마무리되는 글. 이어서 김화영 선생이 쓴 한 문장은 당신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에 릴케는 ‘이 책에 대해서는 논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직접 읽어 주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썼다. 역자는 이들의 글을 압축했다. 그러니 오늘 이 책을 처음 만나는, 바라는 책을 찾고자 방황해 본 경험이 있는 독자가, 부디 직접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
이 책의 재킷(겉표지)을 뒤집어 보고, 벗겨 보았으면 바란다. 너무나 다양한 책만큼이나 어렵고 훔치고 싶은 독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려 세 가지 표지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재킷(겉 커버)의 앞과 뒤, 그리고 싸바리(양장 표지)의 느낌이 모두 다르다. 어쩌면 이 책을 읽을 독자의 모습이기도 한 독서하는 여성을 담은 그림은 재킷 앞면에, 그리고 재킷을 뒤집으면 프린트만 있는 표지가 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보이기 싫은 독자들을 위해서다. 싸바리(양장 표지)는 또 다르다.
『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 를 편집하는 기간 동안 마음껏 고민했던 나는 아직 책을 사랑하는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예술가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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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제이미 캄플린, 마리아 라나우로 공저/이연식 역 | 시공아트
중세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의 책의 역사, 각각의 주제에 맞는 그림,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에 탐독할 것이다. 디지털의 시대에도 변치 않고 책을 사랑하는 이들, 책을 삶의 중심에 놓는 이들은 진정한 애서가라 불릴 만하다.
이경주(시공아트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