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은의 인생책] 과거를 통해 비추어보는 지금 여기 - 『궁정사회』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궁정사회』를 집어들었던 이유는 그런 사람들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루이 14세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글ㆍ사진 정아은(소설가)
2021.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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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지시 받지 않고,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 돈도 많았으면 좋겠다. 음식점의 메뉴판을 보거나 옷가게에서 옷을 고를 때 가격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내 구미와 취향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갈망이 들 때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재벌기업 회장, 고액 연봉자, 광고 한번 찍으면 몇 억의 수입을 올린다는 유명 연예인. 세상만물을 창조했다는 신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왕조시대의 왕들같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존재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들을 떠올리며 부러워하는 이유는 하나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제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생각만 해도 저릿하지 않은가. 모든 걸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니!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궁정사회』를 집어들었던 이유는 그런 사람들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루이 14세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권력자 중의 권력자,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일인자보다도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다 간 인물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알아보고 싶었다. 대체 그는 왜 그렇게 제 마음대로 살 수 있었는지. 어떻게 해서 모든 사람을 발아래 두고 조종할 수 있었는지. 



그러나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절대권력을 가진 남자가 어떻게 그런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는지를,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라 불렸던 그 남자가 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걸 제 마음대로 하며 살지 못했기 때문에.

태양왕이라 불렸던 루이14세는 모든 걸 제 뜻대로 하기는 커녕 그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겉보기에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것은 그가 당대의 지배층이었던 귀족계층과 점차 세력을 넓혀가는 시민관료계층을 교묘하게 차별하고 경쟁을 붙였기 때문이다. 범 엘리트 계층이라 불릴 수 있는 두 계층이 합세하는 순간 왕권이 위험해진다는 걸 알았기에, 루이14세는 늘 긴장한 채 두 계층의 동태를 살폈다. 엘리트들 사이에 어떻게 정파가 나뉘고, 특정 정파의 성향이 어떠하며,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는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 누구도 안정적인 친분을 쌓거나 장기간 궁정 내 중요직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했다. 같은 엘리트끼리 친분을 쌓거나 특정 개인이 일정한 직위를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왕인 자신을 통해서 제한된 기간 동안만 할 수 있게 만들고, 모든 이들이 서로 경계하며 왕의 눈치를 살피게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한 예법과 허례허식은 그런 통치전략에서 나온 부산물이었다. 

그것은 루이 14세가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야 하는 위기시의 지도자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체제를 물려받은 평시의 지도자라는 상황에서 비롯된 지배기법이었다. 위기시의 지도자는 휘하의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결집시켜 카리스마 있게 이끌고 가야 하지만, 모든 것이 안정된 상태 하의 지도자는 휘하의 사람들이 모두 뭉쳐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않도록 아랫사람들의 분열과 경쟁을 획책해야 한다.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프롱드의 난>으로 위기를 겪었던 루이14세는 귀족과 관료 계층이 단합하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렸고, 70년이 넘는 긴 치세동안 귀족·시민 관료층 간의 교묘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며 왕좌를 지켰다.

아이러니한 것은 루이 14세 자신이 그런 분열과 경쟁 상태에 누구보다도 심하게 구속을 받았다는 점이다. 눈 뜨는 순간부터 자신과 눈을 맞출 사람, 옷을 갈아입혀줄 사람, 물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세분화해 지정하고, 그렇게 ‘왕의 총애’를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방식을 통해 아랫사람들이 서로 질투하고 멀어지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이 유명한 군주는 제 사생활과 감정을, 인생의 치명적이고 비밀스러운 순간을 만인의 시선 앞에 노출시켜야 했다. 그 결과 그는 무엇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제 진짜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없었다. 궁정에 출입하는 이들의 분열을 통해서만 군주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기에, 그 자신이 평생을 분열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태양왕’이라 불렸던 사내가 강화하고 완성했던 궁정사회의 문화와 예법을 분석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허례허식’에 매달려야 했는지, 왜 경제적 파산상태에 이르면서까지 겉으로 보이는 치장과 과시와 체면에 매달려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중심으로 세분된 다양한 의례와 절차를 절대규범으로 여기며 그를 통해 권력과 지위를 획득하는 방식이 당시 궁정에 소속되었던 엘리트층이 몸담았던 ‘결합태’였기에, 누구도 그러한 습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동안 ‘절대권력’이라는 단순한 개념으로 정리되었던 지난 한 시절의 작은 관례들을 하나하나 파고들어가 당대의 사회 구조와 연결시키는 엘리아스 특유의 분석기법 덕분에, 우리는 당대를 살았던 이들이 비합리적이고 누구도 이익을 보지 못하는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했던 이유를, 프랑스 혁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무력에 의해 제압되는 순간까지 낡고 우스꽝스러운 의례에 집착했던 이유를 결국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의 행태가 어리석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당대의 주류를 이루었던 가치관과 사회구조를 더듬어 만져보면 그 연유와 당위에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허례허식과 왕에 대한 아첨의식이 가식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허무한 영구기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17세기 엘리트 계층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2021년의 대한민국의 모습이 떠오른다. 서열화된 대학 체계와 철통같은 입시제도 하에서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시대와 맞지 않는 교육을 시키는데 매진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부모들과 교육자들, 그 수용자인 학생들이 지나고 있는 답답한 현실이 묵직하게 가슴에 얹힌다. 백 년 혹은 이백 년이 흐른 어느 날, 누군가 지금의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교육과 입시체계, 그를 둘러싸고 형성된 수많은 사교육 기관과 상위권 대학 입학이라는 진입장벽을 넘기 위해 동시대인들이 만들어냈던 기괴한 습속들을 들여다본다면, 지금 우리가 태양왕 시대 궁정사회에 존재했던 어처구니없는 예법을 보며 느끼는 것과 똑같은 느낌을 갖지 않을까? 그 허무함과 무용함을 알면서도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 어떻게든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처절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가엾은 우리 모두의 모습은 17세기 프랑스 궁정사회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자신이 곧 국가라고 선포했던 비대한 자의식의 소유자 루이 14세와 그가 속했던 사회의 구조를 들여다보면서 적잖은 위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동안 모든 걸 제 마음대로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그 무엇도 제 의지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에는 두 가지 효용이 있다. 하나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하는 위안이다. 태양에 빗대어질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왕이었지만, 그가 속속들이 제한받았고, 인내해야 했고, 누구와도 입장의 동일함을 나누지 못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을 혼자 삭여야 했다는 사실은, 아무런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인 내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 누구도 억압과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으리니. 너도 나도, 어디에 살든, 무엇을 가졌든, 예외 없이 한계를 감내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 그 깨달음은 내게만 특별히 억울하게 지워졌다 생각했던 무거운 짐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소소한 농담처럼 여기게 만들어준다. 

또 하나는 내게 없는 걸 가진 이들을 부러워하며 낙담하던 습관에 철퇴를 가해준다는 점이다. 보기 좋은 외모를 타고 난, 혹은 뛰어난 지능을 타고난, 혹은 돈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를 질시하며 그들만큼 가지지 못했음을 한탄하던 내게,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이에게도 자기만의 치명적인 문제와 고충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용기를 준다. 신이 인간 모두에게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고뇌의 단초를 예외 없이 심어두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입장의 동일함에서 솟아오르는 연민. 나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타인의 내면에 깊이 잠겼다 나오는 경험은 이렇듯 여유와 관조, 연대감을 안겨준다.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모두에 알찬 참고 서적이 될 수 있을 이 책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억압하는 것 못지않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억압할 수 있음을, 어떤 측면에서는 가장 위쪽에 자리 잡은 이가 가장 억압적인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구체적인 논증을 통해 흥미롭게 보여준다. 

다만 한 가지, 도입부에 학제 간 논점에 대한 지나치게 긴 주장이 이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책을 쓸 당시 역사학의 학문적 기법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듯, 저자는 역사학계의 단선적인 고찰방식에 대한 비판에 필요 이상의 지면을 할애함으로써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독자를 김빠지게 만든다. 이는 엘리아스의 또 다른 주저인 『문명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던 일이었기에, 책을 읽던 초반엔 적잖이 갈등했다. 

이 지루한 동어반복적 비판을 대체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가! 그러나 『문명화 과정』이 그랬듯 지루함과 당혹감을 참아내며 분량의 오분의 일 정도가 되는 지점까지 나아가면, 어느 순간 엘리아스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가 집중적으로, 특유의 구체적인 분석과 함께, 역사학과 사회학과 심리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주렁주렁 매단 채, 정신없이 쏟아진다. 그 파도에 발을 담그면, 그 다음부터는 몸에 힘을 빼고 서핑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과거의 한 장면을 예리하게 통찰함으로써 현재의 자신과 제가 속한 시대를 훤히 비추어볼 수 있는 저릿한 서핑을.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나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처럼 짧고 대중적인 저서에는 이런 도입부의 관문이 없는 것을 보면 이런 긴 서설은 엘리아스가 묵직한 학술서를 쓸 때면 어김없이 거쳐 갔던 의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 의례는 기꺼이 인내해줄 수 있으니 작가여, 부디 또 다른 묵직한 저작을 보여 주시옵소서, 읊조리며 다른 책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저 아직 접하지 못한 다른 학술서가 많이 있기를 염원하면서. 



궁정사회
궁정사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저 | 박여성 역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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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소설가)

장편 소설『잠실동 사람들』등과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