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불안이라는 말이 자주 들려온다.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의 병리적인 증상도 별로 낯설지 않고, 일상에서도 불안하다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얼마 전, 청년의 불안에 관해 강의하면서 지인인 청년들에게 지금 무엇이 가장 불안한가를 질문했었다. 돌아온 답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직업, 거주 등의 문제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삶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사람들은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불안하다고 다 죽는 건 아니지만, 극도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토마스 조이너라는 심리학자는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라는 책에서 자살의 가장 큰 이유를 ‘소속감’과 ‘효능감’과 연관지어 정리한다. 이 두 가지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유대감을 포함한 소속감은 내가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원초적인 동인이다. 이 욕구의 좌절이 건강, 적응, 행복에 수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다.” 조이너는 소속감이 삶을 유지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본다. 또 하나의 요인인 효능감은 사회에서 내가 필요한 몫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스로가 유능한 존재이고 타인들에게 짐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느낌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반면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느낌은 생명력을 고갈시킬 수 있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짐이 된다고 느끼면 삶에의 의지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될 때, 또는 내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아닐 때 삶의 의미가 사라지고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인데, 청년들이 답한 불안의 원인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분명 우리에겐 사회관계에 속하고 짐이 되기보다는 필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욕망의 열쇠를 누가 쥐고 있느냐이다. 그것은 누가 이루어주는 욕망인가.
“내가 갈망하는 사랑을 갖지 못했으니 이제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이 어린 조와 함께 내 삶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 “당신 없이는 살 수가 없어. 죽은 것과 똑같지.” 조이너가 소개하는 자살자들의 메시지이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사랑, 타인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 삶을 마감했다. 내가 사회관계 속에 속했다는 것, 내가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가? 그것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을 정해주는 건 항상 타인들이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 청년의 삶이 매우 잘 보여주고 있는 바이다. 독립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청년들은 사회에 속하고 그 안에서 어떤 가치 있는 역할을 하고자, 소속된 효능 있는 자가 되고자 무던히 노력한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일하면서 애쓴다. 하지만 그 결과를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이 아니다. 결정은 사회가 한다. 모두 함께 노력해도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기회.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구애와 똑같은 논리를 따른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에게 거절당하면 실연하는 것이다.
예전에 불안해서 숨이 막힌다며 찾아왔던 상담자가 있었다.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려워 죽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든다고 했다. 중년이었고 직업, 가족, 사회관계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잘 채워져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삶이 아무 의미도 즐거움도 없이 힘들기만 했다고 했다. 남들은 부러워하고 칭찬하는 것들이 자신에게는 다 부질없어 보인다고.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상담자들이 있었다. 잘 살아보려고 열심히 살았고 이룰 것은 다 이루었는데 정작 남은 게 없다는 것이다.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니 모두가 한결같이 했던 답이 있다.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사회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때로 거절당하거나 소외되거나 외면당하는 순간들을 겪게 된다. 무언가가 허락되지 않고, 혼자가 되는 순간, 스스로가 무력하고 무의미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러면 좌절하면서 불안이 엄습해온다. 이런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청년이 겪는 불안은 청년의 불안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사회에 소속되어 능력을 증명하며 극복한 불안은 시시때때로 다시 찾아와 숨통을 조일 수 있다. 그러면 우린 또 다시 애쓰고 노력해서 그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 사회가 나를 내치지 않도록, 내가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하지만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놓치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안에 있다. 지인 청년들이 직업, 거주 등이 불안정해서 불안하다고 하면서 덧붙인 말이 있다. 그런 것들이 안정된다고 해도 자신이 진짜 기쁘거나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될지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어떤 청년은 자신에겐 다른 꿈이 있다고 했고, 또 어떤 청년은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지만 적어도 돈 벌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을 꿈꾸진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사회가 정해준 자리에 들어가서 사회가 인정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소속감이나 효능감은 꼭 그런 것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사랑과 위로, 공감 같은 관계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마찬가지다. 그 사람들이 주던 사랑을 걷어가 버리면 나는 똑같이 좌절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 안간힘을 써야 한다.
사실 사회가 부여한 가치와 의미를 이루고 타인들의 사랑을 얻어 소속감과 효능감을 채우는 것이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큰 기쁨을 준다. 하지만 바로 그 큰 기쁨이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것을 조금 이루거나 이루다가 말지 않고 끝없이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받도록,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인정받도록 사회와 타인의 뜻을 살펴 눈에 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애초에 자신에게 중요했던 것, 자신이 원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종국에는 완전히 잃게 된다. 중년의 상담자들이 처한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타인이 부러워한다는 건, 타인의 눈에 좋아 보인다는 거다. 타인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이루려다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놓치게 된 현실.
프로이트는 아이의 불안이 부모가 주는 것을 잃게 될까봐 겪는 불안이라고 봤다. 그건 상실에 대한 불안이다. 잃을까봐 두려운 것. 반면 라캉은 아이가 진짜 불안해하는 것은 부모가 계속 줄까봐라고 말한다. 상실의 상실에 대한 불안. 사실 이건 불안의 종류라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하는 것의 문제다. 부모가 계속 주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아이라면 아이는 부모의 맘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에 집중할 거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아이로 머물면서. 하지만 부모가 계속 줄까봐 두려워하는 아이는, 부모가 주지 않을 때가 오면 찾아나서게 될 거다. 스스로 즐기고 의미를 만들 수 있는 것을. 그렇게 해서 아이는 독립적인 주체로 탄생하게 된다. 따라서 상실이 상실된다면, 즉 상실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라지는 건 주체다. 엄밀히 말해 아이는 ‘자기 자신’으로서 태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진짜 불안은 이처럼 주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아이의 모습을 관찰한 건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어린 손자가 자신을 혼자 두고 나간 엄마를 찾으며 엉엉 우는 모습을 봤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이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 혼자 놀면서 좋아하는 것이었다. (실이 감겨있는) 실패를 던지면서 ‘간다’고 말하고, 당기면서 ‘온다’고 말하는 놀이였다. 아이는 엄마 대신 실패를 찾아 엄마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놀이로 승화했다. 엄마가 없어도, 아니 엄마가 없는 덕분에 아이가 엄마를 대신 할 물건과 놀이를 찾아내게 되었다.
우리가 불안에 맞서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거다. 청년의 불안이 중년의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청년은 사회가 주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가 주는 것을 대신할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타인에게서 더 이상 나를 위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에 휩싸이게 될 거다. 프로이트가 말한, 대상을 잃을까 하는 불안이다. 하지만 계속 그것에 매달려만 있게 된다면 우리는 더 큰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라깡이 말한, 내가 죽지 않을까 하는 불안.
* 지금까지 <이수련의 엇갈린 관계>를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수련(정신분석학 박사)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정신분석 임상을 실천하고 있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썼고,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