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평범한 여자의 일상을 이야기해야 해요”
매 식사 때마다 막내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저를 놓아야 하는 이의 심정은 어떨까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일상을 다뤄야 해요. 수저 놓는 권력을 바꾸지 않으면 법을 아무리 바꿔도 사회는 그대로일 테니까요.
글ㆍ사진 성소영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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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에게는 더 그렇다. 특별한 시공간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의 장소에서도 여자들은 쉽게 불합리, 불평등과 마주한다. 누군가에게 부엌이 음식을 먹으러 가는 공간이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밥을 짓는 곳이다. 여성이 혼자가 되는 순간,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밤거리의 낭만 사이에 공포가 끼어든다.


인권활동가 류은숙 저자는 책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에 13개 장소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을 자신의 일화를 통해 풀어냈다. 그리고 지난 11월 12일, 홍대 땡스북스에서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출간을 기념해 류은숙 저자의 강연이 열렸다. 그는 사람들이 동일한 공간을 살더라도 아주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며, 일상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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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페미니즘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책은 뒤늦게 배운 페미니즘의 옹알이 같은 이야기이다. 자꾸 중얼거리다 보면 낡은 언어를 몰아내고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게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1992년 인권운동을 시작해 현재 인권연구소 <창>의 인권활동가로 일하는 류은숙 저자는 자신의 첫 페미니즘 책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를 펴내며 이렇게 적었다. ‘페미니즘의 옹알이’라는 말처럼 그는 책의 집필을 제안받은 뒤에야 비로소 페미니즘을 바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동안 명예남성으로 살며, 여성 인권을 살피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뒤늦게나마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한 것의 의미를 전하며 북토크의 문을 열었다.

 

“아동인권을 시작으로 한걸음씩 인권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알게 됐죠. 장애인에게도, 홈리스에게도, 심지어 극악한 짓을 저지른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 그 앎의 꼴찌가 여성인 거예요. ‘나도 생물학적으로 여자고, 평생 여자다움을 강요받고 살았는데 이 숱한 인권들을 하나씩 공부하면서 왜 여성인권은 생각하지 않았지? 자칭 타칭 인권운동가가!’ 


이 책을 쓰면서 제게 찾아온 가장 큰 물음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 왜 여성인권에 관심이 없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인권운동에서 주로 다뤄지는 게 헌신, 침묵 속 복종, 요구하지 않고 버티기 같은 것인데 이건 여성에게 늘 요구되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억압이 아니라 관계 속의 윤활유 같은 덕목으로 여겼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생각을 못했던 거예요. 이 관계를 위해서는 ‘내가 더 헌신해야지. 내가 더 보살펴야지’라는 식으로 늘 세뇌되어서 문제를 문제로 바라볼 수 없었던 거죠.”

 

그는 책을 쓰면서 비로소 여성인권을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가난하든 돈이 많든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사회적 위치와는 상관없이 여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억압을 인권과 결합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성인권은 나와 관계없는 일, 오히려 내가 도와주고 구제해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일이라 여겼다. 우리 머릿속에 자리한 여성인권의 개념이 다시 정립되어야 하는 이유다.

 

“인권 개념조차 제대로 없었을 1960~70대 우리나라에서 나온 인권 서적들은 운동가가 아니라 법무부에서 썼거든요. 거기서 나온 인권의 개념은 사회의 불우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법률 상담을 해주고, 국민들에게 이런 사람들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나서서 개도하는 것으로 악용되었어요. 여기서 주로 다뤄졌던 여성은 버스차장, 식모 등이었죠. 또 언론이나 당국에서 부추겼던 인권운동이 그런 거였거든요. 특별하게 비참하고 너무 힘든 사람을 돕는 일. 그래서 인권을 대할 때 나와 다른 차원의 사람, 갑을 관계에조차 들어올 수 없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거예요. 


그러니 여성인권을 이야기할 때도 나의 문제로 생각이 안 됐던 거죠. 시대가 변했음에도 계속 그런 이야기가 반복되어왔기 때문에 여성인권은 나와 다른 이야기 혹은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저 같은 인권운동가가 여성인권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도 다 싫었기 때문이죠. 비참을 떠올리는 것도 싫고, 그걸 ‘나 잘났어’로 이용하는 것도 싫고요.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해왔던 인권운동과 페미니즘이 결코 다르지 않다며, 다만 어떠한 지점에서는 보완할 측면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리고 뒤늦은 배움을 발판삼아 계속 페미니즘 공부를 이어갈 것을 역설했다.

 

“책날개에 ‘페미니즘의 옹알이 같은 이야기’라고 썼는데, 이제야 페미니즘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게 너무 창피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벼락치기 하듯이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20여 년간 떠들어왔던 제 언어의 허접함과 구멍을 너무 많이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옹알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말이 보태짐으로써 이야기가 되는 게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한 사람이라도 더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또 변명을 하자면 배움에는 늦음이 없잖아요. (웃음) 페미니즘을 완벽히 공부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내가 지금 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이야기하고, 지금까지 해온 인권과 페미니즘이 서로 보완해야 할 측면이 많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어요. 늦어서 부끄러우면서도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은 건 이제라도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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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은 누적된 역사다


류은숙 저자는 책을 쓰면서 자신의 경험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음을 내비쳤다. 중년 여성인 자신의 이야기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구닥다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썼던 데는 성차별의 역사성과 누적성을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방식이 조금씩 모습을 바꾸었을 뿐,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과 관계맺음에서 부엌이란 말뚝과 거기 묶인 줄을 누구도 시원스레 제거하지는 못했다. 왜 말뚝이냐 하면, 부엌에 있지 않더라도, 부엌에 있을 필요가 없더라도, 부엌에 있어야 할 존재라는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부엌에서의 역할을 기대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0쪽)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 젠더에 대한 차별은 엄청난 누적적 경험이에요. 요즘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역사성과 누적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거죠. 그래서 제 경험이 결코 옛날 이야기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경험은 이어지고 전승되는 데 의미가 있거든요.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는 분명 누적된 차별이 있죠. 물론 개인적으로 탈출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같은 나이대의 여성이라고 모두 똑같은 부엌을 경험하진 않잖아요. 누구는 어릴 때부터 손에 물 마를 날 없이 부엌일을 했다면, 누구는 가사도우미와 평생을 살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부엌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될 수가 없죠. ”부엌일하는 사람한테 무슨 큰일을 맡겨“라고 말할 때, 그 ‘큰일’에서는 어떤 여자도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요. 누적된 속성 때문에요. 그러니 ”에이 요즘 그런 게 어딨어?“라는 말은 차별의 누적성과 역사성을 부정하는 거예요. 현재의 모순을 과거와의 격차로 퉁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누적된 모순, 차별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좋아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 여성들도, 혹은 전혀 성차별을 겪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누적성으로 인해 성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1992년에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어요. 모르실 분들을 위해 줄거리를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주인공 아들과 딸이 쌍둥이인데요. 어머니가 아들에게는 귀하다는 의미로 ‘귀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딸에게는 아들 앞길 막지 말라는 의미로 ‘후남’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엄마는 늘 딸을 구박해요. 재수없게 내 귀한 아들과 같은 태에 들어섰다는 이유로요. 그게 이 드라마의 처음부터 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죠. 그런데 이게 왜 구닥다리 이야기가 아닐까요?


요즘  『82년생 김지영』  이 다시금 대단한 이슈인데요. 소위 ‘좋은 세상’에 사는 82년생 김지영이 10살쯤 되었을 무렵에 <아들과 딸>을 보지 않았을까요? 당대 최고의 드라마였으니 가족과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봤을 거란 말이죠. 그걸 보는 가족의 마음에는 무엇이 새겨졌을까요? “야휴, 저런 말도 안 되는 드라마”라고 하면서 봤을까요? “옛날엔 더 심했어. 요즘 많이 좋아진 거지.”라며 봤을 거란 말이에요. 그럼 만약, 김지영 식구들 중에 아들이 있었다면 그는 어떤 심정으로 드라마를 봤을까요? 드라마에서 어머니가 방금 낳은 따끈따끈한 달걀을 매일 아들에게만 주는데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엄마, 왜 나는 저렇게 안 해줘?”라고 했을 게 뻔해요. (웃음) “저런 성차별적인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드라마뿐만이 아니에요. 당시에는 온갖 매체에서 그런 장면을 보여줬고 결국 82년생 김지영은 문화적, 상징적으로 그러한 차별 속에서 자라났어요. 그러니 ‘이런 얘기 구닥다리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가 아니라 어떤 맥락이 지금 고차원적인 모순으로, 새로운 변형논리로 계속 반복되고 있는지를 발견해야죠. 싸움만 진보하는 게 아니에요. 차별주의도 진보하거든요. 저는 변화된 맥락, 상황 속에서의 새로운 언어와 논리를 찾고 써왔던 저항의 언어를 지켜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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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눠야 한다


그가 책을 쓰면서 맞닥뜨린 또 하나의 걱정은 이러한 이야기가 신세한탄에 머물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자들의 서사가 전달되고 남기 힘든 이유는 자칫하면 신세한탄으로 끝나버릴 수 있기 때문. 사회적으로 불리함을 강요받아 온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서툴다. 온 가족이 모여 앉은 식사 자리에서 훈수를 두는 아버지들의 수만큼 “나는 말주변이 없다”며 감정을 숨기고 혼자 꾹꾹 누르는 어머니들이 많은 것처럼. 류은숙 저자는 서툴고 어색하더라도, 때로는 신세한탄에 그쳐 버릴지라도 여자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은 돈이 없으면서도 깔끔하고, 돈이 없으면서도 정신과 감정이 풍부하고, 돈이 없으면서도 살림을 잘해낼 것을 요구받는다. 우린 그런 기적을 바라지 않고 여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본권이라는 상식을 바란다. 그런 상식을 논해야 할 희의장과 토론장이 많아져야 하고, 여성은 거기서 말할 수 있고 진지하게 청취되어야 한다. (200쪽)

 

“저는 고등학교 때 수돗물이 안 나오는 집에 살았어요. 아버지가 전세방을 날려버려서 하루아침에 산꼭대기 판잣집으로 이사를 갔거든요. 그때 제가 했던 일은 아랫집에 돈을 얼마씩 주고 물을 길어오는 거였어요. 항아리 2~3독을 채워야 그날 밥하고 빨래하고 세수를 하는데, 그만큼을 채우려면 3~4시간이 걸려요. 하수구도 제대로 매설이 안 돼 있어서 겨울이면 오수를 갖다 버리는 일까지 해야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와 물을 긷는 제게 전도를 하는 거예요. “네가 회개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이죠. 어린 마음에도 너무 화가 나서 “내가 죄를 지어서 이 모양 이 꼴로 산다는 거냐”고 따졌어요. 


인권운동을 하면서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지금도 그때의 기분이 불쑥 튀어나와요. 기본적 인프라도 보장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때 울화통이 터지죠. 그런데 특히 여성에게는 개인적 책임을 더 많이 물어요. 씻을 수 없는 형편이어도 여자는 깨끗해야 하고요. 그 와중에 캔디 역할도 해야 하죠. 감정노동까지 더해지는 거예요. 똑같이 춥고, 힘든데 누구는 버럭버럭 성질을 내고 누구는 그 감정을 다독이는 역할까지 해요. 안락의 장소에서까지 여자는 감정노동을 강요받기 때문에 호소할 곳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발언할 기회가 생기면 한탄이 시작될 수밖에 없죠.“

 

그는 “또 시작이야?”라는 핀잔으로 발언의 기회를 잃지 않으려면, 우리의 이야기를 신세한탄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불편함을 알아야 그 문제를 고쳐나갈 수 있다. 차별 받는 이들이 더 많은 말을 하고, 공론화하며 함께 나아갈 때 비로소 차별 철폐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불리함을 강요받아 온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장소가 희박하다 보니 그런 자리가 생기면 독점하려 합니다. 그럼 고통을 경쟁하게 되죠. ‘내가 더 심했어. 내가 더 아팠어’ 그런 이야기는 듣는 이를 나가떨어지게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차별 철폐 운동의 시작이 ‘말하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도 그랬는데, 너도 그랬니?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지? 우리 함께 뜯어고치자’면서 이를 공적 의제로 만들고 이야기를 연결해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위에 앉아서 사인만 하는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불편해 봤어야 고치죠. 그래서 여성들의 불편함을 이야기할 장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나갈지 고민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는 제1회 인권영화제의 화제작 <대지의 소금>을 예로 들며 나의 불편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것이 차별 철폐의 지름길임을 설명했다. 부당한 노동환경에 맞서 파업한 탄광 인부들이 감옥에 갈 운명에 처하자 광부의 아내들이 꾀를 낸다. 여자가 광산 앞에서 피켓 들고 시위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으니 자신들이 가서 시위를 하겠다는 것. 결국 광부들은 집안일을 도맡게 되고, 아내가 대신 밖으로 나가 시위를 시작한다. 노조 단체협약 회의에는 여자를 끼워주지 않고, 아내가 수도 개량 사업을 건의하면 ‘이토록 사소한 건 회의 안건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하던 남자들은 빨래를 널면서 ‘이번 노조 협약에 수도 개선사업을 꼭 넣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불편함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그 문제를 볼 수 없어요. 그런데 여성들은 약자에게 잘 공감하죠. 곳곳에서 이런 문제를 볼 수밖에 없는 환경에 강제적으로 놓여있기 때문이에요. 여자가 착해서, 더 예민해서 보이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보일 수밖에 없어요.”

 

동시에 그는 일상의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별은 우리의 삶 도처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사망하거나, 끔찍한 범행을 당하거나, 밑바닥의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너와 나의 평범한 이야기가 쌓일 때 비로소 변화의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제가 직장 내 괴롭힘 관련 교육을 많이 다니는데, 산업분야와 직종을 막론하고 발생하는 똑같은 문제가 있어요. 소위 직장에서 ‘막내’인 여성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인데요. ‘밥 먹을 때 수저를 누가 놓는가’예요. 그걸 고민한다고 말하면 ‘그까짓 거’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이 그까짓 거에 권력관계가 응축돼 있습니다. 한 번은 공중파 방송국에 강의를 갔는데, 한 여성 PD가 울먹울먹하면서 제가 말을 하더라고요. 똑같이 시험보고 들어와서 연수를 받는데, 밥 먹을 때마다 굉장히 갈등된다는 거예요. 남자 동기에게는 아무도 수저 놓기를 기대하지 않으니까요. 막내이자 여성인 자신이 수저를 놓길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데 놓고 싶지 않은 거죠. 내가 지금 수저를 놓으면 이후에 ‘수저 놓는 애는 이 정도만 해도 돼’ 같은 소규모 프로그램밖에 맡지 못할 거 같은 자신의 미래가 그려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더 갈등하게 되는 건 같이 들어온 여성 동기가 너무 열심히 수저를 놓는 거죠. 


이 문제를 사소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매 식사 때마다 막내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저를 놓아야 하는 이의 심정은 어떨까요? 사람들은 늘 더 비참한 서사만 찾아요. 그런데 사회를 바꾸려면 우리는 일상을 다뤄야 해요. 수저 놓는 권력을 바꾸지 않으면 법을 아무리 바꿔도 사회는 그대로일 테니까요. 법이 바뀌었다 한들, 수저를 대령 받는 사람은 계속 대령 받아요. 그건 법에 저촉되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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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힘은 만남에서 생긴다


누구든 자기를 돌보는 공부를 해야 하고 이건 누군가가 지지해 줘야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공부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나누고 보태는 것이다. 관계를 파악하고 연결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내 일에서 다른 방식의 사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지금 내 공부의 목표이다. 교실과 학교, 사회에서 ‘성공’이라 가르쳤던 공부가 늘 ‘’나를 어디로 데려가 주세요‘라는 주문이었다면, 지금의 공부는 ’나의 장소는 여기다. 여기서 뛰어볼 테다‘를 실천하는 것이다. (53쪽)

 

마지막으로 그는 ‘여자들’이 들어간 제목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자’ 그리고 ‘여자들’이라는 단어는 개개인의 여자를 한데 묶어 오해하는 데 자주 사용되고 “여자가 말이야” “여자들이 뭘 알아” 같은 말을 들을 때 나의 고유성은 사라진다. 류은숙 저자는 우리가 성차별에 반대하는 이유는 여성으로 인정받고자 함이 아니라 성별을 떠나 한 사람의 개인으로 인정받기 위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흔히 ‘여자, 여자들’로 묶어 오해를 하거든요. 이것도 인권침해예요. “여자가 말이야”라고 할 때, 나의 고유성과 개체성은 소거되죠. 그런데 억압하는 쪽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쪽에서 이렇게 묶을 때도 문제가 돼요. “여자들이 하나 돼서 나아가야 하는데.”라고 하면 힘들죠. 하나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때로는 성차별주의자들에게 이상한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능력은 부족한데, 상징이 필요해 고위관직에 오른 여성들을 타깃으로 삼아 “여자가 하니까 저 모양이다”라는 공격을 하잖아요.


이건 저항하는 쪽에서도 굉장히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인데, 여자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런 게 빌미가 되어 하나로 묶이는 거예요. 우린 고유성을 인정받고자 성차별에 반대하는 거잖아요. 여자라는 집단이 인정받기를, 여자가 더 선하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여자가 말이야”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류은숙이 말이야”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필요한 이유는 연대하고 나아가야 비로소 싸움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의 ‘여자들’은 고유성을 가진 개개인이 가진 공통된 문제를 연결한다. 각기 다른 삶을 사는 여자들일지라도, 설사 개인의 운으로 어떤 억압에서 벗어나있을지라도, 그곳에서 요구되는 사회의 기대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그럼 ‘여자들’이 왜 필요할까요? 고유성을 가진 사람들이 전부 자기 문제를 가지고 싸우면 싸움이 시작될 수 없거든요. 그러니 서로를 연결해야죠. 나도 이런 문제가 있는데, 너도 있구나. 이렇게 연결되는 이름이 ‘여자들’인 거예요. 고위직의 여자도, 노동계급 최하위에 있는 여자도 다 ‘여자들’에 포함될 수 있어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모순이 함께 있기 때문이에요. 이때 중요한 건 서로의 다름을 위아래, 계급으로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거죠.”

 

더불어 성차별은 남성과 여성의 대결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인간 사이의 위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함께 철폐해나가야 함을 이야기했다. 성차별로 인한 피해자가 오롯이 여성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 차별의 피해는 남자들 무리의 남자에게도 영향을 미쳐요. 여자를 더 많이 거느린 남자가 우위를 인정받으면 그렇지 않은 남자는 루저 취급을 받게 되죠. 여자들 사이에서는 남자와의 관계로 위계가 정해집니다. 남자의 어머니, 아내, 여동생, 애인 등. 같은 대학 나와 똑같은 직장에 근무해도 남편의 직업에 따라 여자들의 위계가 달라지잖아요. 저희 어머니는 오빠들 공부 뒷바라지한 착한 딸이었고, 시집가서도 장남을 대신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지만 평생 친정에 고개를 못 들었어요. 남편이 돈을 못 버니까요. 그래서 성차별은 성별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수 없어요. 층층 시야로 인간 사이의 위계를 만들기 때문에 같이 타파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차별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먼저 우리 안에서의 위계 깨기에 노력을 해야 해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긴장해야 해요. 위계에 대한 거드름은 순식간에 몸에 배거든요.” 

 

우리 안에서의 위계 깨기를 위해 류은숙 저자는 광장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머리로 아무리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몸에 밴 신념을 스스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삶의 공부는 책상 앞이 아니라 타인을 만나 서로 지적하고, 지적받을 때 이루어진다. 그는 “서로 주고받는 힘이 그 다음의 언어를 부른다”며 사람들과 만나는 장에서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한 공부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북돋우며 북토크를 마쳤다.

 

“인권운동하는 동료 중에 “멀쩡하게 생겨가지고”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발달장애인 부모님께 지적을 받고 그 말버릇을 단번에 고치더라고요. 오늘 저도 은연중에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광장에 나가야 합니다. 인권 공부, 페미니즘 공부, 그러니까 삶의 공부는요, 골방에서 하면 안 돼요. 독학할 수가 없거든요. 안심할만한 사람들 속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서로 지적하고 발견하는 공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서 성찰을 해줘야 해요. ”너 무슨 그런 말을 쓰니?“라는 핀잔이 아니라 ”우리 같이 고치자“라고요. 그래야 미약한 힘을 뭉쳐 나갈 수 있어요. 불편함은 이 세상에서 없앨 수 없는 거거든요. 다만 그 불편함을 어떻게 생각하고, 더불어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거죠. 


그러니 페미니즘 공부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삶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공부는 사실 가방끈이 길어지는 공부는 아닌데요. 하면 할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이 공부를 위해서는 사람들과 만나는 장이 있어야 합니다. 또 저항의 힘은 만남에서 생겨요. ‘광장’이라고 하면 흔히 광화문 광장만 떠올리는데, 그런 대규모 집회가 아니라 무엇을 변혁하기 위해 누군가 모이면 그게 바로 광장이에요. 둘이 모여도 광장인 거죠. 오늘 여러분은 광장에 나오셨잖아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언어의 힘이 여러분에게도 충분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서로 주고받는 힘이 그 다음의 언어를 불러요. 언어 사전이 풍부해지면 세상과 나를 해석하는 힘이 커지죠. 삶의 새로운 언어를 알아가는 공부를 멈추지 맙시다.”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류은숙 저 | 낮은산
인권활동가로서의 오랜 연구와 다양한 개인적 경험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빚어 여성이 일상의 장소 곳곳에서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유려하게 풀어냈다. ‘여성’과 ‘장소’ 사이에 주목할 만한 사유의 다리 하나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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