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어야 할까요? 마법을 마음껏 부리고 하늘을 마음껏 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우리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 책장을 덮고 나면 대한민국에서 치열한 삶을 사는 평범한 나와는 다른 세계 속 사람이라는 사실이 와닿아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소설은 내가 사는 세계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죠. 정세랑 작가는 최근 출연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정세랑 작가는 세상을 구할 초능력을 지니지 않아도 우리 일상 속에서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갔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여기, 어쩌면 당신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정세랑 작가의 다채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 네 권을 소개합니다.
순도100% 무해한 사랑 이야기를 찾는다면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98쪽)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101쪽)
너를 만나기 위해 2만 광년을 왔다는 말 만큼 순수하고 진실된 고백이 있을까요? 사랑 한번 마음껏 하기도 힘든 세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걱정할 것이 너무 많아요. 상대방이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지 내가 가진 사랑의 크기가 더 큰 것은 아닐지 불안해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죠.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 경민, 아니 제대로 말하면 경민이었던 외계인은 한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우주를 건너옵니다. 고백만큼은 얼굴을 마주 보며 해야 한다면서요. 이 소설은 경민의 여자친구 한아가 평소 그녀의 사랑과 애정을 당연하게 여기고 방치했던 모습이 사라진 채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말하는 경민을 마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과연 한아는 경민의 모습을 한 외계인과의 사랑을 선택할 것인지 과연 나는 남자친구의 모습을 한 외계인과의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지 질문하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쓰지 않는 의류 자재를 모아 옷으로 재탄생시키는 일을 하는 의류 리폼 디자이너인 한아의 직업의식을 통해 우리 지구에 대한 깨끗한 사랑 역시 엿볼 수 있죠. 청량한 SF물과 뻔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을 만나고 싶다면
“안은영은 여린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오래 들여다보고, 복잡한 싸움을 지치지 않고 해나가려면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묻는 주인공이니까요.”(작가의 말 중에서)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니, 그것보다 귀찮은 일은 없죠. 소설 속 많은 히어로들은 지구를 지키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위험한 악당을 물리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훨씬 복잡하고 폭력적입니다. 인명사고가 난 다음 날 같은 공사현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동료를 죽인 크레인을 보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며 타죽은 성판매 여성들이, 장애나 성별로 인해 차별 받아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넘어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와 억압적인 사회구조가 존재하죠. 잔인하게도 안은영은 이런 세상 속에서 하필 젤리 형태의 괴물을 보고 만질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내게 왜 이런 능력이 있나 한탄하다가도 위험에 빠진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행동합니다. 그녀의 무기인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은 그녀의 질주에 경쾌함을 더하기도 하죠. 뻔한 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소설 속 안은영의 인간적인 면모에 한 번 반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사람들을 향한 그녀의 따뜻한 시선에 또 한 번 반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학교에서 보건교사라는 직업이 존재감은 크지 않아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처럼 소설을 읽다 보면 세상 어딘가에도 안은영처럼 묵묵히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는 삶의 아이러니
“살아있는 게 간발의 차이였다.”(102쪽)
“어차피 우리는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없이.” (381쪽)
때론 삶이 누군가의 교묘한 장난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제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버림받기도 하고 절대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던 사람에게서 큰 위로를 받기도 하죠. 기억의 저 너머에 있던 초등학교 동창이 대학교 동기와 친구일 때도 있었습니다. 『피프티 피플』에서 소도시의 병원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하는 과정을 보다 보면 평소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바라보게 됩니다. 또한 대한민국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 또한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유가족을 대하는 법의 무심함, 가정폭력과 불법촬영 이슈와 같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관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소설은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작은 용기가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 큰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죠. 『피프티 피플』이라는 제목과 다르게 사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51명이라는 소소한 재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주인공인 소설의 주인공일 수도 타인의 소설 속 신스틸러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누구의 소설에 등장하시겠습니까?
20세기 여성이 21세기 여성들에게 남긴 따뜻한 시선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내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331쪽)
명절이 다가오면 한숨이 절로 납니다. 하루종일 상다리 부러질 정도의 음식을 준비할 생각 때문이죠. 이 소설은 가장 심시선의 죽음 10년 이후 자식들이 그녀의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기로 정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행 동안 시선과 함께 한 순간들을 생각하며 각자 그녀를 애도하는 방식은 애정이 가득하고 다채롭습니다. 개인이 기억하는 사람의 조각이 모두 다른 점 역시 눈여겨볼 만한데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한 명의 여성 예술인보다 누군가의 아내로만 평가되었던 심시선 씨가 남긴 글들과 그 글들을 읽으며 자라온 자식들의 기억들은 우리 사회에서 상처받으며 자라온 딸과 어머니에게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넵니다. 가장 따뜻한 곳에서, 가장 뜨거운 기억들과 함께 예술인 심시선 씨의 흔적을 밟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는 모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내가 낸 작은 목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큰 의미 없이 베푼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는 이 능력을 잘 눈치채지 못합니다. 정세랑 작가는 이렇게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뜻한 시선을 보냅니다. 간절히 바라봅니다. 여러분도 정세랑의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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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지(예스24 서포터즈 11기)
'인생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빗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