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정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책과 함께 노닐면 되리라
_『책에 미친 바보』에서
조선의 책벌레 이덕무가 남긴 글은 물론 책 읽기의 이점에 대해서예요. 얼마 전 짧은 여행을 준비하면서 문득 이 글을 떠올리고는 네 번째 문장을 '길(또는 시간)과 함께 노닐면 되리라'로 바꾸면 정확히 혼자 떠나는 여행의 이점과도 일치한다는 데 감탄했더랬습니다.
책 읽기는 곧 이야기와 문장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세상 읽기에 다름 아닐 터, 그래서 책벌레들은 대체로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 좋아하는 이들은 책벌레인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서울, 광주, 제주의 도서관과 미술관 공연장 정도를 목표지로 삼아 바퀴가방을 끌고 나서곤 하는 저로서는 '책벌레' 쪽에 방점이 찍힌 여행 애호가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께서는 어느 쪽일지요. 여행 가방이라기보다는 읽고 싶었던 책가방을 꾸리느라 시간을 끌고 필수품을 빠트린 적이 있다면 당장 저와 주먹 악수를 해야 합니다.
소연정 그림책 『여행의 시간』을 읽다 보면 '이 작가는 여행 경력만큼이나 내공 깊은 책벌레로구나'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림에 능한 그림책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또렷하게 군더더기 없이 쓰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그림책으로는 조금 작다 싶은 판형의 초현실주의풍 앞표지와 주인공이 사막의 별빛에 취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뒤표지 사이 본문은 그야말로 '여행'으로 가득합니다. 세계적인 여행 명소와 작가가 온 마음으로 맞닥뜨린 명장면이 번갈아 펼쳐져요. (조금 작다 싶은 서체의 독백체 글과 담백하고도 풍성한 그림을 조촐하게 담아내어 조근조근 다정한 여행담을 엮어낸 편집 디자인 솜씨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이탈리아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갔을 때, 의당 이름난 명소로 권유받은 산마르코 대성당을 둘러보고 곤돌라를 탔지만, 정작 경이와 감흥을 누리기로는 이른 아침 물안개에서였다는 에피소드가 세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곤돌라를 타고 물길을 여행하는 관광객들과 산마르코 대성당 앞 광장의 관광객들 속에 점처럼 찍혀 있던 '나'는 관광 지도에는 없는 '이른 아침 수로 산책길'에서 뚜렷이 모습이 드러나고 생생한 감각을 경험해요. 셀축의 명소 에페수스 유적지와 도서관, 그리스의 명소 '하늘의 기둥' 메테오라, 이집트 서부 사막의 바하리야 오아시스,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도 말이지요.
이런 구조 덕분에 독자는 이름난 명소를 공들여 복기한 그림 장면과 함께 작가의 심상이 맞닿은 현지의 풍경을, 바람을, 별빛을, 인연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고품격 여행 안내서에도 없는 여행의 지혜랄까요. 그중에서도 16세기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는 사암 봉우리 위의 수도원 그리스 테실리아의 메테오라 여정은 특히 생생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높디높은 봉우리에 있는 비를람 수도원을 보고 내려오는 길, 지치고 허기진 작가처럼 바싹 야윈 개가 길동무가 되어주었고, 소나기 때문에 둘은 걸음을 멈춰야 했고, 주인공의 젖은 가방 속 비상식 - 빵조각과 쿠키와 삶은 달걀 - 을 빗속에서 나눠 먹었다고요. 더없이 차갑고 외로운 배경 속에서 전생의 만남이듯 동물과 사람의 인연이 따스하게 그려져 있어요. 만약, 메테오라에 가게 된다면 이 개를 만나고, 작가처럼 '가슴은 삶에 대한 사랑으로 차올라 다시 두근'거릴 듯합니다.
책과 여행을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을 완성하면서, 편집자와 디자이너는 그림책 앞표지를 펼치면 열리는 황갈색 면지에 사막의 모래알 또는 별 같은 점을 보일 듯 말 듯 뿌리고 그 아래쪽에 작가에게 영감을 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한 구절을 흘려뒀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어
그 점은 (…) 우리의 마음을 나아지게 하고 (…)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있게 하고, 떨어질 때는 일으켜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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