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으로 추운 어느 겨울에 작품을 쓰기 시작한 한 작가는 이런 문장을 쓴다. “태양은 견딜 수 없는 추위와 더위로써 땅을 지배하고, 북에서는 노쇠한 겨울을 불러내고, 남에서는 하지의 더위를 가져오도록 움직이고 그렇게 비추라는 지시를 비로소 받았다.” 그는 존 밀턴이었다. 맞다. 1667년에 『실낙원』을 쓴 존 밀턴 말이다. 메디치상 수상자 아미타브 고시는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다’라는 부제가 붙은 책 『대혼란의 시대』에서 “밀턴이 그리는 허구의 세계는 그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추위와 더위의 처분에 맡겨진 ‘죽음의 세계’였다”고 해석한다. 350년 전에 기록된 잃어버린 낙원이 기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지게 되는 셈이다.
기후의 대재앙이 이야기 속에 등장한 것은 역사가 오래된 일이다. 1939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작품 전체의 지배적인 주제는 아닐지라도 주요 정서로 기후재난적 요소를 도입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기후 이민자들 이야기 아닌가. 좀 더 시간적 거리를 좁혀본다면, 1960년대 이후 여러 작가들이 기후 대재앙을 상상했고, 그 상상력을 이야기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와 마거릿 애트우드 등의 작가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201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은, 미국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댄 블룸에 의해 ‘클라이파이(Cli-Fi, 기후소설)’라는 장르로 규정된다.
이런 명명을 독자들이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그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체험 가능한 현실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사라질 도시나 섬의 이름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어느 여름 알래스카 기온이 섭씨 32℃를 기록하고, 무더위가 한창이던 미국의 한 도시가 하루아침에 폭설로 뒤덮이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중이다. 따라서 SF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이 소설 『뉴욕 2140, 맨해튼』(국내 미출간)에서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뉴욕이 거대한 해상도시로 변모한 장면을 그릴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풍경을 과장이나 허황된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후 위기의 관점에서 이미 미래의 혼란이란 지나치게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클라이파이 소설 『Odds Against Tomorrow, 승산 없는 미래』(국내 미출간)를 쓴 너새니얼 리치의 귀띔도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우리가 마주할 미래가 “최악의 두려움이 정기적으로 실현되는 시대”라고 언급한 바 있다. 클라이파이는 기본적으로 SF소설의 디스토피아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기후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전망까지도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클라이파이의 성격을 유스토피아(Utopia Distopia)라고 말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 클라이파이는 미래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지금의 기후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에 매우 현재적이다. 현재적인 소설들이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매우 정치적인 힘을 갖고 있기도 하다. 클라이파이는 불확실하고 우울한 미래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후 문제 그 자체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자극한다. 문학은 한발 앞서서 세계를 전망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또한 세계의 한복판에서 현실을 고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클라이파이는 이 둘이 하나의 장르 안에서 결합하고 있는 오늘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양상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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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