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비밀 소원』 의 한 장면 (그림_ 이윤희)
“우리는 모두 한 가지 이상씩 바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대부분 자기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동화 『비밀 소원』의 주인공, 초등학교 4학년 서미래의 말이다. 소원은 원래 그런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져올 수 없는 것, 바꿀 수 없는 것, 마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바꾸고 싶은 것이 소원의 항목이 된다. 이루지 못한 소원은 아쉬움으로만 남을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소원했던 주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 소원이 저절로 해소되기도 하고 소원을 향해 두 손을 모으게 만들었던 세계의 구조가 변화하는 경우도 있다.
어린이의 소원 중에는 가족에 관한 내용이 많다. 가족은 어린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면서 그들이 원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다. 가족이 정말 좋아서 그 행복이 영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가족이 지금 겪는 고통과 어려움의 원인인 아이들도 적지 않다. 밥을 더 잘 먹어본다거나 숙제를 미리미리 하는 것 같은 노력으로 어찌 해결할 수가 없으니까 기적이나 마법에 의지해본다. 소원을 빌면 실현될 거라고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다. 그들도 안다. 아빠와 엄마가 별거 중인, 서미래의 친구 이랑은 “소원을 말한다고 엄마 아빠가 화해할 리도 없고…해결 될 일이었으면 언젠가 되지 않을까. 안 될 일이면 안 되는 거고.”라고 차분하게 말한다. 소원은 잘 부푼 따뜻한 빵 같은 것이다. 상상을 불어넣을 때는 곧 이루어질 것 같지만 현실 위에 차갑게 놓이는 순간 금방 가라앉아 버린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소원의 정체라는 것을 어린이도 안다.
『비밀 소원』은 미래, 이랑이, 현욱이, 세 친구의 이야기다. 이들은 ‘소원이 주렁주렁’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소원을 말하면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프로그램에 나갈 방법을 찾는다. 살면서 한 번도 안 해본 일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매달려보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소득은 ‘절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만큼 친한 친구’를 얻은 것이다. 가족의 다른 얼굴을 마주하면서 아이들의 소원은 진화한다.
동화 『비밀 소원』 의 한 장면 (그림_ 이윤희)
진화한 가족의 얼굴은 이렇다. 미래는 스무 살 생일만 중요하다는 어른들에게 열한 살 생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미래의 이모는 이랑이네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말에 “그런 경우에는 집 나갔다고 하는 게 아니라 ‘별거한다’고 하는 거”라고 표현을 정정해준다. 이웃의 피해를 목격한 할머니는 울거나 주저앉는 대신 헌법책을 들고 나타나 논리적으로 경찰을 설득한다.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셔서 할머니, 이모와 같이 사는 미래는 “남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야.”라며 비혼의 장점을 말하는 이모 곁에서 불안 없이 편안히 잠든다.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현욱이의 아빠는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아들의 팬카페에 악플을 붙인 사람들을 만나러 나간다. 아빠는 무슨 일을 하시냐는 질문에 현욱이는 ‘집안일’을 하신다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새로운 사람들은 자기의 방식으로 소원의 방향을 움직여간다. 세 아이들의 소원도 달라진다. 소원의 내용은 끝까지 비밀이지만 그 비밀은 아마도 재조정을 거쳐 실현에 다가갔을 것을 믿는다. 김다노 작가는 이 작품으로 세상은 더 좋은 방향을 향해 동기화된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새로운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비중 있게 등장시키는 또다른 작품이 있다. 이현의 추리동화 『연동동의 비밀』은 서울 마포구 영미산로 부근에서 벌어지는 생활 속 추리서사다. 지어진 지 30년도 넘은 우정효네 다세대주택 중심으로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넘치는 기이한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정효의 명석한 추리 전개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정효네 가족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면면이다. 정효는 교통사고로 아빠를 잃었고 엄마는 캐나다로 떠났고 삼삼머리방을 운영하는 미용사 할머니 유순정과 단둘이 산다. 정효의 할머니는 손녀에게 경기소식을 꼼꼼히 챙겨주는 프로야구 팬이며 할머니의 친구인 202호 공선생은 퇴직한 중학교 영어교사다. 날마다 야근으로 고생하지만 주말이면 오후까지 술냄새를 풍기는, 201호 입주자 김장미씨는 비혼 여성이다. 이들은 연동동에 살면서 다함께 머리를 맞대고 동물과 여성을 공격하는 의문의 폭력 사건들을 해결해간다. 정효와 함께 연동동의 비밀에 도전하는 적극적인 친구 인찬이는 최신 전동휠체어를 타고 누구보다도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저마다 다른 조건에서 살아가지만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는’ 연동동의 사람들이 정효와 인찬이, 두 어린이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는 과정에 있다. 연동동의 좋은 이웃들은 다른 생명을 함부로 다치게 하는 사람들과 망설이지 않고 맞서 싸운다. 유골까지 등장하는 오싹한 작품이지만 읽는 내내 웃음을 머금게 되는 것은 함께 하고 있다는 든든함 덕분이다. 그들은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이나 다름없다.
두 작품이 선보이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지금 동화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전형적인 엄마와 아빠, 그 아래에서 성장하는 어린이가 아니면 결핍된 가정으로 여기는 차별적 태도는 어디에도 없다. 친구와 이웃이 새로운 가족으로 다가오면서 아이들의 소원이 달라지고 비밀이 바뀐다. 현실에서는 차별금지법이 논란이지만 문학에서는 이미 그를 넘어서고 있다. 어린이를 눈물 속에서 잠들게 하는 것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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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거짓말하는 어른』을 썼고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인어를 믿나요』, 『홀라홀라 추추추』 등을 옮겼다.
koejejej
202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