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낮은 곳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달팽이의 따뜻한 시선
몇 년 전 페이스북에서 조우했을 때, 그의 능력과 품성을 알기에 세상에 다시 불러내고 싶었습니다. 출판사 대표의 업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선비를 발굴해 글을 쓰도록 하여 세상에 알리는 게 으뜸이죠.
글ㆍ사진 김현종(메디치미디어 대표)
201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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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를 시작하여 책을 펴낸 지 12년. 꽤 많은 종수의 책을 펴냈고 그 가운데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펴내면서 그 속내를 털어놓기는 처음입니다. 이번 책에 얽힌 사연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글쓴이는 성공했거나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나 자기 이름으로는 통장 하나, 집 한 칸, 혼인 한번 하지 않고 떠난 ‘친구’입니다. 이 책은 제목(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처럼 달팽이처럼 느리게, 한없이 가난하게 살다간 어느 자유인의 죽음과 그가 남긴 글입니다. 잡지사 기자 시절, 동료들에게서‘당대 최고의 산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글이 과연 그러한지 이제 독자들께서 한번 읽어주십시오.   

 

오래전,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이라는 독특한 잡지가 있었습니다. 젊은 날 그를  <샘이깊은물>  편집부의 동료 기자로 만났습니다.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언제나 그는 멋진 기획과 글이 넘치는 친구였습니다. “남성 안의 여성성(anima), 여성 안의 남성성(animus)”라는 주제를 찾아 청탁한 일이 먼저 기억납니다. 아마 이 주제는 대중매체에서 최초로 소개되었던 듯합니다. 거창고 재단에서 운영하는 샛별초등학교를 탐방 취재해 쓴 “자유롭게 자라는 샛별국민학교 아이들” 같은 기사는 한창기 사장을 비롯해 당시 <샘이깊은물> 편집부에서 ‘이런 글은 교과서에도 실리면 좋겠다’는 평을 얻기도 했습니다. 자유와 발달, 이를 만들어가는 사제지간을 그린 고급에세이였습니다.   

 

“어딘가 나하고는 다른 세계를 가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 어느 직장에서도 그런 느낌을 주는 동료가 한 명씩은 있을 테지요. 그는 딱 그런 동료였습니다. 당시의 <샘이깊은물>은 저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는데, 스무 명 넘는 구성원 중에서 믹스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두 명이었고, 사장과 편집장 이하 모든 사람이 드립 커피를 마셨으며, 쉬는 시간이면 모두 바흐와 브람스를 얘기했습니다. 그는 그 지적 흐름의 숨은 지휘자였습니다. 맑은 목소리와 형형한 눈으로 베를린 필의 바흐 연주를 설명하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1986년 즈음의 일입니다.  

 

1980년대 후반 언론 창, 복간 열풍 속에 그도 저도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저는 신문사로, 그는 잡지사로 갔습니다. 어쩌다 듣는 그의 소식은 그리 잘 풀리지 않아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풍문 속에서 기억이 흐려지고 있을 무렵, 2014년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습니다. 경기도 장흥 어딘가로 찾아가 만난 그는 농가의 헛간에서, 그 헛간에 어울리는 ‘동물’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몸에서 건초 냄새가 풀풀 났습니다. 오페라나 신규 클래식 음반의 해설을 번역 정리하는 것으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 달 수입 60만 원. 이 정도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철학과 음악, 글쓰기 말고 그에게서 후천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가난입니다. 연대보증인으로 형의 사업 실패를 고스란히 떠안았고, 신용불량자가 됐고, 그 신용불량을 풀 수 있는 시기가 왔음에도 신청하고 심사받는 게 귀찮아 방치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김인선은 현실 권력인 ‘가이사’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인’이구나 싶었습니다. 대한민국 땅덩어리 안에 살면 법을 지키고 제도를 따르고, 자기가 찾아먹을 수 있는 권리와 혜택을 찾아먹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귀찮아 포기하는, 세상 바깥 사람이었습니다.
 
게으를 자유, 가난할 자유를 추구하며 책의 제목처럼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살았습니다. 결국 작년 이맘때 ‘이미 암이 온몸에 퍼질 대로 퍼져서 어떻게 손써볼 수 없는 상태’로 발견돼 경기도립병원 응급실에서 황망히 세상을 떴습니다.     

 

몇 년 전 페이스북에서 조우했을 때, 그의 능력과 품성을 알기에 세상에 다시 불러내고 싶었습니다. 출판사 대표의 업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선비를 발굴해 글을 쓰도록 하여 세상에 알리는 게 으뜸이죠. 양주시 장흥의 농가 헛간에서 만나 일정 기간 생활비와 취재비를 보조할 테니 글을 써보도록 했고, 그는 며칠 고민하다 응했습니다. 의욕도 보였습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몇몇 기담을 비롯해 여러 형태의 글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 1년, 2년이 지나도 그의 특기인 ‘마감 못 지킴 병’으로 원고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잊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한참 연락이 없다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 새벽에 이런 메시지가 왔습니다. “참 대단한 김현종 씨. 단 한마디도 내게 싫은 소리 안 허시네. 내가 울 엄마 빼고 누구한테 이렇게 미안해본 적이 없지. 내 필히 부채와 신세 갚아요. 아주 오래 안 걸려요. 그렇게만 알고 계슈.”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부음을 전해 듣고 달려갔습니다. 중학교 때부터의 친구인 김대현 선생이 홀로 맞아주었습니다. ‘인선이’ 만큼 독특한 분 같았습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메디치에서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이 책 말미에 ‘내 친구 김인선’을 쓴 김대현 선생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글을 모아줬습니다. 김대현 선생은 ‘김인선이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랍니다. 그의 평가에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만, 독자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 저마다 자기 색깔로 존재하는 것들을 알아보는 그의 눈은 역시 제가 닮으려야 닮을 수 없는 경지입니다. 그의 글은 남다르게 따뜻하고, 모두가 무관심한 것들에 애정을 쏟으며, 삶의 이치를 송곳처럼 찌르고 있습니다. 글이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 치면 그 그릇은 아직 세상에 선 보인 적이 없는 독특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는 한 권의 책으로 남은 ‘산문 천재’를 세상에 내보내며 때 늦음에 대한 후회를 지울 수 없습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봐주시길….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김인선 저 | 메디치미디어
부적응자이자 아웃사이더인 동시에 자연 속에서 천진하게 살아가는 사색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꾼, 자신마저 웃음거리로 삼는 탁월한 농담가의 면모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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