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企劃)’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일을 꾀하여 계획함”이란 한 줄 뜻으로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기획해본 사람들은 안다. 기획 일은 한 줄로 담을 수 없는 모호한 일들을 한가득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획 일을 조금이라도 잘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혈받아야 하며,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가 취미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며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절대로 도제식 훈련으로는 배울 수 없는 일이다.
최근 『기획자의 독서』를 출간한 김도영 작가는 ‘네이버’라는 우리가 매일 친숙하게 사용하는 IT 서비스 기업에서 일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IT 최전선에서 저자가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내기 위해’ 가장 가까이에서 기댔던 건 예상외로 ‘책’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서 기획하는 힘을 얻는 동시대 기획자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브랜드 경험 기획’ 업무를 담당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기획자’로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걸까요?
‘브랜드 경험 기획’이라는 말이 낯설 수도 있으실 텐데요, 정확히는 회사 내외부에 있는 다양한 접점과 경험들을 브랜딩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각종 요소의 네이밍, 카피라이팅부터 브랜딩의 기초를 잡는 상위 기획, 회사 내외부의 건물이나 공간을 브랜딩하는 공간 기획까지 업무 범위가 꽤 넓은 편이에요.
올해로 입사한 지 9년째가 되었는데, 그동안 네이버에서 광고/비즈니스/콘텐츠/웹서비스 등을 기획하고 마케팅하는 업무들을 주로 했습니다. 담당하는 서비스에 따라 타이틀도 다양하게 변했지만 늘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사람으로서 일을 해온 셈이죠.
책에서 말씀하신 ‘기획자의 정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기획자’라고 하면 요즘은 게임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기획자들을 주로 떠올리게 되는데요. 작가님께서는 ‘기획자’의 영역을 어디까지로 보시나요?
한때는 저도 기획의 영역을 잘게 쪼개서 ‘OO기획자, △△기획자’ 같은 형식으로 즐겨 부르곤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기획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이 많이 갑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계획한 무엇인가로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기획자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 오히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기획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영역을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릅니다. 저는 본인에게 기획자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기획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동시에 내가 기획한 무엇인가가 다른 사람에게 작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적당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기를 바라고요.
작가님께서는 기획력의 에너지원이 ‘책’이라고 하셨는데요. 유튜브나 SNS 등 빠르게 찾아볼 수 있는 인풋 소스가 가득한 지금, 왜 하필 읽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책을 기획 도구로 떠올리셨나요?
기획 일은 멋지고 기발한 영감을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본인의 생각을 하나하나 풀고 엮는 일에 가까워요. 그러니 기획을 잘하려면 ‘생각의 근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의 조각들을 진득하고 밀도 있게 엮을 수 있는 힘 말이죠.
저는 영상이나 사진도 좋은 인풋이 될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시각적인 요소가 먼저 머릿속을 선점해버리면 그만큼 내가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책은 늘 내 힘으로 끝까지 생각을 끌고 갈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도구가 되어줍니다. 기획하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단련된 힘이 기획’력’이 되는 거라고 보고요.
무엇보다 저는 책 자체가 더없이 훌륭한 ‘기획물’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기획자는 ‘구조를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책에는 작가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거쳐왔으면 하는 동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고 있거든요. 그 구조를 이해하며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풀고 엮기를 반복한 일련의 과정들이 생생하게 느껴져요. 그러니 기획하는 사람에게 언제든, 쉽고, 편하게, 그것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는 훌륭한 교재가 바로 책인 거죠.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를 찾아 서점에 가신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점에는 얼마나 자주, 왜 가시는지요? 그리고 서점에서는 무엇을 발견하시나요?
서점이란 공간 자체를 참 좋아해요. 저는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이 나름의 건재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서점도 큰 몫을 한다고 보거든요. 같은 공간 안에서 저마다의 관심사에 빠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공간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책 구경을 하러 가기도 하지만 사람 구경을 하러 서점에 가기도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즘은 어떤 책이 나왔나’ 혹은 ‘요샌 뭐가 트렌드인가’ 하며 서가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만, 결국 그건 각자의 관심사와 목마름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뜻밖의 보석을 발견하기도 하는 거죠.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면 참 재미있어요. 사실 밖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는지 겉으로만 봐선 알 수 없잖아요. 그런데 서점에 가보면 그 사람이 지금 어느 분야에 머물러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만으로도 여러 정보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은 서점만이 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작가님의 독서 루틴에 대해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주로 2주간 읽을 책을 미리 고르는 편이에요. 서로 연관 있는 책을 고르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두세 권 고르기도 하죠. 속독가나 다독가와는 거리가 멀어서 다 못 읽고 2주가 훌쩍 지나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에요. 하지만 다 못 읽은 책은 잠시 쿨하게 작별을 고하고 또 2주간 읽을 다른 책을 골라요. 꼭 기간을 정해놓고 읽을 필요는 없지만 이 루틴을 반복하다 보면 작게는 내가 앞으로 2주간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질 것인지, 크게는 내가 앞으로 2주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 것인지 와도 맞닿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더라고요.
또 하나는 ‘필모’라는 취미에요. 이건 제가 만든 말인데요, ‘필사’를 넘어서 직접 그 작가가 되어본 것처럼 모방해서 글을 써보는 거예요.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아, 이 작가처럼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럴 땐 그 작가의 호흡과 문체와 화법과 가치관을 흉내 내서 글을 써보는 거죠. 작가가 일부러 비워놓은 듯한 부분을 내가 직접 상상하며 채워 넣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이 책의 저자가 내 일기를 대신 써준다는 느낌으로 나의 이야기를 작가의 화법으로 써보기도 해요.
마지막은 좀 특이한 루틴인데, 저는 책 제목을 수집하는 걸 좋아해요. 마음에 드는 제목들은 따로 메모장이나 엑셀에 주욱 적어서 모아놓거든요. 그렇게 정리된 책 제목들만 훑어봐도 요즘의 트렌드와 시대정신이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것 같아요. 직업이 직업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 제목은 제가 멋대로 바꿔 보기도 하고요.
그러니 제 독서 루틴은 그저 읽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책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와 경험들을 계속 확장해보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취미가 아닌 특기란에 ‘독서’라고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라고 하셨는데요. 책을 잘 읽기 위해서는 무엇이 남달라야 할까요? 또 책이라는 도구를 일과 삶에서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까요?
저는 독서 만능주의자는 아니에요. 오히려 책을 좋아하다 보니 늘 조심할 때가 많아요. 다른 훌륭한 도구들이 있는데도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고집할까 봐 경계하는 거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돌고 돌아 결국 기대게 되는 게 책이더라고요. 저는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으면,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일을 좋아하는 저에게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준 건 결국 책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내용에 관한 것뿐 아니라 내가 책을 어떻게 대하고, 활용하고, 가지고 놀고, 재해석하는지를 여기저기서 많이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은 독자와 저자 사이만 연결해주는 게 아니라 독자와 독자 사이에도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거든요. 그렇게 서로의 생각을 자극하고 공감을 키워가면서 ‘읽는 문화’가 더 확산된다면 일도, 삶도 조금은 더 즐거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직업으로서 기획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좋은 기획자의 자격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기획하는 일은 늘 ‘즐거운 두려움’을 동반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고 두근거리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과 책임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획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리지널리티’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먼저 느끼고 공감하고 확신한 것들을 어떻게 해야 오롯한 형태로 소비자나 사용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죠.
그런 노력이 결국 나만의 기획 스타일을 만들어주고 이 직군에서 버틸 수 있는 무게중심이 되어준다고 봅니다. 바깥세상을 읽어내려는 것만큼이나 자기 스스로를 잘 이해해야 좋은 기획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제게 있기도 하고요.
*김도영 현재 네이버에서 브랜드 경험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광고, 콘텐츠, 서비스 마케팅 등 다양한 직무를 경험했지만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만드는 ‘기획자’로 불리는 것이 제일 편하고 좋다. 크리에이티브만 많으면 다인 줄 알았던 올챙이 시절을 호되게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기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과거부터 미래까지 모두 챙겨야 하는 ‘찐 3D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기획을 잘하고 싶어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해진 영역도, 명확한 커리어 패스도, 검증된 스킬도 없는 기획자에게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것이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과 함께 조금씩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브런치에 소개했고,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