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평론가 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칼럼이 격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최신 이슈부터 앨범 패키지에 담긴 이야기까지 지금 케이팝의 다채로움을 전합니다. |
많은 이에게 제이홉(j-hope)의
그런 맹렬함에 비해 곡들이 '매운맛'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가 케이팝에서 익숙하게 접하는 인트로와 전개부, 절정부와 확실한 결말 같은 구조의 롤러코스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곡들은 각기 스냅숏처럼 일정 시간을 흐르다 "자, 여기까지만"이라고 말하듯 과감히 잘라내고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 버린다. '케이팝 맛'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병렬된 인털류드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밋밋하거나 얕은 것은 아니다. 곡 하나하나는 내부에 메시지의 전제와 이면이 차곡차곡 담겨 있고 그에 따라 비트의 음악적 전개와 이에 조응하는 래퍼의 '연기'가 충실한 굴곡들을 만들어낸다. 곡들이 갑작스럽게 끝난다고 느낀다면 어느 정도는, 곡마다 내부에 흐르는 다이내믹이 더 앞으로 나아갈 만큼 넉넉하기 때문일 수 있다. 순식간에 끝나는 곡들이 나열된, 순식간에 끝나는 앨범이다.
이러한 출렁임을 타고 제이홉은 비관으로 가득한 세계관 속을 날렵하게 '허슬'하며 생존과 희망을 추구하는, 특유의 낙천적인 캐릭터상을 심도 있게 전달한다. 비트의 질감이 <화양연화> 연작 이전 <학교> 시리즈 시절의 방탄소년단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앨범은 또한 '시대의 아름다운 청년'이 된 BTS의 한 단면을 증언하기도 한다. 내부에서 부글대는 활기와 끝내 지향하는 희망이 단지 한국 주류 문화로서의 케이팝이 수용할 수 있는 '어두운 콘셉트'의 타협점이 아닌, 셀프메이드 아티스트로서 BTS의 본연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말이다. 제이홉의 솔로 앨범이자 BTS의 스핀오프로서의 의의도 생각해 볼 만해지는 대목이다.
또 한 가지, 이 앨범의 특기할 점은 '위버스 앨범 버전'이다. 패키지에 수록된 코드를 '위버스 앨범' 앱에 등록하며 향후 이 앱을 통해 앨범을 감상할 수 있는 포맷이다. 소속사인 하이브(HYBE)에서 다른 아티스트들도 CD와 '위버스 앨범'을 함께 발매한 바 있는데, 제이홉은 CD 없이 '위버스 앨범 버전'으로만 발매됐다. 패키지에는 등록 코드와 포토 카드, 그리고 예스24 등 구매처에 따라 주어지는 특전 스티커만이 포함돼 있다. 이중 포토 카드는 이미 패키지 내부에 수납하기보다 '탑로더' 등을 이용해 별도로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이 일반화돼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물리 앨범이기는 하되 그 '물성'은 매우 제한돼 있는 셈이다. 믹스테잎으로만 발매되던 BTS 솔로 작품이 정식 앨범으로 발매된다는 소식에 기대한 팬들에게는 디지털 앨범에 꽤나 가까운 이 포맷이 아쉬울 수도 있겠다.
기존에도 물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며 CD를 대체하려는 디지털 앨범 패키징 포맷이 케이팝 업계에 몇 가지 등장한 바 있는데, 아직 그 존재감은 다소 부족한 편이다. 이중 위버스 앨범은 다운로드 권리가 아닌 서비스 내 감상 권리를 판매한다. 그런 사태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서비스가 종료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종료된다 해도 감상 기록이나 플레이리스트, 댓글 정도가 사라지고 소비자는 다른 월 정액 서비스에 가입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구매한 앨범의 감상 권리가 신기루처럼 날아갈 수도 있다는 점은, 스트리밍 시대 이전 초기 음원 서비스나 전자책 서비스 모델과 궤를 같이한다.
CD와, 특히 으리으리하게 구성되는 케이팝의 앨범 패키지가 남기는 탄소 발자국에 대한 경각심이 공유되고 있는 시점이다. '한없이 디지털 앨범에 가까운' 포맷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STOP(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환경 재앙을 포함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대해 "작은 발걸음이 큰 발걸음"이라 말하고 있기도 하다. 팬들의 큰 불만인, 위버스 앨범이 빌보드 차트 집계 대상이 아니라는 점까지, 많은 것이 과도기적인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BTS의, 그것도 커리어 상 큰 상징적 의미를 갖는 앨범이 당장의 한 걸음을 걷는 것은 나쁜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라질 수도 있지만 머물 수도 있는, 더 상업적이거나 높은 성적을 올릴 수도 있지만 딱히 그러지 않아도 좋은 앨범. 이 앨범의 많은 선택은 '지금으로서 즐길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미묘(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