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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겨울이다. 시린 칼바람에 볼을 베일 때마다, 꽁꽁 얼어붙은 풍경들을 도처에서 마주할 때마다, 어쩐지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자꾸 울고 싶어지는 계절이지만... 아직은 괜찮다. 그래도 12월은 버틸 수 있다. 이 달의 끝엔, 무려, 크리스마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크리스마스를 정말 좋아한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이토록 매서운 날씨에 잠시나마 몸과 마음을 녹이고 한껏 들뜰 수 있는 축제가 있다는 게 매번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다. 물론 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나날이 상업화되어가는 이 외제 명절에 대한 여러 의심과 지탄의 목소리들도 일면 이해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크리스마스야말로 외롭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적의 날이라 믿고 있다. 잠시 힘겨운 일상에서 벗어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멋진 사건들을 마음껏 꿈꾸고 기대해 보는 마법 같은 날. <나 홀로 집에> 남겨졌지만 신나게 악당을 물리치고, <당신이 잠든 사이에> 슬그머니 사랑에 빠지고, 난데없이 <패밀리 맨>이 되어 진짜 삶으로 풍덩 뛰어드는, 그런 모험과 환상의 날 말이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고? 어차피 다 꾸며낸 이야기 아니냐고? 맞다. 결국 다 만들어진 이야기고, 내가 그런 영화들을 지나치게 많이 보긴 했다. 어쩌면 내가 평생 믿고 기다려 온 크리스마스는 할리우드 영화 속에나, 작가들이 만든 이야기에나 존재하는 신기루일지도.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 사납고 황량한 겨울에 잠시나마 행복한 상상으로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도 천만다행이지. 그리고 이야기는 힘이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정말로 힘이 세서 오랫동안 보고 듣고 만지다 보면 어느새 진짜 현실이 되기도 한다. 마치 영화처럼.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를 잘 보내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영화와 함께하는 거라고, 이 연사 힘차게 외쳐 본다. 너무 뻔하고 시답잖은 답 아니냐고? 하지만 좋은 영화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를 조금은 구원하니까, 크리스마스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극장을 찾는 것이 가장 만족도가 크겠지만, 여러 OTT 플랫폼에 쏟아지는 비슷비슷한 최신 크리스마스 영화들도 이 시기엔 꽤 볼 만하다. 그러나 역시 최고는 어린 시절 흠뻑 빠져서 봤던 크리스마스 배경의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는 거다.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모른 척 마음 한구석에 치워 둔 나만의 오랜 꿈과 소원과 이야기들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희열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영화에 나오는 여러 디테일을 현실로 가져와 보는 것도 꽤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올해 나는 <그렘린>의 기즈모가 들어있던 것과 같은 큰 리본이 달린 선물 상자들로 집안 곳곳을 장식했다. 물 건너 사는 어린 조카에겐 <34번가의 기적>의 주인공 소녀가 연상되는 빨간색 베레모를 산타의 선물로 위장해 보낼 예정이다. 이브엔 <세렌디피티>에 나온 디저트 '프로즌 핫 초콜릿'을 만들어 볼까 싶지만, 사실 요리엔 영 소질이 없는데... 그래도 괜찮다. 정확히 밤 10시 32분 59초부터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감상하기 시작할 거니까. 그러면 25일 자정으로 넘어갈 때 론 위즐리한테 크리스마스 인사를 받고 다 괜찮아지겠지. 역시 영화가 최고다. 모두 해피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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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영화감독)
영화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단편영화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만들었습니다.