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저 | 황금가지
이영도 판타지 신작, 혹은 다잉 메시지를 4년째 쓰고 있는 작가 이야기. 소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은 이렇게 두 가지로 소개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기존의 단편소설인 「에소릴의 드래곤」 등에 이어 더스번 칼파랑 경이 등장한다. 그는 귀족, 기사, 영웅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배 나온 두툼한 체형의 주정뱅이 아저씨다. ‘무적경’이라는 별명답게 엄청나게 강하고, 그에 맞는 흉흉한 소문이 따라다닌다. 죽음은 이미 오래전에 그를 동업자로 격상시켰다든가, 곰은 더스번 경을 보면 죽은 척하고 좀비는 반대로 살아있는 척을 한다든가. 여신들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더스번 경이 사망해서 하늘에 오르는 날을 조금이라도 미루기 위해 여신들이 기적을 남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자를 밝히며 상대를 가리지 않는 폭력적이고 무도한 사람이라고 악명이 높은데, 더스번 경이 무도한 점은 사실이지만 여자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그와 자주 동행하는 늑대인간 여성 사란디테의 말에 따르면 더스번 칼파랑은 ‘좋은 남자’다. 나쁜 사람처럼 굴지만 실제로는 우는 여자를 위로해 주고, 인기보다는 안쓰러운 눈빛을 받는 쪽이다.
소설 첫머리에서 더스번 경은 사란디테와 함께 이상한 임무를 맡는다. 4년 전 어스탐 로우라는 작가가 칼에 찔렸다. 그는 죽기 직전 자기 피로 글자를 적어 다잉 메시지, 혹은 임사전언을 남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이 글이 그에게 최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그는 작가로서 있는 힘 없는 힘을 끌어내 자신의 사건을 소재로 장편 대하소설을 연재한다. 그것도 남의 저택에서……. 어스탐 경을 초청했던 눌드 경은 저택의 주인으로서 그에게 집필실을 내어준다. 빨리 살인자 이름이나 밝히고 글을 끝내면 모두 편해질 텐데, 그가 언제 완결을 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하여 어스탐 로우 살인사건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4년 동안 장편 9권짜리 분량이 되었다. 내용이 슬슬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보이는 지금, 누가 문제를 제기한다. 피해자가 이미 죽은 것이라면 글을 쓰고 있는 자는 언데드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사악한 언데드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글이 완결되면 뭔가 끔찍한 게 태어나지 않을까? 그래서 무적경 더스번 칼파랑이 파견된다.
저택에서 어스탐 로우를 찔렀을 만한 유력한 용의자는 4명이다. 적어도 피해자가 질질 끌며 연재 중인 임사전언 소설 내용에 따르면 그렇다. 자연스럽게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은 추리소설처럼 흘러간다. 더스번 경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와 동행한 사란디테는 호기심이 넘치는 한편으로 아주 의욕만만이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중요 증거 1호’인 임사전언의 필사본을 얻어내 독파한다. 그래서 임사전언의 내용조차 모르는 더스번 경에 비해 사란디테는 명탐정처럼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맹렬한 추리 솜씨를 보인다. “칠흑의 아네지는 어느 손이 우세손인지 언급되지 않았으니까 왼손잡이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다면 랏트아계에선 오른손잡이!”
여기서 더스번 경은 ‘뭐? 무슨 말이야?’라고 되묻는 조수 역할이다. 소설 속 고유명사는 꽤 복잡하게 펼쳐진다. 약간 인내심이 필요한 지점이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 속에서 ‘랏트아계’는 말하자면 현실 세계다. ‘헬리보리계’는 픽션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환상 세계에 해당한다. 어스탐 경의 남동생인 세티카 로우는 헬리보리계에서는 쉐도웬의 공주 아네지라는 이름을 지닌다(사실 이는 세티카가 몰래 소설을 쓰려고 도전했을 때 썼던 필명이기도 하다). 저택의 주인인 눌드 경은 헬리보리계에서는 호잘리스의 트리아라는 기사이며, 아네지 쉐도웬과는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다. 하지만 현실인 랏트아계에서 눌드 경은 이미 에이바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임사전언 독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에이바가 바로 칠흑의 아네지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 출판사는 메모지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등장인물 목록을 부록으로 동봉했다. 나는 기꺼이 호의를 받아들였다. 임사전언 속 설정 외에도 작중의 등장인물은 여러 종류의 고유명사로 불린다. 더스번 경이 성씨는 칼파랑이지만 신분은 카쉬냅 백작이고 별명은 무적경이듯, 오소리 옷장 저택의 주인인 눌드 레초는 할라도 백작이며 그라이만의 필살경이라는 별명이 있다. 사건의 수사관으로 4년째 답답해서 죽어가는 스벤터 날바이는 엔파 백작, 답답함의 원흉인 어스탐 로우는 휴름 자작이다. 고유명사를 다 외우지 않더라도 소설 내용을 이해할 순 있지만, 메모지가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호칭에는 뉘앙스가 담긴다. 눌드 경은 아내를 매우 사랑했던 모양인데 왜 아내인 에이바를 이름이나 ‘여보’가 아니라 꼬박꼬박 ‘할라도 백작 부인’이라고 부를까?
판타지로서의 설정을 이해하는 외에도, 소설에 중간중간 등장하는 미스터리 클리셰를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이었다. 용의자가 왼손잡이냐 오른손잡이냐는 과거의 탐정소설에서는 중요한 요소로 제시되곤 했다. 한편 임사전언이 확실히 완결에 가까워지자 스벤터 경은 수사관으로서 앞으로 사흘간 아무도 저택에서 나가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이건 클로즈드 서클에 해당할까? 피해자는 한참 전에 칼에 찔렸으므로 이제 와서 공간이 ‘클로즈드’ 되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피해자는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살인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저택의 하인들은 (좀 무감각해지긴 했지만) 살인자가 자기들 사이를 돌아다닐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한다. 사란디테는 용의자를 1명씩 탐문하며 그들의 동기를 헤아린다. 범인이 피해자를 어떻게 찔렀는지는 중요치 않지만(시체가 움직이는 탓에 현장 보존도 불가능했다) 대체 누가 왜 죽였는지는 추리할 수 있다. 어찌저찌 미스터리로서 구색은 갖춘 셈이다.
그런데 살인사건 외에도 핵심 사건은 또 하나 있다. 피해자는 왜 글을 쓰느냐는 부분이다. 살인사건과 마찬가지로 ‘어떻게’는 중요치 않지만 ‘왜’는 수수께끼다. 보통 임사전언을 남기는 이유는 자신을 살해한 범인을 밝히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이 범인을 체포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임사전언을 끝맺으려면 이름 하나로 충분하다. 전개를 위한 복선, 개연성, 묘사 등은 원칙적으로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어스탐 로우의 임사전언 끝에도 범인의 이름이 나오리라 생각하며 그가 글을 다 쓰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4년 간 어스탐 경이 쓰던 내용은 소설의 형태를 빌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는 어스탐 로우라는 작가로서, 랏트아계와 헬리보리계를 잇는 ‘바다뱀의 거울’로서,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날조하는 무례한 사람인 동시에 살인사건의 피해자로서 글을 쓴다. 이런 중첩은 그가 소설을 쓰기로 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대체 왜 이런 복잡한 행위를 하는 걸까? 창작자는 대체 왜 창작을 할까? 사서인 네롤의 설명이 정확해 보인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쉽게 이해하고 이을 수 있다면 자기 마음 좀 알아달라고, 기억해달라고 외치는 책들이 왜 그렇게 많이 쓰이겠습니까.”
따라서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은 소설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나아가 소설의 핵심 장면 일부는 희곡 혹은 연극 무대 형식으로 서술된다. 제목은 ‘실제와는 좀 다를지도 모르는 막’이다. 그 내용은 현실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현실을 모사한 창작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처럼,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창작물처럼 진실을 담아낼 수 있다. 작중에서 죽은(혹은 죽고 있는) 어스탐 경은 작품 속 ‘실제와는 좀 다를지도 모르는 막’에서는 직접 대사를 한다. 남동생 세티카가 살인사건의 동기에 관해 단순하고 진부한 사실이야말로 진리이 아니냐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장면에서, 어스탐 경은 화를 내며 관객석을 가리킨다. “그러면 저분들이 허구를 왜 감상하시냐!” 관객들, 곧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를 향한 말이다. 소설은 늘 독자를 향한다. 어스탐 경의 소설과 그에 대한 소설 역시, 독자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다.
독자는 글을 마음대로 해석할 자유가 있다. 작가가 뭐라고 썼든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 또한 이런 오래된 진리를 말한다. 그런데 소설에 독자의 자유를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면, 그건 작가가 쓴 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작가가 그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골라 적은 것이다. ‘이영도 판타지 소설’에 잔뜩 등장하는 말장난과 격언을 빌리자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하다. 독자가 해석의 자유를 누리려면 필연적으로 글을 읽어야 한다. 그러니 작가가 하는 말은 사실 이 소설을 읽어보라는 뜻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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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탐 경의 임사전언
출판사 | 황금가지
심완선(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키워드로 여행하는 SF 세계』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가 있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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