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수 저 | 민음사
엄마는 희한한 사람이다. 불쌍하다는 이유로 대통령(“아버지도 그렇게 잃고 혼자 남겨진 게 가엽지도 않니?”)을 뽑고, 안쓰럽다는 이유로 또 다른 대통령(“사법고시 9수면 본인도 부모님도 얼마나 힘들었겠니?“)을 뽑았다. 지자체의 장이 보수 정당에서 나오길 바라며, 두 딸에게 그쪽으로 표를 던지라 강요한다.
그러다 텔레비전에서 세월호 관련 뉴스가 나오면 “아이들이 불쌍하다”며 금세 눈물짓고, 그 일에 무심한 사람들을 비난한다. 또, 예전에는 딸이 상주가 될 수 없었다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게 말이 되냐며 분노한다. 나 죽었는데 네가 상주 못한다고 하면 관에서 뛰쳐나올 거라고 흥분해 덧붙인다.
엄마의 말하기는 ‘감정’에서 출발한다. 나는 엄마 내면에서 널뛰는 감정을 따라잡기 버겁다고 자주 느낀다. 감정을 무시하고 이성에 권위를 부여하는 세계에 환멸을 느끼다가도 엄마와의 대화에서 나는 철저히 이성적인 사람인 척 흉내를 낸다. 나는 엄마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며 건조하게 대꾸한다. 그래야 우리 둘의 대화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으니까. “그래, 엄마 말이 다 맞아.”
그러다 하루는 엄마의 보수 정당 찬양에 기가 차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엄마 이상한 뉴스 그만 보고 책 좀 읽어!“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대학 나오고 책 좀 읽었다고 유세 떨지 마. 엄마가 대학을 가기 싫어서 안 간 줄 알아? 너네 키우느라 책도 못 읽은 거야, 알아?”
『동료에게 말 걸기』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던 저자는 유독 정치가 화제로 오르면 싸늘해졌던 분위기를 회상한다. 어느 날, 대화가 말싸움처럼 끝나자 저자는 “책 한 권 안 읽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라고 쏘아붙인다. 이에 아버지는 반문한다. “그럼, 문맹인 내 친구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저자는 이날의 ‘실패한 대화’를 떠올리며, 그가 무의식적으로 행한 ‘구별 짓기’가 “대화 불가능한 절대 타자“라는 구획을 만들어냈다고 고백한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바깥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가족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저자에게 ’문맹‘은 친구로 만나기 힘든 존재이지만, 1950년대 경남 진영읍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에게 문맹은 낯설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학을 나온 여성‘은 나의 시간대에서야 익숙한 일이지, 1960년대 청주라는 세계를 살아온 엄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동료에게 말 걸기』를 읽다보면, 나의 ‘실패한 대화’들이 자주 떠오른다.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된 친구와의 대화, 계급이 다른 동료와의 대화, 종교가 삶을 구원했다고 믿는 사람과의 대화, 타인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만으로 자기 삶을 구성하려는 사람과의 대화, 그리고 독자와 작품을 학문적 틀 안에서만 해석하려는 사람과의 대화. 이들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려 애쓰지만, 실타래처럼 꼬이고 또 꼬인 말들 속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애초에 서로의 언어가 닿지 않는 세계에서 ‘대화’라는 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대화는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일이 아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맞추며, 침을 삼키거나 코를 만지거나 손깍지를 꼈다 푸는 신체의 언어를 포함한다. 동시에 나의 취약함과 게으름, 편견과 수치를 언어로 드러내는 내면적 행위이자,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듣고 말하겠다는 결심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관계의 실천이다.
대화가 ‘종합 예술’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먹고살기 바쁜 시대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게 지긋지긋하게 실감된다. 특히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더욱 피곤하다. 피로해진 사람은 종종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이성’이라는 녹슨 무기를 꺼낸다. 그때부터 대화는 더 이상 대화가 아니다. 대화는 ‘승리’를 위한 전장이 되고, 사람들은 감정을 배제한 채 논리와 자기만의 경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내가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긋지긋한 대화를 피하려고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하거나 나의 논리가 무적인 양 화를 내며 ‘나처럼 책을 읽어!’ 하는 일 따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동료에게 말 걸기』의 저자 박동수는 이 피로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를 “계몽의 대상”이나 “적”이 아닌 “동등한 협상의 주체”이자 “잠재적 동료”로 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 그가 말하는 연습은, 상대가 가진 언어와 기준을 우리 대화의 주제로 삼아 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 극우 세력 지지자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우리도 그들처럼 감정으로 정치를 판단하고 있다. 단지 깊은 이야기가 다를 뿐이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 접근은 대화를 승패의 전장터가 아닌 이해의 과정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다만, 그가 설계하는 대화가 가능한 배경에는 그 자신의 위치가 놓여 있다. 남성이자 철학책 편집자로서 그가 갖는 사회적 권위는 대화의 장에서 그를 보호하고, 그 그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내가 맞닥뜨릴 대화와는 분명 다를 결을 가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책은 여전히, 대화를 시도하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지침서다.
다시 엄마와의 실패한 대화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대꾸할 수 있을까. 엄마는 그 사람이 왜 불쌍해 보였어? 그 사람을 보면 엄마나 할머니의 처지가 떠올라서 그래? 같은 질문들을 조심스레 던져볼 수 있을까. 엄마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지긋지긋하고 피곤한 대화를 향해, “경계를 열고 내 치부를 드러내며, 상대방의 치부 속으로 들어갈 위험을 감수”2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1 『동료에게 말 걸기』, 195쪽
2 같은책, 92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동료에게 말 걸기
출판사 | 민음사
구구 (노혜지)
2017년부터 독서모임 공동체 ‘들불’을 운영해온 모임장. 들불이라는 이름은 2019년 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2020년부터 도서 큐레이션 레터 ‘들불레터’를 발행 중이며 동료와 함께 『작업자의 사전』(2024, 유유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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