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박사 작가의 웹툰 『극락왕생』에 웹소설 풍 부제를 붙여보았다. ‘회귀하고 보니 하필 고3이네요.’, ‘인생 2회차 당산역 귀신’, ‘졸지에 호법신과 친구가 되어버렸습니다’. 2018년 11월, 이름조차 생소했던 오픈 만화 플랫폼 딜리헙에서 연재를 시작해 10개월 만에 매출 2억 원을 돌파한, 2019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에 빛나는, 언젠가 21세기 최고의 한국 만화를 선정할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 분명하다고 이 연사 자신 있게 외치는 이 작품을 혹시 아직 안 본 사람이라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아니, 글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되니까 『극락왕생』만은 꼭 보길 바란다. ‘제발 한국인이라면 『극락왕생』봅시다’라는 말도 있…지는 않고 방금 만든 거지만, 특히 한국 여성이라면 『극락왕생』을 보자. 자고로 『극락왕생』한 회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회만 본 사람은 없다 하였다. 한 회당 구독료 3,300원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놀라운 세계가 여기에 있다. 온라인으로 만화 보기에 익숙하지 않은 당신을 위해 얼마 전 단행본 1권도 출간되었다.
다시 회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서울 지하철 2호선, 합정에서 출발해 당산에 도착할 때까지 당산철교를 지나는 한 구간에만 나타나는 귀신이 있다. 꼭 비가 쏟아지는 날에 나타나 눈이 마주친 인간에게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를 부르게 하는 귀신이다. 지옥도를 다스리는 지장보살의 좌협시이자 자비 없는 워커홀릭 호법신 도명 존자는 감히 윤회의 고통을 피하려 드는 이 하찮은 귀신을 직접 징벌해 지옥에 끌고 감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다 관음보살에게 들키고 만다. 관음보살은 문제의 ‘당산역 귀신’, 스물여섯의 나이로 죽은 박자언에게 가장 중요한 한 해를 다시 살게 해주기로 하며 도명에게도 명한다. 박자언의 곁에 머물다 그 해가 끝나는 날 박자언을 극락왕생시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2011년, 부산의 한 여고에 다니던 박자언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날로 되돌아간다.
최근 몇 년 사이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인기인 ‘회귀·환생’ 설정은 주인공이 이미 알고 있는 판에 되돌아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능력을 ‘레벨 업’함으로써 강자가 되어 성공이나 복수 같은 목적을 이루는 이야기에 주로 쓰인다. 그러나 스물여섯의 기억을 가진 채 열아홉으로 돌아온 박자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자꾸 눈에 띄는 귀신들을 무서워하다가 가여워하게 되고, 결국 파트너가 된 도명과 함께 귀신과 사람을 돕기로 한다. 괴이하게 생겼지만 등을 긁어주면 얌전해지는 긁개풀녘, 물건을 훔친 뒤 사람 얼굴에 발도장을 찍어놓는 발도둑, 그림 속에서 자유를 찾아 살아가는 청화와 훼훼 등 개성 있는 귀신들의 사연은 흥미롭고 사랑스러운 한편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불교 미술을 공부한 작가는 탄탄한 작화와 장쾌한 연출력을 바탕으로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성취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박자언과 친구들의 입시에 대한 부담,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하는 몰이해, 성 정체성을 둘러싼 불안 등 십대 여성의 내면에 관한 입체적인 접근은 이 작품 속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가 주인공의 정서적 성장과 주변에 대한 정서적 환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면에서 『극락왕생』은 형식뿐 아니라 내용까지도 1990년대 황금기를 지난 한국 여성만화의 전통을 새롭게 잇는 작품이자 한국 만화의 새로운 정통이라 할 수 있다.
캐릭터가 굳이 남성이어야 할 이유가 없으면 남성 캐릭터로 만들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 캐릭터만 등장한다는 것도 『극락왕생』의 매혹적인 점이다. 신과 인간 모두가 여성인 세계를 만든 것에 관해 고사리박사 작가는 말한다. “전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오래된 팬덤 문화 같은 거라 생각해요. 그 팬덤 문화에서 여성은 늘 누군가를 숭배하는 존재로만 그려져요.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한국일보> 인터뷰)” 여성이 기본값인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의 외양과 성격은 마음껏 자유로워지고 친구, 모녀, 사제, 연인, 동지 등 여성 간의 관계도 다채롭게 펼쳐진다. 평범한 회사원 김선주가 모계로만 이어지는 용의 자손 중 한 명이라거나, ‘보라’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여성들이 귀신에게 잡혀 왔다가 기운차게 맞서 탈출하는 에피소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향한 자매애를 불러일으킨다.
이 이야기를 구상하던 시기인 2018년,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참여하며 ‘천둥 같은 상상’을 시작했다는 고사리박사 작가는 치유와 소통과 사랑이라는 예술의 역할을 믿는다. “불신만 해서는 뭔가를 바꿀 수 없어요. 앞으로도 세상은 바뀔 거고 바뀌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의 좋은 일들을 생각하고 그것을 계속 계승해나가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이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딜리헙> 인터뷰) 『극락왕생』11화 ‘산할머니’에서 전국의 산을 돌며 산신령 설화를 수집하고 다니는 교수 역시 꿈꾸는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얼마나 멋지게 뒤집어지겠어요! 여자애들이 좋은 걸 믿고 자라면!” 올해 2월, 1부 연재를 마친『극락왕생』은 2021년 2부로 돌아올 예정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좋은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보다 멋진 일은 세상에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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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