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서영은 SF와 판타지를 쓴다.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는 SF를 발표해왔고, 소설 외에도 노동과 젠더가 밀접하게 뒤얽히는 지점들을 파고드는 글을 자주 쓰고 있다.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 필명 앤윈으로 「종의 기원」과 「성문 너머 코끼리를」 게재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아직은 끝이 아니야』, 『이웃집 슈퍼히어로』, 『여성 작가 SF 단편집』, 조선스팀펑크연작선 『기기인 도로』 등의 앤솔로지에 참여했다. 혼자 쓴 책으로 『유미의 연인』, 『악어의 맛』,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가 있다.
책의 재미를 느꼈던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어릴 적엔 수업 시간에 집중을 잘 못 했습니다. 망상이 많은 아이였어요. 멍하니 창밖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상황을 상상하거나 책상 아래로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망상과 독서는 짝이 잘 맞는 한 패여서, 책을 읽을수록 망상은 더 깊고 풍성해지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빠 책장에서 꺼내서 마르고 닳도록 읽은 책들이 몇 권 있습니다. 90년대에 인기 있던 시드니 셀던,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 고우영의 십팔사략, 마광수 교수의 에세이…… 지금 돌이켜보니 초등학생이 읽기에 적절한 책들은 아니었는데, 꼭 단계에 맞춰서만 책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런 복합적이고 되바라진 독서 경험이 지금 글을 쓰면서 살게 만든 것 같기도 합니다.
책 읽는 시간은 작가님께 왜 소중한가요?
요즘에는 게임, 영화, 드라마, 많은 종류의 매체들이 서사를 반영하고 있지요. 드라마 보는 것도 좋아하고,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해요. 하지만 글자로 세상을 읽는다는 건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행간'이라는 개념이 있죠. 글씨와 글씨 사이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빈 공간이 있어요. 행간을 눈으로 걸어가면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여러 가지를 만들어냅니다. 영상매체에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사고의 춤이 그 빈 공간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든 사고를 사실 언어로 하지요. 문자 언어는 그 중에서도 특수해서, 문자 언어로 생각을 전개한다는 건 그저 생각을 전개하는 것과 아주 다른 독특한 확장성을 가집니다. 몰입하는 건 언제나 행복하지만, 그 빈 공간에서 몰입하는 건 차원이 다릅니다. 어쩌면 그건 몰입임과 동시에 비몰입이예요. 빠져들면서 밀려 나오는 걸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 독서 말고 또 다른 무엇이 이런 기이한 몰입감을 줄까요. 저는 아직 못 찾았습니다.
요즘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화성과 관련한 청소년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 선생님께서 자꾸 화성에 대해서 새로운 역사를 쓰시는 바람에 쓰는 게 여러모로 피곤해지고 있긴 합니다만……. 화성에 이주했을 때 인간의 삶에 대해서 다양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2030 화성 오디세이』, 『화성과 화성 생명체의 탐사』, 『BIG QUESTIONS MARS』, 『화성이주 프로젝트』 등을 읽고 있습니다. 읽은 책은 이 중에 두 권밖에 없고, 나머지는 “언젠가 읽어야 하는데” 책장 안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최근작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최근에 낸 책은 아작 출판사에서 출판된 단독 단편집 『유미의 연인』과 앤솔로지 단편집 『기기인 도로』입니다. 『유미의 연인』은 김보영 작가님께서 “투쟁하는 이들의 로맨스”라고 요약해 주신 바가 있는데요.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무언가에 공정할 수 없다는 의미와 같을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편 드는 사랑을, 그래서 편 드는 사람과 바닥까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해왔습니다. 그게 가능하건, 가능하지 않건간에요. 그 상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세상일 수도 있고, 계급일 수도 있겠지요.
『기기인 도로』는 조선 스팀펑크 앤솔로지입니다. 스팀펑크는 많은 분들이 아실 장르인데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나 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를 연상하면 정확할 거예요. 빅토리안 시대의 '증기기관'이 끝까지 발전한 SF 세계관입니다. 그 SF 세계관을 조선조에 이식한 이야기를 작가 5명이 함께 써 보았습니다. 제가 쓴 단편은 『지신사의 훈김』인데요. 홍국영과 정조의 이야기에 스팀펑크를 끼얹어 보았습니다. 저는 조선조가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국가라는 점에 늘 흥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 근간에는 완전한 이데올로기를 구현한 인간인 '군자'가 모두 되어야 한다는 성리학이 자리하고 있지요. 과연 기계로 되어 있는 인간은 '군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다 쓰고 나니 또 로맨스가 되어버렸지만요.
샬롯 브론테 저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인 에어』의 모든 부분을 다 사랑합니다. 주인공 제인 에어는 고집스럽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죠. 그야말로 로맨스 소설에 가장 적합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쉬이 로맨스 소설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야기라고 오해하지만, 로맨스 소설이야말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맹렬한 쟁투가 소용돌이 치는 서사지요. 그 쟁투 사이에 남성 주인공이 여성 주인공의 특별함을 발견해 내는 과정이 로맨스 서사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제인 에어는 이 과정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주인공 제인 에어의 독특한 개성을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방적' 소설이 됐지요.
각국의 제인 에어 표지를 검색하는 이상한 취미가 있는데요. 제가 선호하는 종류의 표지는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가운데 그 표지에 버사 메이슨의 기운이 어느 정도 서려 있어야 해요. 둘의 사랑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누군가의 끔찍한 착취와 죽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걸 벗어날 수 없음에도 그들은 그 위에서 삶을 지속하기로 선택합니다. 잔혹하지만 강고하지요. 제인은 생명력이 있는 캐릭터예요. 로체스터의 “제인, 제인, 제인!” 같은 말을 다른 남자에게 청혼받는 자리에서 환각으로 들을 수 있을 만큼. 삶이 지치고 괴로울 때면 세인트 존에게 청혼받는 부분을 다시 읽곤 합니다. 그러면 청혼을 고민하면서 새벽 정원을 산책하는 제인의 모습에서, 은방울꽃의 풀냄새에서, 제인의 발목에 스치는 새벽이슬에서, 끝내 들리고 만 로체스터의 환청에서 저는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곤 합니다.
마지 피어시 저
활동가이기도 한 마지 피어시의 SF소설입니다. 70년대를 배경으로 멕시코계 미국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코니'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가난이 어떻게 인간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하는지 풍성하게 읽어낼 수가 있지요.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로 많이 독해되고, 저 역시 페미니즘 소설로서 이 소설을 좋아하지만, 이 소설은 '페미니즘'이라고 우리가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객관성이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 '코니'는 아이를 한 명 낳았지만, 그 이후에 남편에게 맞다가 유산을 하게 됩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병원에 가자, 의사는 코니와 상의도 없이 코니의 자궁을 제거해버립니다.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코니는 남편에게서 도망쳐서 빈곤에 시달리며 아이와 살다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아이에게 신발을 집어던지고, 그렇게 양육권을 박탈당합니다. 코니의 조카가 남편에게 맞고 있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조카의 남편의 머리를 와인병으로 후려쳤다가, 예전에 아이에게 신발을 집어던진 게 소급적용되어 '정신병자'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이렇게까지만 서술하면 정말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지만, 정신병원에서 코니는 새로운 세계를 만납니다. '시간의 경계'에 서게 되는 거지요. 코니의 삶에 미래의 시간선에서 온 이들이 겹쳐지고, 미래의 시간선에서 온 이들은 코니의 손에 유토피아적 미래와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2권의 적지 않은 분량은 코니의 슬픈 삶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많은 경험을 토대로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코니의 결단을 다루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이야기는 다르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코니가 정말로 정신병자라서 환상을 보고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독자는 코니의 진실과 코니를 세상에서 읽어내려가는 객관적 '수치'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목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진실이 무엇인지, 인류의 미래라는 거대한 결단 앞에서 절실하게 다시 돌아보게 되지요. 마지막 장면은 오로지 '객관적' 기술로만 쓰여져 있습니다. 코니에 대한 보고서거든요. 마지막 장을 부여잡고 손을 덜덜 떨며 울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 저
차이나 미에빌의 바스라그 연대기, 그 첫 번째 작품입니다. 바스라그 연대기는 바스라그라는 가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하는 연작 소설입니다. 스팀펑크 세계관 속에 특수한 마법이 함께 들어가서 SF와 판타지 사이를 오가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냈는데요. 그 첫 번째 소설인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아고라 출판사에서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으로 나왔을 때부터 정말 마르고 닳도록 여러 번 읽었습니다.
뉴크로부존이라는 독특하게 망가진 독재국가 안에서 개개인들이 삶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쟁취하거나 실패합니다. 타락한 권력은 민중들에게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그 중에서도 사이보그로 만드는 처벌은 이 소설의 가장 주된 이미지를 형성하고, 아주 끔찍하게 매력적입니다. 이 소설에서 특히 사랑하는 두 캐릭터가 있는데요. 첫 번째 캐릭터는 '린'입니다. 린은 케프리입니다. 케프리는 곤충입니다. 아래턱이 벌어지는 걸로 봐서 씹는 입을 가진, 아마도 풍뎅이나 딱정벌레 과의 곤충인 것 같아요. 이 종족의 수컷은 그저 곤충입니다. 하지만 암컷은 머리만 곤충일 뿐 몸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컷은 단지 짝짓기를 하고 가만히 누워서 대접받으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건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암컷들 뿐이죠. 당연하게도 일은 오로지 암컷들만 합니다. 암컷들에겐 생계를 이어나갈 능력 뿐만 아니라 높은 지능도 있지만, 만일 이 높은 지능을 가지고 암컷들이 이 작은 곤충의 세계를 탈주할 경우 케프리라는 종족의 대는 끊겨버릴 수 있기에 케프리 종족 내에는 강력한 규율이 있습니다.
'린'은 다른 케프리들에게 살해당할 걸 각오하고 자신의 세계를 탈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곤충 머리가 뿜어내는 분비물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로 살아갑니다. 곤충이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를 시작합니다. 벌어지는 자신의 곤충 입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직하게 타자와 관계를 맺습니다. 소설은 위험에 빠진 이 '린'을 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요. 소설 속에서 린이 묘사되는 방식은 분명 소름돋고 끔찍하지만 동시에 아름답습니다. 저자인 차이나 미에빌은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고 끔찍하게 여길 법한 여러 이미지들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해내는 놀라운 작업을 매 작품마다 해내는데요. 음식을 먹는 린의 모습은 그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소설 속에서 한 여자아이는 처벌을 받습니다. 18세기 영국을 떠올리게 만드는 가난한 할렘가에서 자란 16세 여자아이는 아이를 낳습니다. 세상 누구도 그 아이를 함께 키워주지 않는 복지의 결여 상태에서, 육아를 할 줄도 모르고 빈곤에 시달리던 소녀는 우는 아이를 달래도 달래도 울음이 그치지 않자 그만 울라고 베개로 아이를 짓눌러 죽여버립니다. 명백한 사고였지만 뉴크로부존은 이 소녀의 이마에 죽은 아이의 팔을 이식하는 형벌을 내립니다. 16세 소녀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깰 때마다 자신이 죽인 아이의 팔을 보며 자신의 죄를 떠올려야 하게 된 거지요.
이 이미지를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 소녀는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바스라그 연대기의 마지막 편인 『강철의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머리에 아이의 팔을 달고 있기에 그녀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대신 황소의 가면을 쓰고 뉴크로부존의 타락한 정치세력에 맞서는 레지스탕트가 됩니다. 바스라그 연대기만으로 차이나 미에빌은 21세기의 톨킨이 되기 충분하고도 남을 거예요. 그 자신은 톨킨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그가 싫어하는 그 모든 부분을 제거한 상태에서 훌륭한 신화를 완성해냈습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 저
스티븐 제이 굴드를 정말 좋아합니다. 아마 소위 좌파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이름을 들어봤을텐데요. 아니, 꼭 정치적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대중적 글쓰기를 하는 과학자를 말하자면 스티븐 제이 굴드, 리처드 파인만, 올리버 색스 정도는 많이들 들어보았겠네요. 저 역시 이 세 과학자를 무척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스티븐 제이 굴드는 특별합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연구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한 번도 자신의 연구에서 정치성을 배제하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풀하우스』, 『판다의 엄지』, 『힘내라 브론토 사우르스』 등 재미있는 책이 정말 많은데, 그 중에서 『판다의 엄지』를 꼽은 건 이 책이 본격적으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진화론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학설 중 가장 유명한 학설로는 역시 '단속평형론'이 있겠네요. 천천히 도태되는 개체를 멸종시켜가며 진화가 지속된다는 계통점진이론에 반대되는, 상당기간 변화 없이 안정적인 시기를 거치다가 일종의 돌연변이가 발생하면서 급격하게 진화가 발생한다는 이론이 단속평형론입니다. 굴드의 단속평형론은 굴드가 언제나 주장하던 다양성에 대한 이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개체들이 있고, 그 개체들의 진화는 한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는 거죠. 적응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제멋대로 나타나고, 짧은 기간의 환경 압력이 적응의 양상을 바꿉니다.
이런 주장은 『풀하우스』에서도 반복됩니다. 제각기 다른 환경 압력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진화는 당연히 진보가 아닙니다.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적응하는 형질들 사이의 통계 '중앙값'은 별다른 메시지를 갖지 않습니다. 그거 수많은 진화의 갈래가 있을 뿐이지요. 『판다의 엄지』는 굴드의 뛰어난 문장력으로 이 이론을 아름다운 형태로 종이 위에 펼쳐 보입니다. 판다는 엄지를 사용해 대나무의 줄기를 쥐고 잎을 훑어내는 능란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누가 봐도 엄지로 보이는, 그리고 엄지로 사용하고 있는 이 뼈는 엄지가 아니라 손목 뼈가 기형적으로 발달한 양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구조가 새롭게 발생한 게 아니라 적응을 통해서 다른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죠.
만약 신이 판다를 만들었다면 이런 독특한 적응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든 생물에게 있는 흔적 기관들에서 극적으로 발전한 진화의 역사를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만듭니다.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퇴보인지, 혹은 우리는 어느 길을 향해 가고 있는지. 『다윈 이후』에서 굴드는 종의 기원 마지막 장을 새롭게 해석한 바가 있습니다. “제각기 다르게 진보하여 수많은 종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리처드 애덤스 저
리처드 애덤스의 아주 두껍고 사랑스러운 책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고등학생 때 기차 안에서였는데요. 입석의 고통을 잊기 위해 읽기 시작했지만, 부산에 도착할 때쯤엔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흔히 토끼를 생각하면 아주 작고 연약한 동물이라고 여기게 되죠. 사실입니다. 이 소설 속의 토끼들은 힘이 하나도 없고, 수많은 적에게 항상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소설 속 토끼 신화에서 토끼의 왕자인 엘-어라이라는 “천의 적을 가진 왕자”라고 불립니다. 교만했던 엘-어라이라에게 토끼 신화의 신인 프리스 님은 벌을 내립니다. 모든 동물들에게 토끼를 해치고 먹고 싶게 하는 충동을 심어준 것이죠. 도망치는 엘-어라이라에게 마치 판도라의 상자같은 마지막 축복이 내려집니다. 토끼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엘-어라이라의 엉덩이에 축복이 내려지자 꼬리는 별처럼 빛나고 뒷다리는 튼튼하고 두꺼워집니다. 그리고 언덕을 쏜살같이 내달릴 수 있게 됩니다. '교토삼굴'이라는 말이 있지요. 토끼는 교묘하고 영민하며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 자신의 힘으로 돌아옵니다. 멀리 듣고 빨리 뛰고 많이 생각하여, 엘-어라이라의 일족은 결코 멸망하지 않고 삶을 이어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엘-어라이라의 후손들이 온갖 난관을 겪고 이주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토끼들의 면면은 제각각입니다. 모두를 이끌고 가는 지적인 리더 헤이즐, 마치 무당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예민한 토끼 파이버, '전사'로서 모두를 위험에서 지키는 빅윅,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댄더라이언,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는 블랙베리…… 이 모두는 아주 작고 연약한 토끼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이들은 살아남습니다. 자신의 약함은 명백한 상수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온갖 꾀를 내고 주변을 활용하고 세계를 파악해서 살아남습니다.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행복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나약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나에게는 개 같은 이빨도 없고, 고양이 같은 발톱도 없다며 손을 놓아버리기 쉽지요. 이게 다 멍청한 인간이라 그렇습니다. 토끼가 가진 건 오로지 빠른 다리와 쫑긋한 귀뿐이지만, 워터쉽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자질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세상과 맞서고 협상해 나갑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언제든 자신이 토끼처럼 느껴질 땐 개집 문을 열던 헤이즐과 운드워트에게 이빨을 드러내던 빅윅을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면 뭐, 내가 토낀데! 하고 으쓱 어깨를 펴고 탁탁 뒷발을 굴러 어디로든 달려 나갈 기운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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