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언 칼럼] 피와 눈물로 흠뻑 젖은 왕좌
우리에게도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록에 재미없게 박제되어 있던 몇 줄의 역사를 이토록 우아하고 시적으로 증강시키는 상상력이 존재한다. 그게 김진의 『바람의 나라』다.
글ㆍ사진 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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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국사 시간, 삼국 시대에 대해 배울 때 가슴이 가장 두근거리는 파트는 언제나 고구려였다.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강의 신 하백의 딸 유화가 낳은 아이 주몽이 세운 나라, 이 반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가장 척박한 땅에 자리 잡았으면서도 가장 용맹했으며, 반도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대륙을 향해 끝없이 도전했던 나라. 고구려의 유명한 왕들에 대해서도 배웠다. 주몽이라 불렸던 동명성왕 다음의 2대 왕은 <황조가>의 주인공 유리왕이었다. 그 이후로는 겅중겅중 건너뛰며 고국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거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이들 위주로 배웠다.  

수업 시간에 따로 길게 배우지 못해 잘 알지 못했던 왕 중에 고구려의 3대 왕,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있었다. ‘전쟁의 신’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피비린내와 쇠 냄새가 진동하는 차가운 그 이름 대신, 김진의 만화 『바람의 나라』를 읽고 나면 마치 그의 누나 세류공주처럼 다정하게 무휼, 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사람 말이다. 



1992년 시작되어 2021년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채 방대한 분량으로 현재진행중인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만화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은 무휼이다. 유리왕의 아들, 호동왕자의 아버지. 여기서 그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점이다. 순리대로라면 그가 고구려의 3대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도절과 해명이라는 손윗형제들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 그들은 죽었다. 이중 해명 태자의 경우 보통 죽음이 아니라 자살이다(도절 태자는 부여에 인질로 가는 것을 거절한 뒤 얼마 후 ‘급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수상쩍은 정황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아버지 유리왕이 ‘죽어라’라고 명령하여 목숨을 끊은, 자살의 형태를 빌린 타살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친족살인인 것이다. 조선 시대의 영조와 사도세자 이전에 고구려의 유리왕과 해명 태자가 있었다. 


“유리왕 28년 봄 3월, 태자 해명은 부왕의 명으로 여진의 동원에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그 날에 부딪혀 죽으니 그때 나이 21세였다. 동원에 태자의 예로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워 그 땅을 창원(愴原)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편)


『바람의 나라』에서 해석하는 유리왕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비견할 만큼 의심 많고 어리석은 폭군이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후레자식’이라고 불리며 성장한 것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고, 아버지에게 새롭게 인정받을 꿈에 부풀어 그를 찾아갔을 때 의붓형제 온조와 비류에게 도둑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해 분노했다. 주몽의 신하들도 그를 무식한 떠돌이 취급하며 경멸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아비 없이 자라던 유리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내가 왕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내가 왕이라는 걸 끊임없이 가르쳐 주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자식들에게조차 늘 눈을 홉뜨고, 자식들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을러대고, 사랑과 의무를 혼동하는 와중에 고독하고 광포해져 갔다.   

(<황조가>의 뒷이야기인)치희를 내쫓은 벌로 소박맞다시피 한 화희의 아들로 등장하는 해명 태자는, 왕의 운명과 함께 일찍 죽을 운명도 타고났다. 그를 자신의 왕이라 믿고 따랐던 이들이 무참하게도, 해명은 자신의 죽음을 언제나 예감하고 창을 날카롭게 갈고 있었다. 죽을 때 흉하게 죽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이자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아들이자 신하의 의무로서. 그는 죽은 뒤에도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 고구려와 부여의 국경 부근을 떠돌며, 인간이었던 시절의 꿈을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라도 이루고자 한다. 죽은 이는 어서 이승을 떠나야 하겠지만, 해명의 집념은 아버지에 대한 의무에서 훌쩍 벗어난다. 여기서 해명의 뜻을 대신 이루게 될 사람이 바로 무휼이다. 

무휼은 생각한다. “그건 원래 나의 일이 아니었고”  “왕의 세 번째 왕자로서의 보통의 삶을 가질 수도 있었고, 형들과의 우애, 이런 것도 맛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배다른 두 형들이 차례로 죽은 다음 자신이 태자로 책봉되었을 때, 그리고 또다시 의심 많은 아버지 유리가 열한 살에 불과한 아이인 자신을 부여와의 전투에 앞장서라고 내몰았을 때 그는 결심한다. “날 이기라고 이곳에 보내지 않으셨는지도 몰라. 그래도 질 수는 없잖아? 난 도절 형님이나 해명 형님처럼 그렇게 죽진 않겠어! 난...그들과 달라. 난 끝까지 싸우고, 그래서 이길 거야!” 열한 살 무휼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눈 속의 불길을 감추고자 눈을 내리깐 다음, 자기 몸집만한 칼을 들고 전투에 나가 기어이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호동 왕자가 등장한다. 호동은 무휼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무휼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인 연, 부여 대소왕의 수많은 조카손녀 중 하나였으며 고구려 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원비’는 되지 못하고 처음부터 ‘차비’로 시집왔던 어린 연이 낳은 아들, 그리고 그 연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아들이 호동이다. 


“나는....내 아이가 태어나면 절대로, 내 아버님과 같은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사랑하면서도 화를 내고, 미워하면서도 자상하다.

후회하고 눈물 흘리는 사랑. 죽음을 대가로 하는 마음의 감정. 의심하여 살피는 마음.

그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다. 

나는 절대 그런 식으로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역사 속에 기록된 사실을 알고 있다. 차비의 아들이었던 호동은 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낙랑의 공주를 유혹했고, 공주로 하여금 나라를 배신하여 자명고를 찢도록 조장했고, 그로 인해 공주가 죽음의 처벌을 받은 것을 모르는 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동은 끝내 왕이 되지 못했다. 무휼의 원비가 자신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올리기 위해 호동을 모함했고, 호동은 결국 얼굴도 모르는 삼촌 해명태자처럼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결을 택한다. 



30여 년에 걸친 『바람의 나라』 속 장대한 세월을 관통하는 정서, 그리고 읽는 이들의 가슴을 가장 저리게 만드는 정서가 여기서 기인한다. 절대로 그리하고 싶지 않고 그리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소위 ‘대의’라 불리는 국가의 이익 관계와 권력 싸움은 개인의 감정을 언제나 넘어서고 부자 관계라는 혈연마저 지독하게 뒤틀어버린다. 심지어 거기에는 하늘이 점지한 살(殺)이 껴버렸다는 운명론적 체념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무기력하게 얼어붙게 만든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의 방향이 그렇게 되도록 몰아간다는 두려움이, 『바람의 나라』의 슬픔을 더욱 강렬하게 응고시킨다. 


“그래, 그는 왕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그 앞에 서면 고개를 숙이고 떨게 되었지. 그는 왕이었다. 그는 왕이었으므로 타인을 시켜 자기의 자식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그가 왕으로서 명령했기에 아무도-목숨을 걸고 그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모든 왕들은 불행하다. 

사랑받아야 할 것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므로.”


『바람의 나라』는 1세기에 벌어진 이야기다. 인간의 문명이 자연을 차차 이겨내고 있을 때, (아직까지는)천제(天帝)와 그 수하들이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혹은 인간에게 매혹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일이 적지 않았을 무렵, 죽은 자가 여전히 구천을 떠돌며 산 자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투영시키던 시절, 청룡과 주작과 봉황, 백호 등의 신수(神獸)가 자신이 선택한 인간과 목숨을 함께 하기로 맹세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판타지와 리얼리티가 서로를 보완하거나 달래며 역사를 만들어가고, 그 와중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겠다는 야심에 끼어든 사련(邪戀)이 파멸을 예비한다. 아주 먼 과거의 거칠고도 눈부신 시절에 대한 어마어마한 상상력과, 그 누구도 평범한 행복을 감히 꿈꿀 수 없던 잘못된 사랑의 엘레지가 어마어마한 피가 흐르는 살육전 너머로 유려하게 펼쳐진다. 우리에게도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록에 재미없게 박제되어 있던 몇 줄의 역사를 이토록 우아하고 시적으로 증강시키는 상상력이 존재한다. 그게 김진의 『바람의 나라』다. 



[ 연재] 바람의 나라 SE 1~2부 73화 (완결)
[ 연재] 바람의 나라 SE 1~2부 73화 (완결)
김진 저
이코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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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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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e

2021.06.05

바람의 나라로 학창시절, 무휼과 해명앓이를 해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꾸준히 한권씩 사모으던 작품은 완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지쳐버렸고, 기억 속에서도 잊혀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봅니다. 여전히 왕으로서 지독한 외로움과 저주같은 운명의 연쇄를 끊지 못하는 처절하게 혼자인 왕 무휼이 떠오르고, 연, 세류, 호동, 해명, 사신들이 살아숨쉬는 바람의 나라라는 거대한 세계를 잊지않고 있었어요. 부디, 이 작품이 영원히 추억으로 남지않도록 완결을 꼭 보았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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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범죄소설』, 『문학소녀』 등을 썼고,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죽이는 책』 등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