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일] 신입 시절, 자존감을 지키는 법
고된 상황에서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편집자는 협업하는 존재고, 책은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글ㆍ사진 이지은(출판편집자)
202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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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시절에 편집실무보다 주변적인 것들을 더 많이 배웠다. 예컨대 매일 아침 팩스로 들어온 주문서에 맞추어 책 주문을 넣고, 점심시간마다 반품도서 책등에 찍힌 도장을 지웠다. 주말에는 저자를 따라 지방을 돌며 책을 팔았다. 강남역 한가운데에서 점심 먹으러 나온 회사원들을 대상으로 책 전단지를 돌리는 일을 ‘마케팅하는 편집자’라는 이름으로 지시받기도 했다.

 

한 출판사에서는 연말마다 회사에 저자를 초청해 송년회를 진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저자들에게 접시를 날랐다. 저자들의 식사가 끝날 때쯤 눈에 띄지 않는 창고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남은 뷔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매일 ‘내년에는 내가 여기에 없기를’ 기도했다. 그럼에도 첫 직장에서는 일이 서툴다는 이유로 두 달 만에 쫓겨났고, 두 번째 직장에서는 술을 못 마시고 싹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장으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으며, 세 번째 직장에서는 사장의 권위에 눌린 중간관리자들 아래에서 주눅 들고 눈치보는 것만 익혔다. 늘어나는 건 눈치에, 줄어드는 건 자존감인 나날들이었다. 얼마나 자존감이 낮았는지, 한번은 함께 일하는 후배한테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같은 애가 여기서 일하는 걸 누가 알겠어.”

 

훗날 저 말을 전하는 후배에게 “내가?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몇 번을 되물었는지 모른다. 지금 내 캐릭터로는 절대 뱉을 수 없는 말이어서 당황스러웠다.

 

모멸을 수시로 견디던 시기였기에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줄 탈출구가 간절했다. 출판계가 괜찮은 곳이라는 믿음을 주고, 나를 좀더 나은 쪽으로 이끌어줄 누군가를 계속 찾아다녔다. 저녁마다 출판계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의 강의를 수강하고, 출판사 사장들이 쓴 책을 읽고 밑줄을 그으며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출구가 없던 당시의 내게 고마운 경험들이었다. 그것들이 나를 지옥에서 탈출시켜주지는 못했지만,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은 주었다.

 

다시 신입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 많던 모멸감을 무사히 피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를 수십 종 탄생시킨 스타 편집자나 억대 연봉을 받는 유명 편집자, 출판계에 무슨 사건만 생기면 언론에 소환되는 대단한 출판사 사장도 아니면서 ‘편집자의 일’에 대해 정리해보고 싶다고 결심했던 이유는 신입 시절을 하릴 없이 견디던 나를 안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특별히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요령이 없었다. 그저 상대가 주는 상처를 곧이곧대로 받아 안았다. 다시 신입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때보다 일을 잘할 자신은 없지만, 좀더 노련하게 상처를 피할 수는 있겠다.

 

지금쯤 어딘가에서 그때의 나처럼 좌절의 시기를 지나는 중인 사람이 꼭 있을 것 같다. 혹시 탈출구를 찾기 위해 각종 강연과 책을 찾아 헤매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나보다 더 요령 있게 신입 시절을 견뎌냈으면 한다.

 

우선은 지금 겪는 모멸들이 결코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신입 시절에 겪는 수많은 서툶은 사수와 회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사수가 받는 봉급에는 부하직원의 서툶을 감당하는 몫도 포함된다. 월급이 많고 직위가 높을수록 감당해야 할 몫이 커진다. 그러니 서툴다는 이유로 모멸을 곧이곧대로 받을 필요는 없다. 냉정하게 말해서, 신입으로 인해 생기는 리스크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신입을 뽑으면 안 된다.

 

신입 시절, 지적 받을 때마다 사수에게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언젠가 사수는 나를 따로 불러 앉혀놓고 말했다.

 

“앞으로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미안하라고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으로는 ‘시정하겠다’고 말하세요.”

 

사수의 말이 사실이다. ‘죄송’까지 할 이유가 없다. 부족한 사람이 모여 완벽해지려 노력하는 게 회사다. 이 과정에서 작은 실수들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시행착오라 생각하고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될 뿐이다.

 

만고의 진리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자주 곱씹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다. 신입 시절은 언젠가 지나간다. 지금은 배우는 속도도 느리고 무엇이든 척척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할 수 있겠지만, 하루하루 견디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몫을 다할 것이다. 여기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그저 매일 출퇴근 도장을 찍듯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는 아니다. 신입 때만 배우는 것들이 있다. 전화 예절이나 메일 작성 등 기본적인 응대부터 교정교열과 책꼴 만드는 법까지 3~5년차가 되기 전에 응당 익혀야 할 것들을 하나씩 습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신입 시절에는 덜덜 떨며 전화 받아도 넘어가고, 교정교열 틀려도 바로잡아주지만, 5년, 10년차에도 그 상태면 남들이 속으로 혀를 찰 뿐 절대 당사자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주변에서 일하는 동료의 목소리에 집중해보면 좋겠다. 나는 내 직업과 연계된 직업군의 글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이해하는 법을 익힌 것이 실무만큼이나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글은 회사 생활 노하우나 리더십 이야기가 담긴 자기계발서일 수도 있고, 마케터나 디자이너들이 쓴 업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인터뷰를 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요즘에는 은유 작가의 인터뷰집 『출판하는 마음』 이 출판계 입문하는 이들의 기본서로 통하는 듯하다. 이 책에는 1인출판사 사장, 번역가, 서점 MD, 제작자, 3년차 편집자, 영업자, 외주 디자이너 등 출판계 다양한 직군이 등장한다. 각 분야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인터뷰 내용과, 숨기려야 숨겨지지 않는 책을 향한 애정, 상충되는 서로의 고충과 이해 등이 한데 얽혀 있다. 특히 ‘제작자의 마음’은 업계에 10년 이상 일해도 접하기 쉽지 않다. 신입 시절에 이런 책을 읽는다면 출판을 보는 시야가 좀더 확장될 수 있다.

 

너도 나도 업계의 지속 가능성을 걱정하는데, 이런 이들과 함께하는 업계라면 적어도 쉽게 없어지지는 않겠구나, 싶은 마음에 안도가 된다. ‘이들과 함께여서 다행이다. 나도 이들과 계속 같이 출판해야지’라는 마음이 든다면 고단한 신입 시절을 견디게 도와줄 나름의 탈출구가 되어줄 것이다.

 

부서 간의 의사소통 문제로 상처를 입을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세상의 미친놈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멋지게 퇴사하는 법’ 같은 종류의 책은 통쾌함을 가져다 줄지 몰라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내 경우에는 오히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아니었을지 깊이 생각하게 돕는 책들을 자주 접하는 편이 나았다. 상대의 입장에 서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나만 상처입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구나.’

 

이 사실을 신입 때 알았다면 좀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힘들 땐 남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된 상황에서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편집자는 협업하는 존재고, 책은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출판하는 마음은유 저 | 제철소
책이 나오자마자 사라지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하나의 책을 완성시킨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싹튼 씨앗이 어떤 계절을 지나 책이라는 나무가 되어 독자들에게 가닿는지 조망할 수 있도록 차례를 기획, 집필, 번역, 편집, 디자인 순으로 구성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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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출판편집자)

12년차 출판노동자. 2009년부터 지금까지 6개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다. ‘인생은 재능이 아닌 노력’이라는 좌우명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다. 덕분에 재능 없이 노력으로 쌓은 12년 출판경력은 부끄러움과 자부심이 공존한다. 한 권의 책을 출간하기 위해 동료나 저자와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고,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기도 하는 출판이 재미있어서 이 언저리에 계속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